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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980년 광주의 암흑은 정말 끝났는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8> 윤이상과 광주

***광주여 영원히!**

처음으로 찾은 날부터 꼭 10년 후인 2000년 5월 18일, 나는 다시 광주를 향했다.

서울에서 탄 비행기에는 바이올린케이스를 든 일행들이 같이 타고 있었다. 조금 후에 안 것이지만 그들은 서울의 한 교향악단의 멤버들로 광주 민주화항쟁 20주년 기념행사에서 연주하기 위해 광주로 향하는 길이었다. 게다가 연주곡목에는 윤이상 작곡의 <광주여 영원히!>가 포함되어 있었다.

광주시 북동쪽 교외에는 10년 전에 내가 찾았던 망월동 가까이에 광대한 새 묘지가 정비되어 '5·18묘역'이라고 명명되어 있었다. 그 날이 사건으로부터 꼭 20주년이 되는 기념일이었기 때문인지 젊은 커플이며 가족들 등 많은 시민이 끊이지 않고 찾고 있었다. 정면의 큰 기념탑을 중심으로 오른 쪽에는 예배당, 왼쪽에는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관 패널에 쓰인 글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탄압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기념관의 배후에는 묘지가 질서정연하게 펼쳐져 있다. 묘표를 보면서 걸어보니 망월동에서 이장되었는지 헌화로 장식된 희생자의 묘가 눈에 띤다. 그 적적한 망월동과 얼마나 다른지 묘원의 정비는 국가의 정책으로 실시되었다. 학살 사건은 공식적으로 '광주 민주화항쟁'이라고 불리게 돼 희생자들은 민주화를 위해 순국한 '열사'로 불리고 있었다. 김대중 정권의 탄생이 이와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그 변화를 보는 내 마음에는 미묘한 위화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가의 정사(正史)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여러 희생자들, 사자(死者)들은, 이렇게 해서 국가의 정사에 자리매김 돼 간다. 거기에서 흘려진 것, 거기에서 은폐된 것, 거기에서 왜곡된 것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정연하고 빛에 넘치는 묘지공원보다 풀에 덮인 망월동의 묘지야말로 광주의 죽은 자들을 진정으로 기념하는 데에 어울린다. 내게는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묘지공원의 문을 나서니, 광장에 설치된 특설 스테이지에서 교향악단이 <광주여, 영원히!>를 리허설 중이었다. 오랫동안 금지되어 있던 곡을 연주한다는데 악단원이나 관계자들의 표정은 아주 편안해 보였으며, 조금도 두려움이나 위세도 보이지 않는다. 그 사실이 오히려 내게는 이상하고 거북하게 느껴진다.

* * *

1917년에 태어난 윤이상은 1950년대에 유럽으로 건너가 현대음악 작곡가로 성공을 거두었다. 1967년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KCIA)가 유럽에 거주하는 다수의 한국인을 납치해 한국으로 끌고 온 '동백림 사건' 때 그도 비밀리에 독일에서 서울로 연행되었다. 나는 그의 뒷머리에 난 거미집 같은 모양의 커다란 상처를 본 적이 있다. 구치 중에 자신의 머리를 두드려 깨 자살하려고 했던 상흔이었다. 자살에 성공하지 못한 그는 스파이의 혐의를 받고 법정에서 한때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서독 정부를 비롯한 국제여론의 엄중한 항의에 의해 연행된 지 2년 후에 석방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감방에서 연필과 오선지만 가지고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등 세 곡의 작품을 작곡했다. 완성한 악보가 가족에게 전달될 때, 거기에 무엇인가 암호가 감추어져 있을 것을 의심한 KCIA가 아무개 음악 학자에게 감정을 의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윤이상을 석방할 때 KCIA 부장 김형욱은 그에게 이렇게 경고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조심하시오. 당신을 같은 방법으로 두 번이나 한국에 데리고 올 수는 없겠지만 우리에게는 적을 처리해버리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 수년 후 소식불명이 된 것은 윤이상이 아니라 그 김형욱 자신이었다. 정권 내부의 암투에 패배해 (아직도 명확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도피한 프랑스에서 암살되었던 것이다.

위태롭게 사지를 빠져나와 서독으로 생환한 윤이상은 그 후 왕성한 작곡활동을 계속하면서 현대음악의 세계에서 확고한 발자취를 쌓는 한편 해외의 한국 민주화운동의 리더 역할을 했다.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씨로부터 베를린 교외의 댁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다. 1980년의 광주사건 때 그는 TV 뉴스를 뚫어지듯 보며 매일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깊은 비탄 속에서 탄생한 곡이 <소프라노와 실내 앙상블을 위한 '밤이여 나뉘어라'>와 <광주여 영원히!>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의 작품에 정치적 내지는 사회적 주제를 직접 내세우는 일은 없었는데 이 곡은 그 최초의 예외였다.

당연히 이 곡은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의 한국에서는 연주되지 못했다. 말하자면 국가의 금지곡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 바로 광주에서 공식 행사의 일환으로 연주되는 것이다. 금방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1995년 11월 3일 나는 베를린에 있었다. 윤이상을 인터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미리 국제전화로 허락을 얻기는 했지만, 도착해 전화를 해보니 집을 지키는 여성이 애매한 응답을 할 뿐이었다. 좀 이른 첫 눈이 흩날리는 추운 날이었다. 그날 밤 늦게 겨우 부인이신 이수자 씨와 전화 연결이 되어 바로 그날 오후 4시 30분에 윤이상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향년 78세였다.

이틀 후 조문을 가니 사진 뒤의 벽에 그가 평생 그리워해마지 않았던 고향 통영의 항구를 내려다보는 파노라마 사진이 걸려 있었다. 1980년 이후 윤이상에 대해 한국 정부 쪽에서 몇 번이나 귀국을 권유하는 제의가 있었다. 인권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한국이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 향상을 기대하면서 해외 민주화운동에 타격을 가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민주화가 성취될 때까지 조국의 흙은 밟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그 권유를 계속 거절했다.

군사정권 시대가 끝나고 김영삼 정부가 등장해 귀국 실현의 조건이 갖추어지는 듯해 보였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는 귀국 일보 직전까지 사태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베를린을 떠나기 전날 한국 정부로부터 '과거의 행동을 반성한다', '앞으로 북한과 절연한다'는 두 가지 태도를 표명하라는 조건이 제시되었으며 윤이상은 이를 거부하고 귀국 준비를 중지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인 나는 솔직히 윤이상 같은 사람의 '망향의 심정'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내가 분명하게 아는 것은 인간의 '망향의 심정'까지도 철저하게 이용하려 하는 정치권력의 비열함과 잔혹함이다.

윤이상이 두 번 다시 고국의 흙을 밟지 못하고 망명지 베를린에서 객사한 지 5년. 지금 광주에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의 곡이 연주되려고 한다. 그가 살아서 이 정경을 본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

암흑은 마침내 물러갔는가? 그 아픔, 그 한은 씻겨졌는가? 이제 안심해도 좋은가? 마음 놓고 생을 즐겨도 좋은가? 아무래도 불안한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너무도 의심이 깊고 지나치게 비관적인 것일까. 몸에 달라붙은 폭력의 기억에 너무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 * *

광주 거리에는 밝은 빛이 넘치고 있었다. 신선한 5월의 바람이 분다. 무등산은 푸르른 새 이파리에 덮여 있다.

넒은 메인스트리트의 표시는 '금남로'다. '아아! 이게 금남로'라고 나는 입 밖에 내어 보았다. 기억에 새겨져 있는 지명이다. 그 날 이 도로를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군중들이 메우고 있었다. 버스기사들도 차량을 줄지어 몰고 나와 시위에 참가했다. 그리고 이 도로를 계엄 공정 부대과 장갑차가 침공한 것이다.

지금은 온갖 차량이 바쁘게 오고 갈 뿐인 흔해 빠진 상업도로다. 그것은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환상일까.

도청 앞 광장에도 가 보았다. 지금은 '5·18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계엄군의 포위에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사람들은 연일연야 이 광장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스크럼을 짜고 토론하고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닥쳐오는 죽음을 각오했다.

그 시시각각 나는 일본에 있으면서 보도를 통해서만 그 도로 이 광장을 생각해 볼 뿐이었다. 그들이 내려친 곤봉은 내게는 닿지 않았으며, 총탄은 내가 있는 곳까지 날아오지 않았다. 나는 곤봉과 총탄이 난무하는 것을 TV를 통해 보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 5·18광장을 오고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생기 있고 자신에 넘쳐 있는 듯이 보인다. 가혹한 체험을 겪고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자신들의 손으로 변화를 쟁취한 자들의 모습이라고 할까. 망연해지는 느낌으로 나는 자문을 거듭한다. 나는 이 거대한 변화를 추진하는 구동력의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디아스포라인 자신은 결국 늘 그 변화의 '밖'에 몸을 두어 왔던 것이 아닐까, 라고.

그날 밤, 지인이 데리고 가준 여염집 풍의 요리집에서 명물인 추어탕이며 강렬한 발효 냄새가 나는 홍어찜 등 지역의 진미를 즐겼다. 약간 취해 늘 묵는 숙소에 돌아가던 도중 번화가 뒷길 기묘하게 밝은 쇼윈도가 늘어선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창안에 있는 것은 마네킹 인형이 아니다. 살아 있는 여성이다. 화려한 복장의 젊은 여성이 무료하게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는 것이다.

이게 뭘까? 들여다보는 나와 손톱을 짙게 바른 손가락 사이로 올려다보는 여성의 두 개의 시선이 부딪쳤다. 칼과 같은 시선이었다. 그 나이에 이미 얼마나 불행을 겪어 왔을까. 그렇게 사납고 그렇게 마음 속을 얼어붙게 하는 시선과 나는 만난 적이 없다. 뒤늦게 알았지만 그 곳은 사창가로, 창속의 여성들은 매춘부들이었다.

암담한 감정과 함께 내 머리 속에 앞뒤가 맞지 않는 몇 가지 말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가는 사라져갔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우리의 암흑은 마침내 물러갔는가
우리의 한탄의 나날들에 마침내 끝은 왔는가
정말인가 그것은 정말인가.

***비엔날레**

2000년 5월에 내가 10년 만에 광주에 온 목적은 광주 비엔날레를 보기 위해서였다. 광주 비엔날레는 1995년부터 시작되었다. 2년에 한번 열리는데 2000년은 제3회. 전체의 테마는 '人+間(Man+Space)'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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