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지팔**
2001년 12월 런던에 도착한 이틀 후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채로 코벤트가든의 로열오페라하우스를 향했다. 사이먼 래틀의 지휘에 의한 바그너의 <파르지팔(Parsifal)>의 공연날인 것이다.
나는 오페라 애호가이지만 바그너에 한해서는 불과 세 번째 관람이었다. 분명히 말하자면 멀리해 온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십수 년 전에 빈국립가극장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보고 아주 따분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건 내가 미숙했던 탓일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바그너와 반유대주의, 바그너와 나치즘이라는 곤란한 문제이다.
뛰어난 예술을 정치적 이유만으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바그너의 경우, 그렇게 말하고 끝내기에는 문제가 너무도 크다. 나치가 바그너를 이용했다고 하는 옹호론이 있는데 1850년에 '음악에 있어서의 유대성'이라는 논문을 공표했듯이 그자신이 19세기의 반유대주의이데올로기의 주요한 제창자였던 것이다.
히틀러는 바그너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할 때 배낭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악보를 넣어가지고 지냈다고 전해진다. 바그너의 음악자체에도 나치를 매료하는 요소, 국수주의나 파시즘에 이어지는 요소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에 무경계해도 될 것인가? 이점을 바그너 애호가로 불리는 몇명에게 물어 본적이 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은 기억은 없다.
그런데 실은 그 전해인 2000년 여름 잘츠부르크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본 것이다. 지휘는 병중인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대신해 로린 마젤. 나에게 있어 두 번째 바그너 체험이었다. 그게 좋았던 것이다. 불가해한 감동이었다. 더 알고 싶다는 강한 호기심이 솟아났다. 위험한데, 라고 생각한다. 생각하지만 호기심의 수위가 경계심보다 높은 것이다.
공연은 오후 4시부터의 마티네였다. 토요일 오후인만큼 주위는 대단한 인파이다. <파르지팔>은 중세의 <성배전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바그너 자신이 '무대 신성 축전극'이라고 부른 그의 생애 최후의 악극이다. 1882년에 이 작품을 완성해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의 초연을 성공리에 마친 후 바그너는 베네치아로 정양을 떠나 이듬해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 * *
스페인 북부의 산지 몬살바트의 성주이자 성창(聖槍)과 성배(聖杯)의 수호자인 암포르타스왕이 요녀 쿤드리를 향한 애욕에 눈이 멀어 사악한 마법의 신 클링조르에게 성창을 빼앗기고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순수한 바보'인 파르지팔에 의해 구제되어 성창을 되찾는다. 파르지팔은 성금요일에 왕의 후계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줄거리를 써 본들 동화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 단순한 스토리를 상연하는데 3막, 5시간 남짓의 시간을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생각해 제 정신이라고 보기 어렵다. 바그너의 세계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한 그것은 이해곤란이며 편집광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치제3제국의 선전 담당 장관 괴벨스는 1938년 "유대성과 독일음악은 그 성질부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독일적인 음악과 유대적 음악을 명확하게 구별해 인식하는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3제국의 문화 정책 이데올로기 이론에서는 바하, 베토벤, 헨델, 모차르트는 모범적이고 독일적으로 간주되었으며, 멘델스존, 말러, 쇤베르크, 코른골트, 쿠르트바이엘 등의 유대계 작곡가의 작품은 독일 음악의 모방에 불과하며, 기법에 치우치고, 깊이가 없으며 진부하거나 부도덕하다는 평가되었다. 힌데미트는 유대계는 아니었지만 문화 볼셰비키여서 배척당했다.
이와 같은 나치에 의한 사이비 이론화 작업을 유리하게 만드는 데 대대적으로 인용된 것이 바그너였다. 나치즘 미학에서 바그너야말로 이상적으로 독일적이었던 것이다.
'성배'란 예수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쓴 식기로, 십자가 위의 예수의 상처에서 솟는 피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이와 같은 '성유물'에 대한 숭배가 유럽전역에 퍼졌다. 십자군이 원정에 의해 동방으로부터 갖고 돌아 왔다고 하는 성유물,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피', 성인의 유골, 성의(聖衣)등이 성스러운 것으로 받들어져 그것을 모시는 성당이 각지에 세워졌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 성유물들이 실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부조리한 열광이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나 유대교도에 대한 적의와 하나였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스도 수난극'도 이 시기에 전파되어, 일반 민중들 사이에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살인자'라는 반감을 심게 되었다. 각지에서 유대인 학살 사건도 다발했다.
'성배'를 찾는 행위는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의 은유이다. 암묵리에 소박하고 순진한 그리스도 교도인 파르지팔에 대비되는 것은 교활하고 신용할 수 없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을 타자로서 배제하고 그것과는 다른 '그리스도교도', '아리아인종', '독일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나르시스틱하게 강조하는 것에 성배 전설은 크게 기여했던 셈이다. 그에 더해 바그너는 이 전설을 먼 과거에의 동경, 헌신과 자기희생에의 도취, 초인이나 천재의 찬미와 같은 낭만주의 미학에 의한 일대 그림극으로 그려내었던 것이다.
* * *
이런 것들를 알고 경계심을 잔뜩 가지고 관람을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다섯 시간 남짓한 상영 시간 내내, 시종 바그너의 악극이 지닌 불가사의한 광택에 매혹당하고 말았다. 내 머리 속에 전에 함부르크에서 본 프리드리히의 그림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높은 봉우리의 정상에 선 남자. 멀리 보이는 저편에는 험한 산봉우리가 이어지고, 지상은 구름의 바다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고독, 우울, 그리고 차가운 고양감. 프리드리히는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바그너의 음악세계는 프리드리히의 회화 세계와 강렬한 친화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통설을 몸으로 검증하고 있는 심정이다.
<그림 1>
베토벤에서는 문제 있다고 생각되었던 래틀의 지휘가 바그너에서는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왕의 역을 맡은 토머스 함프슨의 가창도 일품이었다. 막이 내린 후 나는 흥분과 동시에 크게 당황했다. 한편에는 크나큰 감명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는 깊은 의문이 있었다.
게다가 교양 있는 백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관객들이, 오늘날의 이른바 '아우슈비츠 이후의 세계'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그너에 도취되어 있는 것도 나에게는 섬뜩한 것이다. 또한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도취되어있는 일본인 관객의 대부분이 아마도 이와 같은 위험성에 무지할 것이 불안해 견딜 수없는 것이다.
바그너의 음악에 자주 쓰이는 것이 '무한선율'이다. '무한선율'이란 '리듬적, 화성적인 단락의 느낌, 종결의 느낌을 가지지 않는 자유로운 선율'을 의미한다. 즉 '네, 그럼 여기서 일단락'이라거나 '자 이걸로 끝'과 같은 마디를 의식적으로 없애고 있는 것이다. 높이 올라갔는가 하면 다시 내려오고, 내려갔는가 싶으면 다시 올라간다. 커다란 음향이 귀를 울리는가 하면 가늘게 잦아들어가고, 사라졌는가 하면 다시 울려퍼진다. 끝없이 파도치고, 너울거리며,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계속된다. 드디어 끝났나 싶으면 다시 다음 물결의 너울이 밀려온다.
처음에는 당혹감이 있고, 따분함과 피로감이 있지만, 일단 그 무한의 물결에 몸을 맡겨버릴 수만 있다면, 불가해한 관능과 고양감에 잠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장치가 되어있는 것이다. 아마도 다섯 시간이라는 긴 무대에서 오는 피로나 일종의 감각의 마비가 관객의 감성에 가져오는 효과까지 계산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바그너의 '종합예술'의 경우도 부르크너의 교향곡의 경우도, 음악과 듣는 이의 관계는 말하자면 '대등'한 것이 아니다. 바그너의 장대한 '물결의 너울거림' 속에 청자는 '몸을 맡겨야'하며 몸을 맡긴 청자는 부르크너의 음의 신전을 '우러러야' 한다. (클 H 케이터, <제3제국과 음악>, 아카시마 사노리 옮김, 水声社) 바그너는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자, 바로 이게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취미, 의심이나 비판, 위화감이나 저항, 그와 같은 감정을 어쨌든지 일단 젖혀두고 말하자면 몰주체, 몰아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몸을 두고 크나큰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바그너의 음악에서 감명과 도취를 얻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만큼 파시즘에 바람직한 것은 없는 것이다.
예술과 정치는 별개다, 라는 말을 들을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범용한 예술이라면 어떤 정치와도 타협할 수 있을 것이다. 바그너의 예술이 뛰어난 점은, 바로 그 둘이 별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래서 고민스러운 것이다.
***성배민족(聖杯民族)**
코벤트가든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본드스트리트에서 내려, 조용한 밤길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도 아직 바그너의 무한선율이 몸속을 흐르고 있어 신경이 흥분되어 잠이 올 성싶지 않다.
잠들지 못하는 채로 일본에서 가져온 잡지를 집어 들었다. <현대사상(現代思想)> 2001년 12월호, '내셔널리즘의 변모'라는 특집호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는 바빠서 아무리 해도 읽을 시간이 없어, 그대로 여행 가방에 넣어가지고 온 것이다.
거기에 실린 연세대학교 교수 김철의 '한국의 민족-민중문학과 파시즘 김지하의 경우'라는 논문을 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금세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논문에 김지하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사명과 과제를 가진 민족입니다. 뛰어난 전통, 영적인 전통을 가졌으면서 오랜 고난 속에서 수난만 받아온 고난의 민족입니다. 한 문명의 쇠퇴기에는 반드시 인류의 새로운 생의 원형을 제시하는 민족이 나타납니다만, 그 민족을 성배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할 당시에는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지금은 한민족입니다. (<사상기행 2>)
또 '성배'라니. 이것은 어찌된 우연인가. 바그너로부터 기분을 바꾸려고 하는 참인데 여기서도 '성배'와 만나고 만 것이다.
김철의 논문은 1970년대 한국 민주화 투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민중문학론(그 대표적 표현자인 시인 김지하과 이론가인 백낙청)이, 오늘날에는 과거에는 투쟁의 대상이었던 파시즘과 심정과 이론을 공유하고 상호침투해 마침내는 공범관계를 이룬다고 하는 빠져나갈 길이 없는 모순과 배리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주장한다. 과거에는 식민지주의나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 정신적 근원이었던 내셔널리즘이, 오늘날에는 국수주의, 파시즘사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주된 원인은 민족-민중문학론이 '민족'이나 '민중'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묻지 않고, 자기완결적으로 절대화해 온 것이 있다는 것이다.
논문을 읽고 심경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논자의 주장에 반대해서가 아니다. 그 반대인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내게는 처음이 아니었다. 나 자신 1995년에 '김지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을 통해 그의 국수주의 사상으로의 전락을 비판한 적이있다. (<분단을 산다>, 影書房)
김철의 논문이 지적하듯, 김지하가 하는 말은 어리석고 황당하고 논리성을 결여하며 전형적인 국수주의성향을 보이는 것은 틀림없다. 그 점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만 하는 것은 유쾌하지는 않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저 80년대의 어둡고 험난했던 날에 김지하라는 이름이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까.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창비, 1982)
1970년대의 김지하의 대표작 <타는 목마름으로>이다. 이것은 신에게 선택받은 위대한 '성배민족'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다. 뒷골목에서 흐느껴 울며, 나무 판자에 남몰래 '민주주의만세'라고 쓰는 사람들의, 자유를 갈망하는 노래이다. 여기에는 의심할 바 없이 한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꿰뚫는 보편적인 인간해방에의 지향이 있다.
나 자신, 1970년대초 두 형이 투옥돼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 살면서 바로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 자립, 한국의 민주화를 절절히 바라고 있었다. 당시 나는 한국이 민주화되어 형들이 해방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믿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날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을 의의 있는 것으로 만들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주관적 상상에 있어서는 김지하로 대표되는 민족-민중문학을 매개로 해 민주화 투쟁를 하는 한국의 동포들에 속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일본이라는 장소에서 사는 재일 조선인 2세로서 스스로의 생의 의의와 방향성을 모색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살기 위해 필요했다고까지도 할 수 있다.
그랬는데, 지금은 어떤가? 그 무렵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형들은 둘 다 살아서 감옥으로부터 풀려났으며 한국사회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잇따른 시련이 계속되고는 있으나 저 '한 시대'는 과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탑과도 같이 우뚝 서 있던 시인은 '성배의 민족' 운운하는 국수주의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이전에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진정으로 괄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였던 한국 민중 신학이 지금은 김지하와 '선민사상(選民思想)'을 공유해 '일종의 자기중심주의, 나르시시즘'에 전도해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를 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재일 조선인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조선인'을 시야의 밖에 두지 말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디아스포라'와 과제를 공유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자기 중심주의의 함정을 피하는 길에 통할 것이라는 생각을 썼다. ('재일 조선인은 민중인가', <반난민의 위치에서>, 影書房)
물론 김지하 한사람이 1970년대 저항 내셔널리즘의 대표는 아니다. 이 시인은 오히려 과격한 예외라는 견해가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70년대를 그와 함께 겪은 사람들 속에서 강하고 이성적인 비판이 나오지 않는 걸까.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내가 피억압민족에 의한 해방과 자립을 위한 운동들이, 언제든 어디에서든 불가피하게 자기중심주의나 국수주의에 전락해버리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외면한 시니컬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생각은, 식민지지배의 책임을 인정하게 않으면서 피억압민족의 저항을 눈의 가시처럼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환영받을 것이다.
내셔널리즘을 넘는다는 것은 '선진국'이라는 안락한 장소에서 '선진국'으로서의 기득권을 의심 없이 향수하면서 타자를 내셔널리스트라고 지칭하면 그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피억압자가 저항을 위해 내셔널리즘을 필요로 하는 상황, 피억압자를 내셔널리즘에 결집시키는 억압구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방향성을 결여한다면 그 담론은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힘으로만 작용할 것이다.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내셔널리즘'이라는 한 마디로 아우르는 것도 하물며 그것을 김지하로 대표하게 하는 것도 단락적인 시각에 불과하리라. 그것은 무엇보다 해방과 자립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것은 내셔널리즘에서 기독교, 자유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정치적 입장의 상이를 지니고, 군사 독재 타도라는 공통의 목표로 묶인 일군의 사람들이 진 역할이었다. '김지하'란 그와 같은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을 상징하는 집합명사였다. 시대의 변화, 상황의 진전은 그 집합적 '인격'의 분열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분열과정을 거쳐 한국의 저항 내셔널리즘이 더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사상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 가는 가능성을, 나는 단념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한국에서는 1970년대, 1980년대에 군사 정권과 싸운 세대가 사회 각 분야의 중핵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하나의 시대, 하나의 사회의 주인공으로의 자신에 넘쳐있다. 김철이라는 논객도 자신이 한국이라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시련의 한 시대를 살아왔다는 자각에는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그의 논의는 저항 내셔널리즘의 바람직한 분열과정을 촉구하고, 그 최량의 자산을 내일에 살리는 것에 기여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어떤 한시대의 변혁을 중심에서 짊어졌던 '우리'는 해체돼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답할 수 있는 다음의 '우리'가 형성된다. 다이나믹한 분열과 종합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시련에 맞서는 새로운 운동과 사상이 단련을 받아갈 것이다.
내 심정이 혼란되어 있는 것은, 나 자신이 그와 같은 다이나미즘의 '밖'에 놓여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국의 동포들과 똑 같은 고통을 체험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 또한 '시련의 시대'의 수인(囚人)의 몸이었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허락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난 30년을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20대부터 50대라는, 사람의 인생의 중심을 이루는 세월이었다.
나와 같은 디아스포라와 한국 동포들이 투쟁을 통해 '합류(合流)'하는 것이 1970년대초에 내가 막연하게 지니고 있던 비젼이었다. '합류'란 한국 민중 신학의 용어이다. 그러나 '합류'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나는 자신이 여전히 '밖'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 인생의 유한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런던의 오래된 호텔에서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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