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 가면 동백나무가 꽃을 피웠습니다. 마량리 서해바다 해변에 우뚝 솟은 동산에는 동백나무 수십 그루가 꽃을 피웠습니다. 500년 세월을 이기며 오늘도 어김없이 동백꽃은 피었습니다.
따듯한 남도도 아닌데 바람 잘 날 없는 험준한 해변가 언덕에서 새봄만 되면 어김없이 동백꽃을 피고지고 하였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남도의 동백나무는 키가 크건만 중부지방인 서면 마량리 동백나무는 키가 작습니다. 2~3미터 정도로 키는 작은 대신 어깨를 붙이며 옆으로 자랐습니다. 해풍을 견디느라 스스로 모양을 만든 마량 동백나무의 지혜였습니다.
지금부터 500여년 전 마량마을 어부들은 뗏목을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려 돌아오지 못했답니다. 과부가 되고 아들까지 잃은 노파는 어느 날 꿈에 백발이 성성한 신선이 나타나 백사장에 가면 서낭님 다섯 분과 동백나무 씨앗이 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 노파는 마량 동산에 서낭신을 모셔놓고 치성을 드리고 동백나무 씨앗을 뿌렸답니다. 지금까지 85그루가 살아서 봄만 되면 꽃을 피우게 된 마량리의 전설입니다.
동백나무는 난대성으로 이파리가 두터운 활엽수입니다. 차나무과에 속합니다. 서천군은 동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거의 북방한계선입니다. 모진 바다바람과 추위를 이겨내고 어느 꽃보다 일찍 피는 꽃이다 보니 봄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설레게 합니다. 그러니 봄나들이 인파로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의 '동백꽃 쭈꾸미 축제'는 넘쳐납니다.
목련이나 동백이나 이른 봄부터 피는 인동화는 다른 봄꽃과 다릅니다. 동백꽃을 만지면 잎이 두툼합니다. 속살을 내 보인 채 추위를 이기려니 살갗이 두텁고 탐스럽습니다. 붉은 꽃잎에 하얀 꽃대를 하고 노란 꽃술을 달고 녹색 잎을 가지고 있으니 보색 대비로 화려합니다.
겨울을 힘겹게 넘기고 화들짝 피웠으면 오랫동안 꽃을 피울 것이지 얼마 피워보지도 못합니다. 꽃잎파리는 끝부터 시들하더니 댕강 부러져 낙화가 되고 맙니다. 발아래 구르는 붉은 꽃들이 더욱 애처로운 것도 그 때문입니다.
가슴 설레게 할 때는 언제고 정들자말자 이별하는 동백꽃이 야속합니다. 문전 밖이 저승이라더니 발아래서 낙화는 구릅니다. 이처럼 애간장 끓일 바에는 꽃을 피우지나 말 일이지, 립스틱 짙게 바른 미인의 입술 같은 꽃잎이 땅에 뚝뚝 떨어집니다. 땅에 뒹굴다가 바람에 날라 가는 저 모습은 차마 보기에도 안쓰럽습니다.
그 옛날 마을 할머니는 동백꽃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바다에서 죽은 아들과 남편을 생각했을 겁니다. 떨어지는 꽃에 눈물 짓고 서낭당 가서 시름 달래던 그 때 할머니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할머니가 씨 뿌려 만드신 꽃동산이 마량리 주민을 울고 웃기는 성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중해 언덕에 하얀 칠의 카톨릭 성당이 있다면 우리 바닷가 언덕에는 서낭당과 꽃밭이 있구나" 하고 새삼 돌아봅니다. 마량리 어촌 주민들은 자식과 남편이 죽은 바다를 보고 울다가 서낭당 가서 마음 추스르고 동백꽃 보며 다시 삶에 희망을 품었을 겁니다.
그리스의 고린도 피레네에는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피레네의 여인이 전쟁 나가서 안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이 우물물이 되었다는 신화입니다. 지금도 피레네 신전에 가면 피레네의 어머니가 아직도 흘린다는 눈물이 우물이 되어 마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마량리 할머니가 심었다는 85그루 동백꽃나무가 전설로 살아서 전해오니 서로 비견됩니다.
동백꽃 피는 시절이 서면에서는 쭈꾸미 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축제 이름도 '동백꽃과 쭈꾸미'랍니다. 이쁜 꽃과 못생긴 쭈꾸미가 묘하게 어울립니다. 꽃구경도 식후경이라고 바닷가 봄철 축제로 잘 어울립니다. 장날이 따로 없습니다. 쭈꾸미 조개 미역 등 해산물에, 고구마 밤 곶감 등 농산물에, 솜사탕 칡즙 붕어빵 오뎅 등 간식거리가 장터로 즐비합니다. 한쪽에서는 어릿광대가 엿가락 장단을 치며 각설이 품바타령을 하니 엿도 팔고 덤으로 웃음까지 주었습니다.
오랜만에 흥청거리는 장날은 사람들 마음을 흥겹게 합니다. 동백꽃에 마음 설레고 각설이 타령에 흥겹고 봄 바람에 마음까지 풀고 님도 보고 뽕도 따니 갯마을 축제는 별다른 레파토리가 없어도 저절로 굴러갑니다. 이제 충청도의 대표적인 봄 축제로 자리 잡아갑니다.
서면 '동백꽃 쭈꾸미' 축제는 지역 축제가 갖출 수 있는 장점을 골고루 갖춘 축제입니다. 철따라 피는 동백꽃나무 군락과 꽃에 얽힌 지역설화와 제철 수산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축제입니다. 자연과 조상이 물려준 자연유산으로 축제문화를 이룹니다. 프로그램 기획과 연출이 떨어지고 예산이 부족해도 앞으로 점차 잘하면 될 겁니다. 그러나 이 축제는 딱 하나 결정적인 장애가 있습니다.
누가, 왜, 거기 천혜의 자연유산에 이런 엄청난 공장을 짓기로 결정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서천 화력발전소입니다. 동백꽃 피는 마량리 날망 바로 코앞에 동산보다 몇 배나 더 큰 공장이 서 있습니다. 거기서는 한시도 쉬지 않고 기계소음과 굴뚝 연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500년 동백나무 꽃이 유난히 빨리 시들었던 이유도 이 공장의 매연과 무관치 않을 겁니다.
충남 서면 앞바다에서 남쪽으로 군산 찍고 변산을 가면 새만금입니다. 이제 서해바다는 개발 바람에 성한 곳이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동백꽃 피고 쭈꾸미 사는 갯마을은 화력발전소의 거대한 철벽으로 이미 자연풍광을 잃었습니다. 공장 짓고 길 닦으면 이곳 주민들 삶에 얼마나 보탬이 되나요. 오히려 갯마을 축제시장이 생존의 터전일 수 있는데 그 환경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곳 주민에게서 마량동산 동백숲은 지켜야 할 풍광권이자 생태적 경제가치로서의 생존권입니다.
하필이면 500년 신화를 담고 있는 동백나무 숲을 훼손하면서까지 바로 옆에 발전소를 지어야 했는지 그 발상이 놀랍습니다. 화력발전소는 다른 곳에 세워도 무방하지만 동백나무 신화는 이곳 아니면 있을 수 없습니다. 동산 위에 지은 동백정에서 사방을 둘러보는 풍광이 일품이었는데 발전소가 남쪽 바다를 콱 막아버렸습니다. 동백꽃잎은 쉬지 않는 매연과 소음으로 시들하고 이파리는 제 빛을 잃어갑니다. 서면 마량리에서 500년을 살아 온 동백나무 군락은 이제 삶을 마감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신화가 사라집니다. 어민의 풍년 소망을 담고 500년을 피고 지던 동백나무는 이제 명을 다해야 하는 가봅니다. 조상 할머니의 애절한 비원도, 서낭당에 기댄 주민의 신망도, 축제로 남으려는 생태적 시장도 모진 근대주의에 제 빛을 잃어 갑니다.
서면 마량리 동백꽃 피는 동산에서 시심으로 마음을 달랩니다.
올 봄 동백꽃 지면
명년 봄 다시 꽃 필까
오백년 마량 동백나무
추위도 참고 해풍도 이기고
오백년 모진 세월
신화를 품고 살았는데
어김없이 봄마다
꽃피워 주었는데
이제 와서 안 살겠다고
늙은 할망구라고
쭈꾸미 같은 노파라고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뽑네
모진 나그네들
우릴 내 쫓네
올봄 동백꽃은
유난히 붉은데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송이
뒤도 안 돌아보고
푸른 바다로
흩날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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