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적십자사가 에이즈 바이러스(HIV)에 오염된 혈액을 환자에게 또 수혈용으로 공급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뿐만 아니라 이 에이즈 오염 혈액을 원료로 사용한 알부민 주사제는 지금도 시중에 2만6000여 병이나 유통ㆍ판매되고 있는 상황이다. 적십자사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국민에게 '쉬쉬'해 왔다.
***'에이즈 오염 혈액' 교통사고 환자에게 수혈…다음날 사망**
5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고경화 의원(한나라당)에 따르면 2004년 12월 1일 HIV 양성 반응을 보인 김모(23ㆍ남) 씨가 헌혈한 혈액이 12월 15일 부천의 S병원에서 허모(당시 26ㆍ여) 씨에게 수혈된 사실이 밝혀졌다. 교통사고로 부천 S병원으로 옮겨진 허씨는 에이즈 오염 혈액을 수혈 받았지만 결국 다음날인 16일 사망했다. 허씨는 생존했다 하더라도 에이즈 보균자가 될 형편이었다.
적십자사는 뒤늦게 에이즈 오염 혈액이 허 씨에게 수혈되고 그가 숨진 사실을 확인했지만 그 유족들에게 에이즈 오염 혈액의 수혈 사실을 통보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교통사고로 허씨를 잃은 가족은 에이즈 오염 혈액이 수혈된 사실을 현재까지 모르고 있는 것.
현재 적십자사는 에이즈 오염 혈액을 환자에게 잘못 수혈할 경우 최고 5000만 원 상당의 보상금을 환자 및 가족에게 지급하도록 돼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적십자사는 지난 7월 14일 보건복지부에 이 사실을 보고할 때도 에이즈에 오염된 혈액이 허씨에게 수혈된 사실은 누락돼 '은폐'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적십자사 관계자는 고경화 의원실에 "민감한 사안이라 보고서에 밝히지 않고 구두로 보고했다"고 궁색하게 변명했다.
***다른 HIV보균자 혈액도 혈액제제 원료로 쓰여…'오염 혈액제제' 수만 병 유통**
더 충격적인 것은 에이즈 오염 혈액을 원료로 사용한 알부민 등 혈액제제 2만6000여 병이 수개월간 시중에 유통ㆍ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씨가 헌혈한 에이즈 오염 혈액의 유통 과정을 추적한 결과, 적십자사는 혈장 성분을 따로 분류해 혈액제제를 생산하는 제약회사 N사에 공급했다. N사는 이 에이즈 오염 혈액이 섞인 원료로 총 3798병의 알부민(20%) 주사제를 제조해 최근 시중에 유통ㆍ판매한 것으로 확인됐다. 알부민 주사제는 암이나 간경화 수술 환자 등에게 단백질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쓰이는 대표적인 혈액제제다.
그뿐 아니라 추적 조사 과정에서는 또 다른 HIV 보균자 강모(25ㆍ남) 씨가 지난 2004년 9월 9일 광주에서 헌혈한 혈액 역시 N사에 혈액제제 원료로 공급된 사실이 확인됐다. N사는 이 에이즈 오염 혈액이 섞인 원료로 알부민(20%) 주사제, 면역글로블린 주사제, 혈액 항응고제, 혈액 응고제(혈우병 치료제) 등 총 2만3006병의 혈액제제를 제조했다. 이 중에서 알부민(20%) 주사제 5560병, 면역글로블린 주사제 1만2021병, 혈우병 치료제 1468병 등 1만9049병이 시중에 유통ㆍ판매됐다.
김씨와 강씨의 에이즈 오염 혈액으로 총 2만6804병의 혈액제제가 만들어져 이 중 2만2847병이 시중에 유통ㆍ판매되고 있는 것.
이번 에이즈 오염 혈액 유통은 지난 4월과 5월 김씨와 강씨가 헌혈한 혈액이 HIV 양성 반응을 보인 것을 계기로 확인됐다. 적십자사는 두 사람의 과거 1년간 헌혈 기록을 조회해 각각 2004년 12월과 9월 헌혈할 때의 검사 혈액을 재검사해 HIV 감염 사실을 최종 확인했다. 적십자사는 2004년부터 잦은 혈액사고의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서 모든 헌혈자의 검사 혈액을 10년간 보관하고 있다.
***식약청 늑장 통보…제약회사는 통보받고도 3700병 그대로 유통**
한편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적십자사로부터 김씨의 에이즈 오염 혈액 건을 지난 4월 26일 보고받고도 3일이 지난 29일에야 N사에 이 사실을 유선으로 알리는 등 늑장 통보한 사실도 드러났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통보를 받고서도 N사가 보관 중이던 혈액제제를 그대로 시장에 내보낸 것.
식약청으로부터 통보를 받은 시점에 김씨의 오염 혈액으로 제조된 N사의 알부민 주사제(20%ㆍ100㎖) 3798병은 출하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N사는 혈액제제 원료에 에이즈 오염 혈액이 섞였다는 통보를 받고도 이를 폐기하지 않고 그대로 시중에 유통ㆍ판매했다는 것이다. 알부민 주사제 1병 가격은 8만3693원이니, N사는 이를 통해 3억여 원의 매출을 올린 셈이다.
이런 N사의 조치는 2004년부터 시행된 식약청 지침을 '기계적'으로 따른 것이다. 이 지침은 에이즈ㆍ간염 바이러스에 오염됐거나 오염된 것으로 우려되는 혈액이 제조 공정 투입 전에 발견될 때는 전량 폐기하지만 오염 혈액이 다량의 깨끗한 혈액에 섞여 제조 공정에 들어갔거나 이미 제조됐을 경우에는 그대로 제조ㆍ유통시키도록 하고 있다. 혈액제제 제조 공정에서 바이러스가 '불활성화'되기 때문에 굳이 폐기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따른 것이다. <'상자 기사' 참조>
한 혈우병 환자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의ㆍ약계 전문가들조차 에이즈 오염 혈액이 혈액제제에 섞였을 경우 감염 가능성을 100% 부인하지는 못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환자의 입장을 염두에 둔다면 1000만 분의 1의 확률이라도 부작용 가능성이 있으면 에이즈 오염 혈액제제를 유통시키지 않아야 했다"며 "그들이 자기 가족에게도 그 혈액제제를 투여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고 당국과 N사를 질타했다.
***고경화 의원 "적십자사는 혈액사업 자격 없다"**
이번 일로 적십자사의 혈액 관리 실태가 여전히 허점투성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돼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적십자사 중심의 국가 혈액사업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기왕의 지적이 더욱 설득력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경화 의원은 "교통사고 환자에게 에이즈 오염 혈액이 수혈된 사실도 충격적이지만 오염 혈액이 섞인 원료가 이미 제조 공정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판매되게 방치된 것도 큰 문제"라며 "이번 일에 대해 적십자사는 물론 복지부, 식약청과 제약회사의 대응은 총체적으로 엉망"이라고 지적했다.
고 의원은 "이와 같은 중대한 혈액사고는 복지부가 스스로 발표하고 투명하게 개선책을 마련하려는 자세를 갖춰야 했다"면서 "이번 일로 다시 한번 적십자사의 부실 혈액 관리 실태가 드러난 만큼 적십자사에서 혈액 사업을 분리해 국립혈액관리원을 세우는 것과 같은 강도 높은 혈액사업 쇄신책이 차제에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자 시작>
***'에이즈 오염 혈액제제' 그대로 시장에 내보낸 이유는?**
현재는 에이즈 오염 혈액이 혈액제제 원료에 섞인 사실을 알아도 제약회사가 폐기 조치를 하지 않도록 식약청 지침이 마련돼 있다. 혈액제제를 제조할 때 에이즈ㆍ간염 바이러스는 열 처리 등을 통해 불활성화돼 환자에게 최종적으로 공급되는 혈액제제는 안전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렇게 식약청 지침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혈액제제 제조 공정에서 에이즈 바이러스가 완전히 불활성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혈액제제의 약품 설명서도 부작용으로 "바이러스의 감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법원도 혈액 응고제와 같은 혈액제제를 투여받은 뒤 에이즈에 감염됐다며 혈우병 환자와 가족들이 (주)녹십자홀딩스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혈액제제의 경우 다른 원인을 입증하지 못하는 이상 혈액제제와 에이즈 감염의 인과 관계를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환자들의 손을 들어준 적이 있다.
이 소송을 제기한 혈우병 환자와 가족들은 1990년대 초 녹십자홀딩스(당시 녹십자)가 제조한 혈액 응고제를 계속 공급받아 온 환자 상당수가 HIV 양성 반응을 나타낸 것이 에이즈 오염 혈액으로 제조된 혈액제제 탓이라고 주장해 왔었다. 반면 녹십자홀딩스는 "1989년부터 에이즈ㆍ간염 바이러스를 불활성화 처리하는 방법이 도입돼 1990년대 이후 혈액제제로 인한 감염은 사실상 없다"며 혈우병 환자들의 주장에 강하게 반발해 왔었다.
논란이 계속되자 지난 9월에는 정부가 의ㆍ약계 전문가 등 15명으로 구성된 '혈액제제 에이즈 감염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1990~93년 기간에 혈우병 환자에게 발생한 에이즈 감염에 대한 역학적 분자생물학적 연구 조사를 한 결과 일부 혈우병 환자의 경우 국내 혈액제제에 의해 HIV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의심된다"는 애매한 결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금은 어느 누구도 에이즈 오염 혈액으로 제조된 혈액제제가 "안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염 혈액 원료가 섞인 것을 알고도 혈액제제를 시장에 내보낸 N사나 이를 방치한 복지부, 식약청에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해 고경화 의원은 "제조 공정에 투입되지 않은 원료에 대해서만 폐기 조치를 내리고, 그 이후에는 그대로 유통시키도록 한 것은 제약회사의 제조 비용을 감안한 것일 뿐 국민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지침이라고 볼 수 없다"며 "제약회사의 제조 비용을 국민 건강보다 우선시 하는 이 불합리한 지침을 조속히 개정해 바이러스 오염 혈액이 원료에 섞인 게 분명하다면 이를 폐기 내지 회수 조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상자 끝>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