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산업의 전망을 둘러싼 위기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이같은 위기론은 최근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1면 톱기사를 필두로 연합통신과 서울신문, KBS와 YTN, 신동아 등 각종 매체에서 잇따라 터져 나오고 있다. 위기의 내용도 다양하다. 조선일보는 이른바 매니지먼트업계의 문제점을 지목하고 있는 반면, 한겨레는 불법복제파일 때문에 한국영화계가 연간 5백억원의 손해를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신문과 방송 등에서는 이들 문제와 아울 러 영화진흥위원회 등에서 나온 자료를 인용, 한국영화 관객이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현상에 대해 한결같이 우려의 목소리를 나타냈다.
***잇따른 흥행 실패, 한국영화의 위기**
이들 매체가 지적한 것처럼 작금의 한국영화계 현실은 심각하게 걱정할 일임이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올들어 1월부터 3월까지 1/4분기동안 한국영화 총관객수는 9백8만명에서 5백24만명으로 전년대비 73%에 불과한 수준을 나타냈다. 이 같은 수치가 반영하듯 영화계에서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올들어 성공한 영화가 가뭄에 콩나듯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이른바 대박흥행을 예상하며 제작비를 대거 투입했던 영화들이 하나같이 고배를 마셨기 때문이다. 예컨대 90억원 가까운 제작비가 소요됐던 <남극일기>는 1백만 관객을 간신히 넘긴 상태에서 종영돼 비용의 1/3도 건지지 못했다. 2백50만 가까운 관객을 모으며 비교적 선전한 것처럼 보이는 <혈의누> 같은 작품 역시 손익분기점인 2백75만을 넘기지 못해 사실상 실패한 영화로 기록됐다 .
흥행 기대작들이 예상외로 고전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 지난해말부터의 얘기다. 설경구 주연의 <역도산>, 최민식 류승범 주연의 <주먹이 운다>, 이병헌 주연의 <달콤한 인생> 등은 국내시장을 주도할 '주전급 선수'로 지목됐으나 이들 모두 잇따라 고배를 마시며 일찌감치 국내 영화시장의 경기 하강을 예고해 왔다. <주먹이 운다>를 제외하고 다른 작품들은 그나마 일본시장에서의 사전판매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제작비 보전에 따른 심각한 차질을 모면하지 못할 뻔 했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매니지먼트업계의 문제 또한 심각함을 넘어서서 국내 영화계 최대 갈등 국면으로 부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싸이더스HQ, 튜브매니지먼트, 팝콘매니지먼트 등 지난 4~5년간 입지를 확장해 온 국내 매니지먼트 회사들은 자신들이 소속시키고 있는 스타급 배우들의 맨파워를 내세워 영화 수익의 상당지분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소한 캐스팅 비용만도 전체 제작비의 10%까지 치솟고 있다.
스타 매니지먼트 회사들의 이 같은 몸값 확대 전략은 급기야 제작 현업과 직접적인 마찰을 초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단 제작자들의 모임인 한국영화제작가협회가 비상총회를 소집하고 이같은 매니지먼트업계의 '횡포'에 대해 조직적 대응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상태다. 그러나 제협의 그 같은 대응이 선언적인 의미외에 실실적인 측면에서 효과를 얻어낼지는 미지수다.
제협의 김형준 이사장(한맥영화사 대표)는 "영화계의 실권은 이미 많은 부분 매니지먼트쪽으로 넘어갔다"고 진단하면서 이를 두고 "일명 훈탁통치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훈탁통치'란 국내 최대 매 니지먼트 회사인 싸이더스HQ의 대표 정훈탁씨를 지목하는 것이다. 실제로 싸이더스HQ는 최근 들어 자신들의 영화계내 입지를 최대한 확장하고 있으며 특히 지난 2~3년간 끊임없이 영화시장으로의 진입을 시도해 왔던 일부 이동통신사와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싸이더스 HQ는 지난 해 SK텔레콤에게 회사 지분을 양도하고 거액의 자본을 투자받은 바 있다.
한편 SK텔레콤은 최근 자사의 멤버십 카드로 운영하고 있는 극장입장권 할인서비스를 메가박스와 프리머스를 뺀 일부 멀티플렉스, 그러니까 CGV와 롯데시네마에게만 국한시키겠다고 발표해 일대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되면 메가박스와 프리머스 체인을 이용하는 관람객들은 CGV, 롯데시네마 를 이용하는 것에 비해 실질적으로 1천원~2천원씩 비용을 더 내게 되는 셈이 된다.
***한국영화 위기의 본질은 미학적 위기에서 찾아야**
이쯤되면 얘기가 너무 복잡해진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국내 영화계는 현재 다양한 요인에 의해서 기존의 상승세가 한풀 꺾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지금이야말로 이동통신사의 시장진입 등 또 다른 거대 변인에 의해 국내 영화판 전체가 일대 구조조정에 휘말리고 있는 시기로 짐작된다. 그간 한국 영화계는 CJ와 동양, 롯데 등 3대 대기업 영화사 체제로 재편, 운영돼 왔으나 여기에 SK텔레콤과 KT 등 거대자본의 통신사들이 끼어들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같은 구조변화 혹은 몇가지의 징후들로만 국내 영화계의 위기론을 확산시키고 부채질하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와 같은 것이라는 지적이다 . 한국영화의 위험신호는 그 같은 외적 변화보다는 내적인 요인에서 먼저 찾는 것이 순서상으로 맞다는 것인데, 한국영화의 진짜 위기는 바로 '미학적 위기'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업적으로 안전하게, 오로지 흥행만을 목적으로 해서, 철저하게 기획된 영화만을 양산하려는 영화판의 현실이야말로 근본적인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부 신문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는 매니지먼트계의 횡포 문제 역시 거꾸로 돌아가면 제작자들이 흥행영화만을 생각하고 그에 따라 스타시스템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는, 일종의 자충수를 두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 관객수가 급감하고 있는 현실 역시 최근 1~2년 사이에 한국영화가 이렇다할 문제작을 내놓지 못한 채 천편일률적인 상업영화만을 양산해 온 것에 따른 일임을 반증하는 것일 수 있다 .
이에 따라 관객들은 지나치게 상업영화에만 관람행태의 코드가 맞춰지게 돼 중간중간 나오는 의미있는 영화들의 맥을 짚어 나가는 데 실패하고 있다.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 등이 작품에 대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국내 흥행에 실패한 것이 그런 예에 속한다. 할리우드산이 든 유럽산이든 숱한 외화들이 그 풍부한 내용성에도 불구하고 유독 최근 들어 국내 시장에서 제값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저널들이 잇따라 지적하고 있는 한국영화 위기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좀더 본질적인 문제로 접근해 들어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영화는 언제부턴가 예술적 실험성과 도발적인 사회의식을 잃어가고 있다. 그 내상을 치유하는 것이 위기 탈출의 시작이다. 많은 사람들이 작금의 위기론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 것은 그때문이다.
영화전문 기자/동의대 영화과 교수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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