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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비만 벌 수 있으면 최고지…"

'초록 대안' 농업<14> 농삿꾼 되기의 어려움

시골에 온 지 어느새 7년이 지났다. 그 동안 왜 귀농을 했느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해가 벌써 일곱 번이나 바뀌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감하기만 하다. 별 생각 없이 그냥 내려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답하면 사람들은 대개 고개를 저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그곳에서 살았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시골로 내려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했다.

동갑내기인 우리가 처음 만났던 시절부터 남편은 마흔이 되면 농부가 되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때는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몰랐거니와 당시 서른이던 내게 마흔은 너무도 먼 훗날로 느껴졌다. 그런데 10년이란 시간은 화살같이 지나갔다. 그리고도 두 해가 더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시골로 가자고 했다. 나는 그러마고 했다. 서울에서 내가 꼭 붙잡아야 할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시골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없었다.

***농부 되기의 어려움**

쉽사리 내려오기는 했지만,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은 내게 별로 없었다. 농사는 농부가 되겠노라고 노래를 불렀던 남편의 몫이고, 나는 그 동안 못 읽은 책이나 읽고 심심하면 텃밭이나 맬 생각이었다. 시골에 와서 처음 맞은 일철, 들일이 시작되고 며칠도 되지 않아 농사는 함께 짓는 것임을 알았다. 들일은 외로웠다. 햇볕은 쨍쨍 내리 쬐고, 뽑아도 뽑아도 다시 나는 잡초는 두렵기조차 했다. 그럴 때 저쪽 골에 엎드려 말없이 호미질을 하고 있는 남편을 보면 버틸 힘이 생기곤 했다.

낯선 시골에서 흙 만지며 사는 것이 그런데 썩 괜찮았다. 기대가 없었기에 잃을 것이 없었나 보다. 아니,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주 중요한 것을 얻었다. 생전 처음 내 손으로 심은 콩알이 제 몸무게의 몇 백 배나 되는 흙을 뚫고 초록색 새싹으로 올라왔던 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존재로 보면 저나 나나 똑같다는 것을 일러주는 듯, 작은 새싹은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오랜 가뭄으로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논바닥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세상만사에 감사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 속에서 보름 가까이 이어진 피사리에서 나를 들여다보던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절절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내려온 이곳에서 이토록 큰 선물을 받은 것이 참으로 고맙다.

농사는 이렇듯 은혜와 위로 그리고 가르침을 주지만, 때로는 아득한 막막함으로 나를 내몰기도 한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들일이 그렇고, 갈수록 예측할 수 없는 날씨가 그렇다. 농사 지어 먹고 산다는 것이 점점 더 암담하게 생각되는 현실도 두렵다. 이웃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오래고 단단한 문화 앞에서 숨이 막히는 때도 있고, 낯선 땅에서 사람으로 인해 가슴앓이를 하는 데도 힘이 빠진다. 이곳에서 내가 서야 할 자리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찾은 것인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자연이 일러주는 길로 한 걸음씩…**

이태 전, 오랜 세월 엄격하게 유기농을 실천하며 농촌 문화와 공동체를 지키는 어르신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극단적 원칙주의'의 길을 가는 분들의 말씀을 한번 듣고 싶은 터였다. 최소한의 원칙은 있으되 일상생활에서나 농사에서나 끊임없이 타협하는 나를 돌아보고 싶었다.

어르신의 말씀은 역시 거침이 없었다. 절충이나 타협 없이 당신의 생각을 몸으로 사시기 때문이리라. 그이의 철저함과 엄격함은 땅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라는, 물러설 수 없는 믿음에서 온 것이리라.

농부가 되겠다는 남편을 따라 별다른 생각 없이 내려온 시골에서 내가 만난 것은 자연이었다. 그렇게 만난 자연은 내게 농사와 환경을 생각하게 했다. 화학비료와 농약, 제초제로 죽어가는 땅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경험도 기술도 일손도 부족하지만 유기농을 지향하려는 마음도 그것에서 비롯되었다.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투철한 의식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지만, 농사와 땅에 대한 작은 원칙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 우리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그 노력은 어르신의 '완벽하고 영원한' 이상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공생을 말씀하시는 어르신 앞에서 나는 내 속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개인주의를 떠올렸다. 복숭아 내느라고 며칠 쪼그리고 앉아 일했다고 강의 시간 내내 똑바로 앉아 있기 어렵게 허리가 아픈 것도 절망스러웠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자연이 일러주는 대로 가노라면 나도 언젠가는 나름대로 괜찮은 농부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귀농, 장애물 넘어 또 장애물**

요즘 들어 귀농에 대한 논의가 부쩍 활발해졌다. 풀릴 것 같지 않은 경제도 한 몫을 하는 것 같고, 대안적 삶을 찾아 귀농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다. 성공하고는 거리가 먼 귀농인이지만 이쯤에서 지난 시간을 한 번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우리의 귀농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땅을 살 때부터 우리의 실수는 시작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지인이 소개한 땅을 보고는 거기 서 있는 느티나무에 반해 처음 본 땅을 덜컥 사고 말았다. 500평 땅에 농사를 지어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10년이 넘게 농부가 되겠노라고 노래를 불렀으면서도 변변한 준비와 공부가 없었던 것이 우리의 귀농에서 가장 큰 잘못이다.

그 땅에 대궐 같은 집을 짓는 것으로 우리의 실수는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았다.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예상 외로 많이 들어갔던 자금도 그랬지만, 집 때문에 발목이 묶이고 만 것이다. 농지 문제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집부터 덜컥 지어놓고 보니 주변에서 마땅한 농지를 구하는 것이 어려웠다. 우리는 이곳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으므로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다.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골짜기에 겨우 논과 과수원을 마련했으나, 후에 진입로 문제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낭만적이고 즉흥적이었던 작목 선택도 문제였다. 농약을 안 쳐도 잘 자란다는 말에 앞뒤 재지 않고 두릅농사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두릅을 포기한 후 벼와 복숭아 농사로 어렵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중 마을 주민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마을 사람들과 나쁠 일이 없었다. 외지인으로서 조심하면서 주민들과 친밀해지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도저히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없었던 마을일에 나서면서부터 균형을 이루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생전 처음 겪는 송사와 주민들의 이어지는 고소, 고발로 당장이라도 이곳을 뜨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이 일로 남편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지금도 곁에서 지켜보기가 안타깝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반성도 했다. 농촌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고, 마을 일에 대한 철저한 고민과 의지도 부족했다. 지혜와 역량 또한 턱없이 모자랐다.

그런 가운데 뜻을 같이 하는 마을 사람들과 친환경농업 모임을 시도하면서 길이 보이는 듯도 싶었다. 모임의 사이트를 만들고 사이트 관리와 직거래 유치를 위해 밤을 새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몸은 파김치가 되었지만 연대의 가능성에 고단함을 잊을 수 있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 같은 시도로 두 편으로 갈라진 마을이 다시 화합할 수 있을 것이라 애써 믿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부덕함과 부족함을 절감하고 모임을 떠나면서, 어디서든 사람과의 일이 제일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타고난 개인주의를 조금은 벗어났나 싶었을 때 일어난 일이어서 마음이 아팠다.

***왜 농부가 되었는가?**

도시에서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또 사람들 속에서 복작대는 것이 싫어서 귀농을 생각하노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농사지어 먹고 사는 일도 만만치 않거니와, 시골에도 이웃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도시와 달리 전통적으로 더불어 해야 하는 일이 많은 농촌에서 우리는 두 부부의 힘으로 많은 부분을 해결하고 있다. 농사도 둘이 할 수 있는 규모이고, 심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버거웠지만 필요한 농기계도 대충 갖추었다. 마을 사람들과 일과 시간을 많이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서로 간에 시간과 열린 마음이 더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별다른 관심이나 아픔 없이 오랜 세월 동안 내 생각에만 갇혀 살았던 내게 현장에서 느끼는 농촌의 특성과 농사의 어려움은 혼란을 가져왔다. 40여년의 도시생활로 익숙해진 물질에 대한 의지와 욕망, 그리고 타고난 개인주의적 지향도 시골생활에 걸림돌이었다.

농사를 본격적으로 지으면서부터 나는 나 자신을 농부라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니 거기에 수식어가 하나 붙어 "젊고 많이 배운" 농부가 되었다. 만약 내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이 수식어를 영영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농부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수식어가 붙으니 더 부담스러웠다. 그것이 내가 두려워하던 "더불어 사는 삶"과 연관된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 같은 자각에 오만이 있음도 느낀다. 이곳 사람들에게도 오랜 문화 속에서 축적된 무서운 힘과 지혜가 있는 것이다. 이곳의 삶에서 느끼고 배운 것을 어떻게 의미 있게 풀어갈지가 앞으로의 과제 중 하나다.

연고 없이 내려온 마을의 이름을 따서 앙성댁이라는 택호를 스스로 지은 것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 농부로 뿌리를 내리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이었다. 나 자신이 시골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매끼 밥을 먹으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내 밥상에까지 오르게 되었는지를 생각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것은 돈만 있으면 생겨나는,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의 일이었다. 내 손으로 논에 모를 심고 잡초를 뽑고 벼를 거두고 나서야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상품이 될 수 있는 게 아님"을 몸과 마음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개인 홈페이지로 시작된 도시 사람들과의 의미 있는 소통에 감사한다. 그이들과 농사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어려움을 함께 고민하고, 우리가 느낀 자연의 힘과 위로를 들려드리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것 또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고마운 것은 많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모습으로 사는 것에 후회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는 말을 믿는다. 꿈꾸는 만큼 살 수 있다는 말도 믿는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든 괜찮다는 생각도 든다. 귀농의 이유가 사람마다 다 같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꼭 한 마디로 시골에 온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이제 나는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라고 말하리라.

차조를 거둔 밭에 보리씨를 뿌리고 온 남편에게 물었다.

"왜 농사를 짓고 싶었어?"
"거기 무슨 이유가 있겠어? 그냥 짓고 싶었지."
"지금 바라는 것 한 가지만 말하라면, 뭐야?"
"생활비만 벌 수 있으면 최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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