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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에 어떤 세상을 꿈꾸나요?"

산골 아이들 <25ㆍ끝> 자신을 찾아가는 길, 여섯 번째 이야기

***아이들이 이 다음에?**

우리 삶에 관심을 가진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이들이 이다음에 어떻게 살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신다. 대학은 당연히 갈 거라고 믿고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처럼 시골서 살 거냐 아니면 도시에서 살아갈 거냐? 그렇다면 어떤 직업을 가지기를 바라느냐?, 이런 질문도 받는다.

그런 질문을 들으면 내 머릿속에는 '스스로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문서답이다. '이 다음에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느냐?'는 물음에는 '내 친구가 되기를 바라지요.'

이런 동문서답을 지켜본 친지 한 분이, '아이들 앞날이 불안하지 않다면 그 이유'를 이야기 해 보란다. 글쎄,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불안하지 않다. '몸만 건강하면 저 알아서 살아가겠지.' 현재 편안하기에 앞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가지고는 대답이 안 되니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왜 아이들 앞날이 불안하지 않을까?

나는 막내다. 그래서 조카들이 동생 같고 조카들과 함께 자랐다. 그 조카들이 30대 직장인들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을 나왔을 때는 IMF가 터질 무렵. 그 어렵다는 직장을 잡아 열심히 일한다. 탱이 역시 그런 자기 오빠들을 지켜보며 자랐다. 그 문화에서 대학은 기본이고, 직장 생활은 필수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인가 대학은 선택이고 직장 생활은 조금 갑갑한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직장 일만 하면서 살아야 하나? 이런 한심한(?) 생각이 드는 거다. 당연한 거라 믿어왔던 것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와 동시에 내 관심은 아이들 앞날이 아닌 내 삶으로 옮겨졌다. 내가 어떻게 하면 잘 살까? 내가 관심을 가질 거는 내 삶이지, 자식들 삶이 아니다. 자기 삶은 자신이 알아서 사는 거니까.

동네 분위기도 한 몫을 한다. 우리 동네에는 처녀들이 많이 귀농한다. 네 명이 귀농했다가 세 명이 시집가고 올해 또 두 명이 귀농을 했다. 그 처녀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참 보기 좋다. 그저 하루 세 끼 밥만 먹으면 아쉬울 것이 없는 듯 그렇게 살아간다. 빈집 빌리고 논밭도 빌려서 농사를 조금 한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그것도 농촌에서. 말 그대로 '먹고 살만' 하니, 여유를 가지고 살아간다. 자주 모이고 모인 김에 놀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의지해 풀어간다. 그 처녀들 살아가는 모습이 나와 탱이를 무장해제 시켰나 보다. 저렇게도 살아가는데 뭐 그리 아등바등할 거 있나!

***좋은 대학 나와 튼튼한 직장 갖기를 포기해**

우리 사회는 좋은 대학 나와 튼튼한 직장을 가지는 게 최고라 믿는다. 만에 하나 직장을 그만 두더라도 동창이 많아야 자기사업이라도 하지. 그러니 좋은 학교를 나와야 한다. 그렇게들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을 포기했다. 아이들이 이 길을 가겠다면 부모 도리로 뒷받침을 해 주겠지만, 그것만이 길이라고 매달리지는 않기로 한 거다. 이런 생각을 하는 데는 뜻밖의 도움이 있었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미국의 한 자본가가 쓴 베스트셀러 말이다. 저자는 '좋은 대학 나와 튼튼한 직장을 가진' 자기 아버지를 '가난한 아빠'라 부른다. 그러면서 '학교 가서 공부 잘하고 인정적인 직장을 찾아라'고 자식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 튼튼한 직장을!'은 내가 지난 몇 십년간 들어온 인생지침이었는데. 그게 한 칼에 나가떨어졌다. 더 이상 거기 매달릴 까닭이 없다. 저자의 말대로 '자신의 운명을 남에게 맡기지 말고 스스로 통제하라.'

산에 살아보니 돈을 많이 가진 사람, 직장이 좋은 사람이 아닌 이런 사람이 대접받는다. 야성이 살아있는 사람. 자기 손으로 먹을거리 구하고, 손수 뚝딱뚝딱 집 짓고, 산에 가면 산에서 놀며 먹을거리 하고, 강에 가면 헤엄치며 놀다가 물고기 잡아 매운탕 끓이고. 햇볕에 그을어 구릿빛으로 빛나고, 여러 가지 일로 온 몸에 근육이 잘 발달되고, 자기에게 필요한 건 자기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 보름 달빛에 박꽃이 피듯 그렇게 아기를 가져 자기 집 안방에서 아기를 낳고 젖 물려 기르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근육만큼 자유가 살아 꿈틀거린다. 사람이 가장 자연스런 모습. 그런 모습이 아름답고 매력이 있다.

애초에 나는 돈을 잘 벌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매력을 못 느꼈다. 그랬기에 '부자 아빠'에 대해서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 '가난한 아빠'도 미련을 버렸다. 자기가 진정 원하는 삶을,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면 된다. 지금은 나는 야성이 살아있는 사람, 자기 빛깔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관심이 쏠린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대에**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대다. 이번 세기에 들어 몇 년 지나지 않았지만 기술문명 디지털 문명이 발달하면서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걸 본다. 에디슨 시대는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였다면 디지털 시대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대'다. 이건 무슨 근거가 있는 소리가 아니고 내 느낌에 그렇다는 소리다. 이런 눈으로 보니, 무언가를 상상한다는 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걸 할 수 있기에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봄에 고추씨를 심으며 씨가 싹이 트고 자라 꽃 피고 열매 맺을 걸 상상한다. 그런 상상을 현실이 되게 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 가꾼다. 봄에 일찍 비닐집을 짓고 씨를 뿌려 모종을 기른다. 오월에 고추 모종들을 밭으로 내 심는다. 고추밭은 거름 좋고, 장마철을 대비해 물 빠짐이 좋고, 그러면서도 두어해 고추를 심지 않은 곳으로 고른다.

더운 여름 기운을 먹고 고추가 잘 자란다. 꽃을 피우고 아기 고추를 달고 그 고추가 붉게 익어간다. 고추는 고추대로 열심이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뜨거운 햇살을 달게 받아 엽록소를 만들고 장마도 견디고, 온갖 벌레와 병을 이겨내야 한다.

오늘 아침에 마당 텃밭을 지나다 고추에 눈이 갔다. 풋고추 따먹으려고 몇 포기 심어놓고는 제대로 돌보지 않았구나. 자세히 들여다본다. 너무 웃자랐다. 고추가 가진 힘에 견주어 가지가 너무 많이 벌어졌다. 곁가지를 솎아주는데 아니나 다를까 군데군데 병이 오기 시작했다.

처음 고추를 기를 때는 풋고추 몇 개 따면서도 아까웠다. 고추 포기에 달린 고추가 모두 소중했다. 이제는 고추가 웃자란 채로 그냥 내버려 두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고 있다. 몇 년 전 고추가 사람 키보다 크게 자란 적이 있었다. 주렁주렁 달렸던 고추. 그 많던 고추가 익어가며 병이 들었고, 병이 안 든 걸 골라도, 말리다 보면 병색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지난해 역시 고추가 너무 잘 자랐다. 태풍에 쓰러지고 병이 왔다. 한번 병이 오면 속수무책이라는 걸 알기에, 눈 딱 감고 낫으로 고추 가지를 잘랐다. 눈을 뜨고 보니, 잘린 가지와 풋고추가 바닥에 깔리고 고추 포기는 앙상하게 서있었다. 그 고비를 넘기고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고추는 병을 이겨내고 붉은 고추를 달았다.

싱싱한 고추 가지를 뚝뚝 잘라내기란 쉽지 않다. 숨 한번 들이쉬고 한번 하고 돌아서서 다시 보면 또 잘라내야 할 곳이 보인다. 그렇게 두어 번 가기치기를 해 주었다. 그러면서 부모가 해 주어야 할 일이 바로 이런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이에게 온갖 기대를 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아이가 자기 힘으로 감당 못하게 이것저것 벌이면 가지치기를 해 주는 일말이다.

가지를 꺾인 고통을 이기고 고추가 건강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래야 고추의 꿈이자 내 꿈인 황금빛 고추씨를 맺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문명의 전환기에서**

우리가 사는 지구는 늘 변해왔지만 지금도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시 문명이 놀랄 만큼 발달하면서 도시 문명의 문제점이 사람들 삶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시 문명과 하나가 되어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마저 '아무리 편하고 좋아도 이게 아닌데…', 한다. 문명의 이기만 있으면 살 것 같아도 '버릴 수 없는 마지막 자연'인 사람 '몸'이 문제를 일으킨다. 머리로는 자연과 상관없이 살 것 같지만 몸은 그렇게는 못살겠다고 비명을 지른다. 병원에 가고 끼니마다 몸에 좋다는 걸 찾아먹고 약까지 챙겨먹는다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몸은 자연이기에.

젊고 아픈 데가 없어 몸에 무관심하게 지나던 젊은이도 아이를 가지면 몸 건강을 돌아보게 된다. 내 아기에게 농약이나 식품첨가제를 먹이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몸에 관심을 가지고 밥 먹으면서도 똥오줌을 이야기한다. 오늘 아기가 똥을 잘 누었는지, 똥 색깔을 어떤지…. 만일 아기에게 아토피가 있다면 그건 삶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밥상이 바뀌고 몸 공부 자연 공부를 시작한다.

<프레시안> 대담에서 만난 김정수 님 말이 귓전을 맴돈다. '시골에서는 이제 맹수가 많이 사라졌지만 도시에는 맹수가 많다.' 그렇다고 도시 사람들이 모두 자연으로 내려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산골은 자연이 아직 많이 살아있다. 집 앞에서 으름이 익어가고, 여름밤이면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여기도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곳이 어느 날 기업도시로 지정되었는데 그 내막을 알아보니 54홀 골프장이 중심 사업이란다. 골프장이 자연을 파괴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 덕유산 자락이 청정 지역이라 자랑하던 일이 곧 옛말이 되게 생겼다. 어마어마한 자본력이 국가권력과 손잡고 합법적이라고 밀어붙이며 산을 깎고, 나무를 베고, 거기에 인간이 만든 물질들을 쭉 깔아놓을 것이다. 쓸모를 잃으면 그 자리에서 쓰레기 더미가 되어버릴 것들을 말이다.

어디에 사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자기 몸의 자연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이란 나하고는 동떨어진 것, 산으로 강으로 가야 있는 무엇이 아니다. 자연은 바로 내 몸 그 자체다. '자연 보호'를 위해 우리는 특별한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내 몸이 자연스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면 된다.

이런 시대적 요구가 참살이(well-being) 바람, 서구 여러 나라에 나타나고 있다는 다운시프트족. 느리게 살기, 요가, 명상……. 이런 주제로 나타나고 있다. 교육에는 공동육아, 대안학교, 품앗이 육아, 그리고 아예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 있는 아이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귀농'이라는 흐름도 있다.

***자기 스스로 행복한 길을 가는 게 이 세상을 위하는 길이 되기를**

귀농한 사람들은 도시문명이 아닌 자연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자기가 선택했기에 가치를 두고 산다. 하지만 삶에서 겉도는 걸 느낀다. 그 순간 내가 뼛속 깊이 도시내기라는 걸 알겠다. 며칠 전 큰물이 졌다. 전기, 전화, 길이 모두 끊겼다. 와, 간만에 고요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겠다! 저녁에 어두워지면서 촛불을 켜고 보통 때는 맛 볼 수 없는 시간을 보내리라. 그런데 막상 촛불을 키고 나니 졸리다. 딱히 할일도 떠오르지 않아 일찍 자고 말았다.

자연과 목숨에 대한 자각이 있지만 내 삶에서 겉돌 때, 나도 모르게 자연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기대를 한다. 귀농해 집에서 자연스레 태어난 아기를 보면 더욱 그렇다. 출발부터 자연스럽게 할 테니까. 하지만 돌아보면 결국 내 몫이다. 내가 세탁기 빨래를 하는데 아이가 냇가에서 빨래하기를 기대하겠는가.

100년 전 아니 얼마 전까지도 아이들은 그렇게 태어나서 자연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건 주어진 삶이었다. 귀농은 자기가 선택한 삶이다.

책을 보면 전에도 자연의 소중함을 자각하고 살아온 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도시문명으로 거세게 흘러가는 속에서 외로운 외침이나 특별한 사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문명의 끝에서 자연의 소중함이 새롭게 다가오는 시대다.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걸 생각하지만 그 실제 모습이 어떠한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다만 상상할 뿐이다. 영화 <beautiful green>도 그런 상상이고, 역설적이지만 <매트릭스>도 그런 상상이 아닐까.

나는 꿈꾼다. 문명의 전환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그런다고 뭐 거창한 걸 꿈꾸는 건 아니다. 무엇을 할 때 그 동기는 아주 작은, 때로는 유치한 이유일 때가 많으니까. 자기 몸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으면 그게 출발이 아니겠는가.

상상은 이어진다. 사람이 자기 몸이 자연스레 살아가는데 관심을 가지고 자기 행복을 찾아간다면 하나로 만날 수 있기를. 스스로 행복한 길을 가는 게 이 세상을 위하는 길이 되기를……. 그렇기에 우리 아이들이 이 다음에 어디서 어떤 삶을 살더라도, 지금 몸에 귀 기울이는 걸 깨치기를 바랄 뿐이다.

그 길에 징검다리 돌 하나라도 놓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친다.

* * *

이것으로 '산골 아이들' 연재를 마칩니다. 긴 이야기였습니다. 그동안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분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부모가 자식 이야기를 쓰는 건 팔불출 짓이라 겁 없이 덤벼들었구나, 중간에 생각 많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댓글을 달아주시고 전화를 주신 여러분들 덕에 친구와 편히 이야기하듯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집에 인터넷이 연결되어 자연에 관한 홈페이지를 열었습니다. (www.nat-cal.net· 한글도메인 자연달력). 탱이가 독학으로 만들었고, 아직 우리 네 식구밖에 회원이 없는 초보 홈페이지입니다. 이곳에 자연에서 보고 듣는 자연 이야기를 담으려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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