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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자급'이 시대착오라는 '외눈박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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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자급'이 시대착오라는 '외눈박이'들에게

'초록 대안' 농업<6> 지역 자급과 농촌의 대안(上)

지방자치단체의 소위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돼 농촌 행정에 참여한 지 10개월 남짓 되어간다. 서울에서 생태학과 지역계획, 환경정책 등을 공부하고 '마을 만들기' 운동에 관여하다 뜻한 바 있어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이 외환 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이었다. 일본에서는 전국 농촌을 돌며 지역 연구로만 6년 반을 보내며 농촌 지자체와 마을의 역사와 구조를 분석하며 우리 농촌이 지속 가능하게 잘 살 수 있는 길에 대해 고민했다. 계약직 공무원 신분이지만 농촌 지자체 특성이 규모가 작고 사람 이동도 적어 정책 효과가 빨리 나타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귀국했다.

그리 길지 않은 경험이지만 일본 농촌을 연구하고 한국 농촌 지자체 행정에 관여하며 생각한 점을 중심으로 우리 농촌과 농업이 발전할 수 있는 관점의 하나로 '지역 자급'이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어설프고 오해받기 쉬운 용어지만 지역 사회의 자급력이 우리 농촌이 잃어버린 가장 큰 재산이란 점은 분명하다. 또 농촌ㆍ농업 정책 측면에서나 농민운동, 지역운동 측면에서 가장 간과하기 쉽고 무시하기 쉬운 관점이란 점도 분명하다. 이런 점을 재인식하며 지역 사회의 자급력을 회복하는 것만이 농업과 농촌을 회생시키며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성취할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주춧돌이란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옛 농민은 백가지 성(姓)을 가진 만물박사**

예전에 농민은 흔히 백성이라고도 불렸다. 백성이란 말의 한자 뜻은 백(百) 가지 성(姓)씨를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백 가지 성씨를 가질 정도로 다방면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돌이켜 보면 농민은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는 집 짓는 건축가이기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자재를 만드는 공예가이기도 하며, 주변 동식물에 박식한 생물학 전문가이기도 했다. 날씨를 예측할 수 있는 기상학자이기도 하며, 땅과 지형을 읽을 줄도 아는 지리학자였다.

그렇다고 농민이 모든 것에 전문적인 소견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지만 농업을 중심으로 생활과 생산 활동에 관련된 다방면의 지식을 골고루 갖고 있었다는 점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 지금의 농민과 비교하면 훨씬 더 건전한 상식(常識)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기술과 지식, 문화를 기반으로 농가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현금 수입이 부족한 가운데 생활을 영위하고 농업 재생산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이런 모습은 옛날 이야기만은 아니고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농촌 지역에서는 가장 보편적인 생계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유럽의 선진국 산악 지역에서도 농가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한 복합 농가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 한국이나 일본이나 이제는 한 분야의 특정 전문가가 우대 받는 시대가 되었다. 농사도 논밭과 축산, 과수, 화혜, 특용 작물 등을 동시에 경작하는 복합농은 경쟁력이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게다가 밭농사도 특정 작목만 재배하도록 정책적으로 강요당하고 있다. 소위 전업농만이 경쟁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 하나의 신화(神話)가 되어 있다.

실제로 그러한가? 농촌의 원래 모습이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가야 하는가? 농촌의 이상적인 모습이 그렇지 않고 또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은 조금만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다. 농민이 백성다울 수 있을 때만이 농촌이 더욱 농촌다워질 수 있고, 그래야 경쟁력도 분명히 생긴다. 일본 홋카이도의 폐허가 된 낙농지대 풍경은 이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왜 지금 '지역 자급'인가?**

사람들은 자급(自給)이란 단어의 뉘앙스로 여전히 '자급자족'이란 이미지를 떠올리며 왠지 시대착오적이고 현실 도피적이라는 인상을 갖는다. 농민(백성)이 생활과 생산 활동의 필요 부분을 스스로 해결하는 자급자족 방식은 여전히 중요하고 권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농가 차원의 자급자족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자급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것을 사회운동과 정책으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개념상의 정리가 사전에 몇 가지 필요하다. 그래서 '지역자급'이란 용어에 대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자 여기서 개념의 정의와 더불어 자급의 대상, 수준, 주체, 범위 등을 간략히 언급해두자.

먼저 지역자급이란 개념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길지만 요약하자면 "인간과 자연의 상호 관련 시스템, 자원 이용 시스템의 한 형태로서 먹을거리와 생산·생활 자재, 서비스, 재화 등의 생산과 유통 및 소비 등을 일정 공간범위 내에서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립'이란 용어 대신에 '자급'을 채용한 것은 자연과의 관계성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지역' 개념을 강조한 것은 세계화 경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농가의 개별적 실천 활동이 일정 공간 규모 단위로 확대되어 전체 사회와의 관계성이 명확해야 한다는 의도에서였다.

시간적으로 볼 때에는 특정 시점만이 아니라 재생산 과정까지 포함하는 역사적 개념이다. 사실 인간 사회가 자연과 관계를 맺고 자연 자원을 이용하는 경제 시스템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어 왔다. 시장경제도 그런 시스템의 하나에 불과하고 여기에는 다양한 변형이 존재한다. 지역자급의 경제 시스템은 지역 사회(특히 농촌)의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둔 하나의 대안적 제안이다.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으며 누군가(무언가)를 무리하게 착취할 필요가 없는, 또 화폐를 얻기보다 노동 자체가 즐거울 수 있고 나아가 인간 사회의 필요 부분을 필요할 때 가까운 곳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지역자급 경제 시스템, 그런 시스템이 목표일 수 있으며 지속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농촌은 그런 점에서 여전히 지역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 속에 있다. 생산의 기반이 되는 자연이 있고, 자연을 채취ㆍ가공ㆍ보전할 수 있는 지혜가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먹을거리나 서비스를 거저 주고받을 수 있는 나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도시는 필요한 자원을 지역 외부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도시 내부에는 생산 활동의 근거가 되는 자연(농지)이 없고 볼거리의 경관으로서만 존재한다. 땀 흘려 수확물을 얻을 수 있는 노동이 없고, 누군가와 무언가를 위한 노동만이 존재한다. 이 점에서 도시는 농촌과 분명히 다른 사회다. 그래서 다양한 환경(위생) 문제나 교통 문제, 안전 문제를 태생적으로 안고 있다. 이것은 도시와 농촌 사이, 농업과 공업 사이의 불균등 발전을 지속적으로 조장하는 현재의 경제 시스템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농촌이 지역자급에 기초한 지속가능한 경제 시스템으로 하루빨리 전환하는 것은 도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국토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고 산업간 불균형을 시정하며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풍요로운 농촌 문화와 경관을 회복하고 공동체성에 기반을 둔 농촌사회를 재구축함으로써 도시민들이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찾을 수도 있다. 농업과 농촌의 소위 다면적(多面的) 기능도 지역자급이란 관점 속에서만 분명해질 수 있다. 농가 단위, 지역 단위의 자급 시스템이 작동될 때 생산 활동도, 휴양 기능도, 환경 보전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먹을거리부터 에너지까지 자급 못 할 이유가 없어**

여기서 자급의 대상이 되는 것은 흔히 떠올리는 먹을거리만이 아니다. 개인 생활에서는 먹을거리를 포함한 의식주의 자급이 기본이 되겠지만 지역으로 확장되면 전체 사회의 축소판으로 각종 서비스나 재화로까지 다양하게 확장되어 모든 것이 필요하게 된다. 개념적으로 크게 다음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생산이나 생활 자재, 물, 에너지, 퇴비, 사료 등과 같은 유형 자원의 영역이다. 이런 것은 농촌이라면 예전에는 당연히 지역에서 자급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현재 농촌은 먹을거리조차 지역에서 자급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농민이지만 쌀조차 사먹는 경우가 나타나고, 쌀을 직접 생산하더라도 도정 공장을 거쳐 나온 쌀이기 때문에 자기 논의 쌀을 먹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식수원도 우물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고 간이 상수도가 불편하다 해서 광역 상수도망을 통해 몇 단계를 거친 물을 선호한다. 석유 에너지가 외국에서 수입돼 오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자급 연료였던 숯이나 땔감을 새롭게 발전시키지 못하고 뒷동산의 목재를 헐값에 외부 목재상에게 넘기고 있는 것이 농촌 현실이다. 퇴비나 사료도 외부 업자로부터 현금을 주고 사 온다.

이런 것들이 발전이라 일컬어지는 아이러니 속에 우리 농촌이 있다. 모두가 현금 없이는, 세금 내지 않고는 확보할 수 없는 자원들이다. 하지만 이들 유형의 자원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농촌에서 재빨리 자급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자원 흐름을 좀 더 투명하게 하고 단순화시키면 된다. 학교 급식 운동이나 바이오매스 에너지 개발, 국도 변 직매소 설치, 흙집 짓기 등이 이런 지역자급의 관점과 직결된다. 관점만 분명히 세우면 정책과 운동의 방향은 명확하다 할 수 있다.

***떠나는 사람 잡는 '농촌 살리기' 돼야**

두 번째 자급 대상 유형으로는 인적 자원의 영역이 있다. 사람 그 자체와 노동력, 고용, 인간에 의한 서비스(교육, 의료, 소방 등)와 같은 부분이다. 농촌에서 인구 감소는 도시화 과정에서 급격했지만 지금도 어린 학생 중심으로 계속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도시 나가는 것은 예사지만 이제는 중학교, 초등학교로 점점 내려오고 있다. 필자가 사는 동네에서는 도시 나가 중학교 바로 입학하면 적응하기 힘들다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전학 가는 것이 현재 유행하고 있다.

이런 식이니 인적 자원의 자급(다시 말해 인구 유지 혹은 인구 재생산)은 농촌 교육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상할 정도의 한국 교육열은 농촌 지자체의 인구 문제를 해결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 더불어 젊은 인구가 계속 빠져나가고 고령화되다 보니 농업 후계자 문제나 고용 문제가 심각해지고 지역 경제도 침체될 수밖에 없다. 교육이나 의료, 치안, 소방 등의 서비스도 공무원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실정이다. 사회적 서비스가 나쁘다보니 사람들이 더 빠져나가는 악순환의 고리 속에 맞물려 있는 셈이다.

예전에 학교(특히 초등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방식은 지역주민들이 토지를 기부하고 자력으로 건물을 올리고 또 교사들 생계까지 직접 책임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등학교가 마을 주민 모두의 것이란 주장도 여기서 나왔다. 말 그대로 초등교육의 지역 자급과 자치가 실현되고 있었던 셈이다.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도 그 지역에 사는 것이 당연했다. 교통이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출퇴근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며 지역 발전을 함께 고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농촌 사정은 아주 달라졌다. 농촌 지자체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공무원(교육, 행정)의 절반 이상이 인근 대도시에서 출퇴근하는 것이 예사가 되었다. 90% 이상이 출퇴근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농민조차 출퇴근하며 농사짓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지역의 이런저런 문제를 함께 고민해나갈 주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사람이 있고 조직(단체)이 있어도 껍데기뿐인 경우가 많다. 뜻있는 사람은 발버둥 치지만 '맨 땅에 헤딩'하는 형국이라고 자탄한다. 외로움을 토로하고 피곤함을 호소한다. 그래서 사람의 자급, 인재의 자급은 아주 중요하지만 문제 해결은 쉽지 않다. 농촌 지역의 교육이나 경제 문제가 국가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보니 해결책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지역자급의 관점을 분명히 하게 되면 해결 방향이 보이게 된다.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서 끊어야 할지는 지자체마다 여러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제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핵심 중의 하나로 공교육이 제자리를 잡게 하고 대안교육을 동시에 고민하는, 나아가 교육 자치를 하루빨리 실현하는 것이 1차 과제로 보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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