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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확신했던 한 휴머니스트의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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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확신했던 한 휴머니스트의 자살"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19>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는 1881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0대 때부터 문학과 가까이 접하면서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로망 롤랑과 아는 사이가 되어 전쟁이 끝난 후 잘츠부르크의 자택을 거점으로 유럽 각지의 문학자, 음악가,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예술의 진흥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인문주의적인 입장에서 반전평화의 이상을 주장했다.

잘츠부르크에 있는 츠바이크의 자택은 구시가와 강을 사이에 둔 카프치나베르크의 언덕에 있었다. 이 집에서 1920년에 첫 음악제가 열렸다. 극작가인 휴고 폰 호프만스탈과 연출가인 막스 라인하르트가 "여름에 먹을 빵을 살 돈을 벌 수 없는 배우와 음악가들을 궁지에서 구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다. 이 시도는 대성공을 거두어 잘츠부르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유럽의 예술적 순례지'가 되었다. 츠바이크의 자택에 있는 내객 명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의 서명을 볼 수 있다. 로망 롤랑, 토마스 만, 제임스 조이스, 폴 발레리, 모리스 라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반 베르크, 부루노 발터, 벨라 바르톡, 아루투로 토스카니니…….

그러나 츠바이크 자택의 테라스에서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의 저편, 국경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베르히테스가덴의 산 위에는 히틀러가 있었다.

1933년 5월에 독일에서 나치에 의한 분서(焚書)가 실시됐는데 거기에 츠바이크의 저작도 포함돼 있었다. 나치의 위협이 높아지는 가운데 츠바이크는 1934년 영국 이주를 결심한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 츠바이크는 자서전 <어제의 세계>(곽복록 옮김, 지식공작소, 2001)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 '머리글'을 보자.

"모든 뿌리에서, 그 뿌리를 키울 토지에서조차 떠나있는 나는 온갖 시대를 둘러보아도 좀처럼 드문, 참으로 그런 인간이다. 나는 1881년 하나의 거대한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곳을 지도 위에서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것은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2000년에 걸쳐 국가를 초월해 존재해온 수도 빈에서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도읍이 독일의 일개 지방도시로 떨어지기 전에 나는 마치 범죄자처럼 그곳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내 문학작품은, 나의 책이 몇 백만 독자에게 기쁨을 줬던 바로 그 나라에서 불태워져 재로 돌아갔다. 그러기에 나는 이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모든 곳에서 이방인이며, 기껏해야 지나가는 객(客)이다. 내 마음이 택한 진정한 고향 유럽도 다시금 동포끼리의 전쟁이라는 불구덩이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것과 다름없이 자기 몸을 찢은 이후로 내게는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내 뜻이 아니건만 나는 온갖 시대의 연대기 가운데 가장 무서운 이성의 패배와 가장 흉포한 야만적 승리의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츠바이크에게 <어제의 세계>란 유럽의 중세적 신분사회가 무너지고, 단적으로 말하면 유대인에 대한 신분차별이 폐지되고,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흐드러지게 꽃피었던 시대이며, '유럽의 정신'으로서의 휴머니즘을 신봉하고, 그 이상을 몸소 구현하는 삶을 지향한 코스모폴리탄이 배출된 시대이다. 빈은 그 중심지였다.

그 시대에 유럽 제국은 외부를 향해 식민지 획득 경쟁, 세계 분할 경쟁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이 세계전쟁의 준비였던 것이다. 막 태어나고 있던 국민국가의 뼈대는 불완전해 장래 국민총동원 체제의 세계대전이 현실 상황이 되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어제의 세계>에서 아직 인류는 세계전쟁이라는 공포를 몰랐기에 이성의 힘으로 착실하게 진보해가는 인간성의 이상을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이와 같은 보편적 '휴머니즘'의 실험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아직 유럽 중심주의라고 하는 (더 나아가 남성 중심주의나 상류계급 취미와 같은) 역사적 한계성 안의 것이었다고 할지언정…….

그와 같은 '휴머니즘'의 실험이 나치즘이라는 최악의 반동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지금도 이와 같은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저항의 그것이든 영합의 그것이든 나치즘과의 관련을 둘러싼 수많은 기억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것은 여전히 균열과 긴장을 내포한 투쟁의 장인 것이다.

대극장 옆 광장은 옛날에 말을 씻기던 자리로, 그 유래에 따라 멋진 말 조각의 분수가 있는데 지금은 카라얀 광장이라고 불리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잘츠부르크 음악제 중흥의 최고 공로자였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나치당 입당 경력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실에 대해 눈을 감고 불문에 붙였다.

나는 카라얀이 지휘하는 연주가 들려주는 처절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 중 하나다. 나는 그와 같은 수준에 필적하는 연주를 지금은 거의 들을 수 없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그러기에 카라얀 광장이라는 안이한 이름에 위화감보다는 위기감을 금할 수 없다. 슈트라우스의, 그리고 카라얀의 예술을 그지없이 사랑하는 동시에 그들의 '예술적 에고이즘'이 앞으로도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어제의 세계'의 '휴머니즘'을 오늘에 계승해 발전시켜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제의 세계>를 완성한 지 2년 후인 1942년 2월 22일, 브라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츠바이크는 리오 카니발이 한창일 때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함락시켰다는 뉴스를 듣고 아내와 함께 음독 자살했다. 유서에는 지극히 평온한 어투로 "늦어지기 전에 확고한 자세로 이 한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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