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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에게 '총' 대신 '보습'을 들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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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에게 '총' 대신 '보습'을 들게 하자"

'초록 대안' 농업<10>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키워도 될까

***가능성 '제로'의 '게토'가 된 농촌**

태풍 '나비'가 지나간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숨을 죽이던 지난 9월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아직 중학생 티를 채 벗지 못한 고교 1년생인 우리 반 아이들은 수업을 일찍 끝내고, 야간자율학습도 하지 않는다는 기대감으로 설레고 있었다.

종례시간, 이미 가방을 둘러메고 담임의 "종례 끝" 신호만을 기다리며 엉덩이를 들썩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실은 나도 오늘 아침에는 수업이 일찍 끝나는 것이 기대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태풍이 다가온다고 하니 너네들 부모님 농사가 좀 걱정이 된다"고 운을 뗐다. 아이들은 '좀 길어지겠군'하는 눈치로 슬금슬금 엉덩이를 붙인다. 나는 일년 농사의 수확 직전에서 태풍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 운운하면서 어쭙잖은 훈시를 했다. PC방으로 쪼르르 달려가지 말고 바로 집에 가서 급한 일도 좀 돕고 어쩌고 하면서. 그리고 나는 30명 우리 반 아이들 중에서 부모님이 농사짓는 아이들을 하나씩 호명해 보았다. 그리고 무슨 농사를 하시는지를 물었다. 누구는 "대추", 누구는 "사과"라고 대답했고, 또 누구는 "낙과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다"며 불현듯 침울해하기도 했다.

한 아이의 차례가 되었다. "너네 아버지는 뭐 하시냐?" 내 물음에 아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했다. 순간, 교실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저거 아부지 짓는 농사도 모르네~~" 하면서 금세 얼레리꼴레리하는 분위기가 번졌다. 그 아이는 상기된 채로 약간 더듬으며 말했다. 비닐하우스를 하시는데, 해마다 작목이 바뀌어서 올해는 무얼 심으셨는지 아직 잘 모른다면서 연신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새벽밥 말아 먹고, 봉고차 타고 학교 와서 학교수업, 야간자율학습, 학원까지 마치고 밤 열두시가 넘어서 집에 돌아가는데, 휴일이면 밀린 잠 벌충하고, 컴퓨터 하느라 들판에 나가본 적이 없을 텐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농촌지역 고등학교라서 상당수 아이들이 농사 짓는 부모님을 두고 있지만, 부모님의 가업을 물려받겠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거의 없다. <녹색평론>을 비교적 열심히 읽는 편인 내가 수업시간에 가끔 식량자급률 25% 운운하면서 유전자조작 작물(GMO)과 수입산 먹을거리로 위협받는 우리의 식탁 사정을 이야기해도, 재작년 밀양의 어느 면지역에서 출생한 신생아가 3명밖에 없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면서 농촌의 죽음이 결국 큰 재앙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도, 아니 좀 더 솔깃하게 앞으로 유기농이 새롭게 각광받는 고소득 직종의 아이템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아이들은 덤덤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농업과 농촌은 가능성 제로의 '게토'다.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 뿌리내리는 삶의 가능성을 무엇보다 그들의 부모가 완전히 차단해놓고 있다. 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자기 세대의 퇴장과 함께 우리 농업이 사망에 이를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국가권력과 자본의 조직적인 교살 음모 속에서 수십 년간 가위눌린 그들은 자기 아이들을 마치 위험지역에서 대피시키듯 도회적 삶의 어느 한 구석자리에라도 편입시키기 위해 가열찬 교육열을 불사르고 있다. 죽음에 임박한 소나무가 제 몸에 주렁주렁 솔방울을 매어달듯이 그들의 몸부림은 절박하다. 이제 이 아이들도 학교를 졸업하면 막막한 도회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는 '비정규직' 전사로 살아갈 것이다. 탈근대 운운하기 좋아하는 유식한 사람들이 잘 쓰는 말로는 '노마드'(유목민)가 되겠지만.

***"우리도 자라면 농부가 되겠지" 읊던 그들은 어디로 떠밀렸나**

농업의 죽음, 농촌의 해체, 뿌리 뽑힌 삶, 이런 비감한 느낌이 엄습할 때마다 나는 30여 년전에 "우리도 자라면 농부가 되겠지"라고 읊었던 경북 산골 마을 이오덕 선생님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때의 다짐처럼 정말로 농부가 되었던 그 시절의 아이들은 지금 우리 농업을 지키는 마지막 세대가 되어 지금도 마을의 '막내'로서 마을회관에 모인 60대, 70대 어르신들의 막걸리 시중을 들고 있다. 수천 년 이래 이 땅에서 이뤄졌던 자연적인 순환의 고리가 이제 막 끊어지려는 즈음이다. 그 시절 아이들의 감각과 정서는 이제 곧 화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반복되는 실패'일지라도 '기억을 향한 투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자라면 농부가 되겠지"라고 읊었던,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기적 같은 그 시절에 대한 기억 말이다.

오줌이 누고 싶어서
변소에 갔더니
해바라기가
내 자지를 볼라고 한다
나는 안 비에(보여)줬다 (이오덕 지도, 경북 안동 대곡분교 3년 이재흠, 1969년 10월 4일)

청개구리가 나무에 앉아서 운다
내가 큰 돌로 나무를 때리니
뒷다리 두 개를 발발 떨었다
얼마나 아파서 저럴까?
나는 죄 될까봐 하늘 보고 절을 하였다. (이오덕 지도, 경북 안동 대곡분교 3년 백석현, 1969년 5월 3일)

내 어릴 적 못물골 골짝에 예닐곱 살 먹은 일근이란 아이가 살았는데, 하루는 우리 동네로 놀러나온 거야. 늘 산골에서 혼자 식구들하고만 지내다 보니 심심해서 나왔겠지. 동네 애들하고 비석치기 하다가 싸움이 붙은 거야. 못물골 일근이하고 우리 동네 춘근이하고. 어린아이들 싸우는 것 보면 몸으로 엉겨붙어 싸우기만 하는 건 아니잖아. 입으로는 온갖 욕을 다 하잖아. 그래 춘근이가 먼저 욕을 하기 시작한 거야. "야 이 씨발놈, 개새끼야, 좆만새끼, 호로자석……." 이렇게 춘근이가 한바탕 욕을 끌어붓자, 멍하니 듣고 있던 일근이가 맞서 대거리한다는 것이 이러는 거야. "야이 참나무야, 대나무야, 밤나무야, 옻나무야…" 못물골 일근이는 그때까지 욕을 몰랐던 거지. 늘 보고 듣는 것이라고는 소나무, 대나무, 밤나무, 노루, 산토끼,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이런 것뿐이었으니까. (구자행 할머니 구술, <삶을 가꾸는 글쓰기>, 2001년 4월호)

오줌을 누려고 바지춤을 끌렀는데 변소 위 해바라기가 제 '꼬추'를 보려는 것 같아 재빨리 해바라기를 등지는 아이, 그 아이는 해바라기를 제 '꼬추'를 보려는 동무쯤으로 여겼나 보다. 무심결에 벌인 장난 때문에 발발 떠는 개구리를 보고 불현듯 두려움을 느껴 하늘에 대고 절을 하는 아이가 있었다. 동무의 쌍욕에 기껏 '야 이 참나무야, 대나무야' 하는 '욕'으로 응대하고 말았다는 산골 아이도 있었다. 우리는 이 세 편의 글을 음미하면서 '동심'이라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과 깊은 평화를 느낀다. 이것은 불과 한 세대 전의 아이들이 남긴 기억이다.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 해바라기는 제 동무였고, 하늘에 죄의 용서를 비는 본능이 있었고, 나무 이름으로 겨우 욕을 지어내는 어린 짐승같은 천연의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한 세대가 경과하면서 '사람은 밥을 먹고 된장국을 먹고 김치를 먹어야 사는' 것이 아니라 '휴대폰을 먹고 컴퓨터와 자동차를 먹으며 살아야 한다'는 도착된 논리 속에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 아이들은 정말로 휴대폰이 되었고, 컴퓨터가 되었고, 자동차가 되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휴대폰과 컴퓨터는 도구가 아니라 제 오관(五官)을 대체하는 신체의 연장이다. 아이들은 제 옆으로 질주하는 자동차는 무심히 비켜가지만, 교실에 날아든 한 마리의 벌을 보고는 기겁한다.

자연으로부터 쫓겨나 '한국의 교육'이라는 집단가학 시스템 속에 유폐된 아이들은 제 자연적 본성을 돈을 주고 구매하는 말초적 즐거움에, 디지털로 분절되는 기계적 단순성에,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는 고독하고도 야수적인 경쟁논리에 가탁하면서 서서히 영혼없는 사회의 복제품이 되어간다. 소란스럽고 무례하며 폭력적인 이 모든 것들을 아이들은 온통 뒤집어쓰고 있다.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키워도 되는 것일까. 만약 이 시대에 조금이라도 반성적인 지성이 있다면 우리는 분명한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흙에서 땀 흘리며 살아가는 인생을 짓밟고서 구축한 이 경제적인 풍요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 가장 악마적인 조건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아주 상식적인, 그러나 고통스런 대안, 즉 아이들을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지금처럼 아이를 키우면 우리는 망한다"**

구체적인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을 농(農)적인 요소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미 근대교육 태동기에 산업사회의 요구에 복무하는 교육의 폐해를 내다보았던 교육사상가들은 '노작교육(勞作敎育)'이라는 이름으로 '농적인 교육'의 가치와 방법론을 정립해놓았다. 우리 교육이념을 주물러 온 엘리트들과 정책입안자들은 노작교육을 지금껏 철저히 무시해 왔지만, 이 일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학교의 조그만 귀퉁이라도 좋고, 배후의 농촌에 있는 실습지라도 좋다. 아이들이 호미와 괭이를 들고 땀을 흘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후진 산업사회에서 유기농업의 선진국으로 거듭나고 있는 쿠바처럼 초등ㆍ중등ㆍ고등교육의 모든 과정 속에 농업 관련 이론과 실습을 의무화해야 한다. 구 소련 시절 국가가 개간하여 개인에게 공여한 소규모 개인농장인 러시아 '다차'의 성공적인 사례를 우리 사회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 소유의 공유지나 노동력이 노쇠하여 경작이 불가능한 땅을 매입하여 기업이나 주민조직, 학교에 분양함으로써 주5일제의 실시로 늘어난 시간을 흙 속에서 보내도록 하는 것도 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젊은 남성에게 부과되는 병역의무 수행의 한 영역으로 농촌을 생각해볼 수 있다. 국가의 공유지나 이미 노쇠하여 경작할 수 없는 토지에서 원하는 젊은이들이 일정한 교육을 받게 한 후에 그들에게 직접 그 토지를 경작케 하는 것이다. 이미 조선시대 군역제도 속에도 정군으로 징집되어 떠난 장정의 노동력을 보충역 개념인 '보인'이 벌충해주던 제도가 있었다. 총을 들기를 원치 않는 평화주의자, 땀 흘리며 노동하는 삶을 배우고픈 젊은이들로 하여금 '총' 대신 '보습'을 들게 하는 것은 국가가 개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될 것이다. 농촌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땀 흘린 그들은 내면적인 평화주의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농업의 회생에 한 주체가 되거나 최소한 든든한 지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문제를 단순히 하고자 한다. 우리 교육의 이 처참한 현실은 그 속에 농(農)적인 가치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 한 논객이 일갈한 것처럼 "지금처럼 아이들을 키우면 우리는 망한다." 이 절박한 현실 앞에 우리의 '어른들'과 위정자들은 너무나 한가롭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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