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의 시신을 옮기던 용기 있는 사람들까지도 점차 사라졌다. 역병에 걸렸다가 회복된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그중 여럿이 죽었고, 어떤 이들은 구덩이 옆으로 시체를 옮겨 안으로 던져넣다가 쓰러지기도 해다. 자신만은 안전하고 쓰디쓴 죽음은 맛보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사람들마저도 병에 희생되면서 도시 안의 혼란은 더욱 커져갔다." (1655년 '런던 대역병'에 대한 기록 中)
과학기술 시대에 인류 앞에 새로운 '공동의 적'이 나타났다. 에이즈(AIDS), 크로이츠펠트야콥병(CJDㆍ인간 광우병), 조류 독감(AI) 등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종 전염병들이 등장해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수잔 스콧과 동물학자 크리스토퍼 던컨은 <흑사병의 귀환>(황정연 옮김, 황소자리)에서 "중세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전염병이 지금 잠복기에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언제 또다시 우리를 덮칠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흑사병이 쥐벼룩이 옮기는 '페스트'라고?**
전염병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plague'는 그 자체로 특정한 전염병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바로 14세기부터 17세기 말까지 300년이 넘게 유럽을 휩쓸며 유럽 인구의 절반을 희생물로 삼킨 '흑사병'이다.
1347년 10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상륙한 흑사병은 불과 3년 만에 북극까지 번졌다. 바다 건너 영국, 아일랜드, 아이슬란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뒤 300년 동안 흑사병은 주기적으로 때로는 국지적으로, 때로는 유럽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으며 희생자를 찾다가 17세기 중반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춘다.
우리는 교과서를 통해 '흑사병'은 쥐벼룩을 통해 옮겨지는 '페스트'로 배웠다. 스콧과 던컨은 페스트로 알려진 흑사병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서 1597년부터 1598년까지 흑사병의 공격을 받은 영국 북쪽의 오지 '펜리스'에 주목한다. 그들은 당시 사람들의 세례, 혼례, 장례 등이 기록된 영국국교회 교구기록을 면밀히 검토해 흑사병이 공격을 하던 당시의 펜리스 사람들을 거의 완벽하게 재구성한다.
그들은 1597년 9월 22일 외지인 앤드루 호그슨이 흑사병의 희생자가 된 후 15개월 동안 그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탐정이 범인을 쫓듯이 추적한다. 예를 들어 외지인 호그슨이 죽은 지 3주가 지날 때까지 희생자는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펜리스 사람들은 '흑사병의 저주'가 자신을 비켜간 것으로 생각했지만 10월 14일 다음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런 3주간의 '침묵'은 기이한 것이다. 페스트는 감염 시점부터 2~6일이면 증상이 나타난다. 발병 속도가 빨라 환자가 감염과 동시에 쇠약해져 1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즉 흑사병이 페스트라면 3주간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은 일은 있을 수 없다.
스콧과 던컨은 펜리스 사람들의 사망 기록을 좇으면서 흑사병의 경우 감염 시점에서 사망까지 이르는 평균 기간이 37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 기간은 흑사병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받은 뒤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들이 경험적으로 외지에서 들어온 배에 대해서 40일간의 격리 조치를 취한 것과도 부합한다. 진실은 상식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흑사병은 페스트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괴질이었던 것이다.
***흑사병은 에이즈와 어떻게 연계돼 있는가?**
스콧과 던컨은 흑사병이 쥐벼룩을 통해 전염되는 페스트와 같은 수인성 전염병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직접 전염되는 바이러스성 전염병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더 나아가 흑사병은 에이즈를 유발하는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와 유사한 바이러스에 의해 유발된 정황도 포착한다.
유럽인의 상당수가 HIV에 계속해서 노출되고도 아프리카인과는 달리 에이즈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유럽인의 일부는 HIV에 내성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HIV가 백혈구로 침투하는 것을 막는 돌연변이 유전형질을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스콧과 던컨은 이런 돌연변이 유전형질이 유럽인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이유를 300년 (혹은 그 이전에도 있었을지 모르는) 흑사병의 공격에서 찾는다.
문헌에는 흑사병 바이러스에 노출되고도 흑사병에 걸리지 않거나 걸리더라도 쉽게 치료된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스콧과 던컨은 만약 흑사병 바이러스가 HIV와 유사한 방법으로 인체를 공격하는 것이라면 '흑사병의 공격'은 유럽인 중에서 HIV 방어 돌연변이가 널리 확산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즉 흑사병의 공격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흑사병에 대한 일종의 저항력을 갖춘 사람일 테고, 그들의 자손이 바로 오늘날 HIV 방어 돌연변이 유전형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그들의 가설은 천연두 저항력과 HIV 저항력 사이에 일정한 연관성이 있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와도 부합한다. 흑사병이 사라진 후 18세기 유럽을 휩쓴 천연두에 대해서 유럽인들은 상당한 저항력을 보였다. 이것은 아메리카의 토착 원주민들이 유럽인이 가지고 들어온 천연두 때문에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스콧과 던컨의 가설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흑사병의 귀환'을 준비해야 한다**
스콧과 던컨이 굳이 이런 흥미진진한 책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흑사병의 귀환' 시점이 도래하고 있다는 공포 때문이다. 전형적인 패혈성 전염병의 증상을 나타내는 흑사병의 모습은 오늘날 아프리카 밀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신종 '괴질'들, 즉 에볼라와 마르부르크 병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특히 에볼라는 증상이 흑사병과 매우 유사하지만 감염되자마자 사망에 이르는 시간이 2~3일로 매우 짧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으로 널리 퍼지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흑사병처럼 에볼라의 잠복기가 수주일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구촌이 순식간에 중세 유럽처럼 '흑사병 공포'에 빠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 이들은 이 책 18장에 묵시록적으로 묘사한 '전염병에 의한 지구 최후의 풍경'을 꼭 읽어볼 일이다.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환경을 훼손해 밀림 깊숙이 숨죽이고 있는 전염병 바이러스를 문명 세계로 끌어들이는 우리의 행동 역시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인류는 21세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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