승승장구하던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흔히들 그 위기의 원인이 '생명윤리'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생명윤리적 문제 또는 생명윤리 스캔들이라고 해야 옳지만 지금 떠돌고 있는 네티즌의 의견이나 주류 언론의 논조는 문제를 제기한 과거의 협력자(섀튼)와 언론사(MBC), 그리고 온갖 쓴 소리를 해대는 생명윤리학자들을 이 위기의 원흉으로 몰아붙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캔들의 당사자를 옹호하고 있다. 방송을 통해 이 스캔들의 사실관계가 상당 부분 확인됐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과연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들은 주로 국익을 이야기한다.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국익을 위해 대충 덮고 가는 것이 최선이란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그들의 주장은, 정당하지 않은 전쟁이지만 국익을 위해 파병을 해야만 하고, 재벌의 분명한 위법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경제발전을 위해 쉬쉬하며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과 닮은꼴이다.
절대로 매매된 난자를 사용한 적이 없다고 여러 차례 반복한 능청스런 거짓말도, 카드빚에 쪼들리는 여성에게 난자 채취에 따르는 위험과 고통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은 채 돈 몇 푼 쥐어주고 수많은 주사를 놓고 전신마취까지 해야 하는 수술을 받도록 한 것도, 연구원을 피험자로 삼을 수 없도록 한 국제적 윤리규정을 위반한 것도, 기관윤리위원회(IRB)에 거짓 연구 계획서를 제출한 것도, 공동 연구자가 절대로 참석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기관윤리위원회에 관한 지침을 위반한 것도 국익을 위해 덮고 가잔다.
그들에게 생명윤리는 국익에 역행하는 거추장스런 장식품이거나 쓸 데 없는 잔소리꾼일 뿐이다. 아직 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여기까지만 보아도 이 이야기는 아주 훌륭한 생명윤리학 교재가 될 만하다. 교과서에서 하지 말도록 가르치는 것만을 골라 아주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명윤리가 국익에 종속된다고 강변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한국적 상황을 들어 반박한다. 우리의 윤리 기준이 서양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서양인의 오만한 오리엔탈리즘에는 나도 신물이 난다. 황우석 박사를 배반한 섀튼은 나도 무척 밉고 싫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윤리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한국적 윤리의 근거와 내용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돈 몇 푼 받고 아무런 득도 없는 수술을 받는 '성스러운 여인'을 칭송하는 것이 한국적 상황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힘없는 여인 몇 명의 고통과 위험쯤은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한국적 윤리인가? 아니면 이 사실을 언론에 알린 실험실 안의 고발자를 용납하지 않는 가부장적 연구실 문화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연구윤리인가?
***마법 1 : 복제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나는 이 스캔들을 보면서, 그리고 한국적 상황이라는 논리로 대충 덮어버리려는 국민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리 현상을 발견한다. 지금부터는 치명적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보여주는 황우석 신드롬에 대한 나름의 진단을 해 보는데 그것은 우리가 두 가지 마법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과학이 또는 복제가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의 마법이다.
애초에 이 연구는 스캔들의 가능성이 무척 큰 것이었다. 복제인간의 가능성을 둘러싼 종교계와 과학계의 논쟁, 배아가 생명인지에 대한 논쟁,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 등은 인류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래에 대한 환상과 불안이 교차하는 무척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쟁들은 '난치병 치료'라는 명분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채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고 체세포핵이식을 통한 배아생성을 허용하면서 무대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척 중요한 것이 함께 사라져버렸는데 그것은 이 기술이 난치병 치료에 과연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과학자 사회의 민주적 담론이었다. 이러한 과학 담론의 사라짐은 황우석이라는 영웅의 등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언론은 연일 영웅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에 온 관심을 쏟았고 다른 과학자들의 견해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말이 곧 과학이요 진리요 우리의 미래였다.
이 기술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지적은 간혹 있었지만 이 기술의 과학적 가능성에 대한 깊이 있는 검토는 생략되거나 기피되었다. 국민의 기대와 환상이 증폭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모든 관심과 연구비와 찬사가 영웅에게 집중되었다. 심지어는 신진 과학자에게 주기로 계획되었던 연구비마저 그에게로 전용되었다. 언론은 이 기술의 가능성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문제점이나 보완점에는 눈을 감은 채 영웅의 입만 바라보았다.
비교를 위해 세계 최초로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킨 영국의 영웅 이언 윌머트의 사례를 보자. 아시다시피 영국은 우리와 함께 체세포핵이식을 통한 배아생성을 허용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세계 최초로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킨 나라도 영국이다. 생명공학을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도 우리와 같다. 그런데 그 나라의 언론은 우리와 다르다. 뉴턴과 다윈 같은 수많은 과학 영웅들을 배출시킨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들이 영웅을 다루는 방식은 무척 침착하다. BBC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이 기술의 가능성과 문제점을 균형 있게 지적하며 윌머트 또한 흥분하지 않고 가능성과 한계를 담담히 털어놓는다.
다른 것은 우리가 과학을 환상적으로 바라보는 반면 그들은 현실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과학에서 한번도 1등을 해 보지 못한 우리에게 영웅은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환상을 키워서라도 외환 위기 때 온 국민이 벌인 금모으기나 월드컵 때 보여준 한 마음을 재현할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을 훨씬 높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은 감독에게 전권을 주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짧은 시간 안에 세계 4강의 위업을 달성한 축구 같은 것이 아니다.
난치병 치료법의 개발이란 것이 이 인간배아 줄기세포 연구로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 기술의 이점은 조직 거부 반응을 피할 수 있다는 이론적 가능성 하나다. 한계는 있지만 잉여배아나 성체 줄기세포를 통해서도 우리는 세포분화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할 수 있다. 성체 줄기세포는 이미 수많은 난치병 환자를 살려냈다. 과학과 난치병 치료기술의 개발에 필요한 것은 냉철한 현실감각, 그리고 꾸준한 투자와 노력이지 윤리적 스캔들에 눈을 감는 도덕적 무감각이 아니다.
***마법 2 : '황우석 음모론'을 맹신하는 대한민국**
우리를 사로잡은 두 번째 마법은 우리가 선점한 이 기술이 앞으로 우리를 먹여 살려 줄 동력이며, 윤리적 문제를 지적하면서 결별을 선언한 섀튼은 필요한 기술을 빼간 산업스파이로서 우리의 앞선 기술을 시샘해 윤리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주로 정치권이나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서 퍼트리는 경향이 있는데 <프레시안>이 몇 차례 강조한 바와 같이 이는 과학연구의 국제적 관행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치다. 섀튼 자신이 10여 년 전에 난자 밀매와 관련해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 중 하나다. 만약 하자가 있는 연구에 참여한 것이 발각되면 그 자신도 과학자 사회에 발붙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그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거래를 통한 연구가 과학 사회에서 철저히 배척된다는 사실을 그렇게도 믿고 싶지 않은 것은 역시 언론과 정치권이 건 마법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거대한 음모의 결과로 해석하는 고질병을 앓고 있는 정치권이야 그 버릇 못 버려서 그렇다 치더라도, 사건의 배후를 심층 취재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것이 임무인 언론이 나서서 그와 같은 음모론을 퍼뜨리는 현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백번 양보해서 어떤 음모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비윤리적 연구관행을 합리화할 구실이 될 수는 없다.
이제는 마법에서 깨어나야만 한다. 그리고 환상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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