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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의 신화, 그 기점에 서서"

김민웅의 세상읽기 <106>

러시아와 몽골의 접경에 있는, 시베리아의 거대한 호수 바이칼의 위용은 우리에게 고고학적 상상력을 비롯하여 문화인류학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너무도 적합한 비경(秘境)의 현장이 아닌가 합니다. 최근 유라시아 대륙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고대적 시원(始原)에 대한 질문이 깊어지면서 바이칼 호수는 새로운 인문학적 화두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듯 합니다.

게다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브리야트 족의 인종적 특징을 비롯하여 말과 습속도 우리의 눈길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인과 이들 브리야트 족의 DNA 정보가 상당 정도 유사하다는 식의 논법에 대해서는 그런 발견에 고마워하면서도 신뢰하기에 다소 주저되지만, 마치 추리소설처럼 인류학적 혈연관계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태고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이 지역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훼손되지 않은 자료보관소와 같은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17세기 러시아에 편입되긴 했으나, '아리랑'이나 '쓰리랑'이라는 단어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을 가진 샤만적 전통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기억의 저편 강 건너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숨겨져 온 정체를 목격하게 되는 느낌입니다.

바이칼 호수에 있는 알혼 섬의 부르한 또는 불한 아니면 불칸 바위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언어이기도 했습니다. 부르 또는 불은 당연히 태양의 광채이고, 한은 최고의 지도자 칸 또는 큰 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빛나는 해를 보며 위대한 꿈을 꾸는 자리 내지는 태양과 같은 지엄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부르한 바위는 제사장 샤만의 제단이라고 하니, 바이칼 호수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을 듬뿍 받아 살고자 하는 이 지역의 종족들에게 원시의 성역(聖域)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그저 무속의 신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이칼의 생명원리와 그대로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밝다'의 어원에 속해 있는 '밝'도 모두 이 '부르'에서 나온 것임을 짐작해보면, 바이칼에서 출발해서 해가 뜨는 땅 조선(朝鮮)으로까지 이어지는, 광명의 세계를 향한 염원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우리는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 광명을 향한 위대한 꿈은 결국 동쪽의 빛 동명(東明)의 나라를 세우게 했던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이 '부르'의 말 뿌리는 문화인류학적 집단무의식의 뇌관이라고 할만합니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는 어쩌면 바이칼 호수에 있던 그 불칸 바위의 제단을 도처에 세우고자 하는 본능으로 사는 샤만 공동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화두를 풀면, 우리는 인류사회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종족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확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월이 장구하게 흐르니, 마침내 우리 안에 있던 고대적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하나 모아져서 그 출발의 자리로까지 가려 하고 있나 봅니다. 이건 단지 1945년 이후의 현대사라든가, 아니면 기원 후 2000년의 역사 또는 고조선 이래 5000년의 시간 단위를 넘어서는 매우 중대한 기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신비한 기록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태어난 바이칼 호수를 향한 오늘의 새로운 대장정은, 남몰래 영토확장을 노리는 소아적 팽창주의와도 인연이 없으며 우리 자신의 독특한 우월감을 확인하는 식민주의적 탐사작업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이는 실로, 어느새 편협하게 자잘해져버리고 만 우리 자신에 대한 준엄한 자기성찰의 새로운 출발점일 수 있습니다. 바이칼 호수의 맑은 물에 비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은총처럼 주어진 이 시대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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