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환경과 농업을 살리는 건강한 농지제도 개편을 위한 연석회의(농지제도 연석회의)'와 공동으로 최근 농지법 개정을 둘러싼 찬반 논란을 통해 촉발된 우리나라 농업정책의 바람직한 방향을 공론화하는 기획을 마련한다.
이번에는 농업 통상 문제에 정통한 송기호 변호사가 글을 보내왔다. 송 변호사는 현대 농업이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 재편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설득력있게 제시하면서, 미국식 농업을 좇는 것은 농업이 갖고 있는 수많은 장점을 포기하면서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에 대한 종속을 강화하는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편집인.
***평화의 조건 : 현대 농업은 국제 질서를 어떻게 바꾸는가?**
1909년, 태평양을 건너 대한제국의 논농사를 보러 온 미국인이 있었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의 농학교수였던 킹 (F. H. King, 1848~1911)은 아홉 달 동안 대한제국과 청국, 그리고 일본의 논을 답사하였다. 그는 <Farmers of Forty Centuries, or Permanent Agriculture in China, Korea and Japan >에서, 우리의 벼농사를 <영속가능한 농업>으로 평가하였다. 필자가 번역 중인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미국을 계속 유지하고자 원한다면, 또한 우리가 이 몽고족의 나라들처럼 삼 천 년 내지 사 천년에 걸쳐 역사를 잇고자 한다면, 또한 그 역사에 평화가 이어지고 기근과 전염병이 없게 하려면, 미국은 방향을 다시 잡아야만 한다. 지속가능하도록 자원을 보전하는 데에 농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킹의 꿈은 좌절되었다. 1952년, 미국 수산국의 여성 생물학자였던 카슨(R. Carson)은 15년간의 공직생활을 사직하고, 환경과 생명을 해치는 미국 농업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1962년, 그녀는 <The Silent Spring(침묵의 봄)>에서 미국 농업이 도입한 디디티(DDT) 농약이 물과 흙을 오염시키고, 새의 몸 안에 쌓여 새를 죽이고 있는 현실을 밝혔다.
1970년 초반, 미국은 지속불가능한 공장형 농업(factory farming)으로의 구조조정을 완성하게 된다. 1850년부터 1950년까지 거의 1백년 동안 큰 변함없이 60~80 헥타르였던 농장평균규모는 1971년에 1백80헥타르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대에 비하여 농업의 생산성이 49%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 대가로 석유 없이는 돌아가지 않은 농업, 모태가 되는 자연 자원을 끊임없이 손상하는 농업이 자리 잡았다. 킹은 왜 미국이 평화를 유지하려면 농업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을까? 미국의 이라크 침략과 미국의 공장형 농업체제는 서로 무관한 것일까?
***국제 경제 질서와 현대 농업, '미국 농업 살리기' 음모?**
농업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농업에 관심을 두는 것은 지나간 것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지금 여기와 다음의 세대를 위한 성찰이다. 바른 농업, 지속가능한 농업은 평화의 조건이며 시대정신이다.
농업은 이시대의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국제적˙국내적 의제이다. 농업은 국제 경제 질서의 가장 중요한 기본 동력의 하나이다. 지금의 세계무역기구(WTO)가 만들어진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미국 농업의 모순이다.
본디 미국은 1955년, 농업조정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에 따라 외국 농산물 수입을 제한할 특권을 자신에게 주지 않을 경우 가트에서 탈퇴하겠다고 압박하여 이를 수십 년 동안 보장받았을 정도로 수입제한 국가였다. (가트 25.5조의 웨이버)
미국이 이를 포기하고 우루구아이 라운드 협상을 주도하게 된 주된 이유는, 미국을 유럽 농산물 시장에서 축출한 유럽공동농업정책을 바꾸려는 데에 있었다. (Rosenthal & Duffy(1996), Reforming Global Trade in Agriculture) 새 국제경제 질서 협상인 ‘도하 개발 어젠더'(DDA)에서 미국은 호주, 브라질, 인도 등 농산물 수출국들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03년 칸쿤 각료회의의 마지막 날에 배포된 의장 초안(chairman's text)은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의 농업과 공정히 경쟁할 수 있도록 선진국 농업보호정책의 철폐를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는 미국 농업조정법체제의 위기를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서 언제부터인가 자유무역협정 (FTA) 체결이 중요 현안이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국이 자신의 농업조정법체제를 유지하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미국은 무역수지적자 문제에서 농업에 사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무역 수지 흑자 산업 가운데 농업보다 더 기여하는 산업은 항공/선박/기차(aircraft/ships/train) 산업밖에 없다. 1998년 무역수지 흑자 부분의 15%가 농업에서 나왔다.(www.usda.gov)
***치명적 파국 불러올 2004년 쌀 협상**
미국은 끊임없이 국제 경제 질서를 자신에게 이롭게 바꾸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통상관료들은 미국이 움직이는 대세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개발독재의 기득권자들과 주류 언론은 이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미화해 준다. 개발독재과정에서 자주성이 거세된 농업인은 걸림돌로 비난받는다. 2004년 한국의 쌀 협상은 그 거울과도 같다.
미국은 지난 10년간 한국의 의무수입량(MMA)을 놓고 중국과 국제입찰경쟁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한국의 기존 의무수입량의 24.4%(5만 톤)을 미국 몫으로 아예 배정받았다. 10년 동안 두 배로 늘어날 의무수입량에 대하여는 입찰에 계속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쌀 유통시장에 미국 기업이 직접 뛰어 들 권리를 보장받았고(양허표 6.2항), 미국 쌀을 시장에 제 때 방출하도록 하였고, 일정량을 반드시 시판하도록 하였다. 미국 쌀 협회(USA Rice Federation)가 2005년 새해 첫 <USA Rice Daily>의 첫 기사에서 한국 쌀 협상 결과에 대하여 미국 정부에 감사하다고 한 것은 결코 인사치례가 아니다.(www.usarice.com)
우리 입장에서 2015년 관세화(수입자유화)를 성공한 협상이라 할 수 있는가? 필자는 한국이 3~5년 안에 관세화 유예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한국은 두 배로 늘어날 외국쌀 의무수입량을 계속 감당할 능력이 없다. 일본이 유예기간 5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1998년 12월 관세화를 결정한 주된 이유는 1998년 10월 시점으로 42만 톤이나 되는 수입쌀 재고를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수입 쌀 재고량은 작년에 이미 48만 톤에 이르렀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전망 2005)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이 관세화 유예를 도중에 포기하더라도, 2004년 쌀 협상의 의무수입량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양허표 4.3항) 그러므로 필자는 지금 진행 중인 농업 협상 (DDA)에서 2004년 쌀 협상 결과보다 더 유리한 협상 결과를 이끌어내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그 결과가 덜 불리할 경우, 국회는 2004년 쌀 협상 비준동의안을 거부해야 한다. 국회의 동의 절차 완료에 정해진 시한은 없다. 의무 수입량은 작년 기준으로 채워 주면 된다. 쌀 협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농업 혁신과 시대정신 : 지속가능한 농업 체제를 향해**
써레질로 들녘에 생기가 돌더니, 모를 시집보내는 모내기도 얼추 끝났다. 김재호는 <우리네 농사연장>이라는 책에서 논은 하나의 호수라고 썼다. 농부는 물이 새지 않도록 가래질을 하여 논둑을 매어 놓고, 물을 대고, 논을 썰고, 물의 수평을 맞춘 다음, 모를 시집보낸다. 논은 소금쟁이, 지렁이, 물벼룩, 거미, 여치, 벌, 사마귀, 개구리, 잠자리 등 온갖 생명과 햇빛과 흙과 물이 어우러져 순환하는 생태계가 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생태질서를 계속 지킬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지속가능한 농업체제로 혁신하는 것에 있다. 많은 반론이 예상되나, 박정희 정권은 필자의 선친이 여러 번 농약에 중독이 될 정도로 농약과 비료를 과다 투입하게 하고, 정부가 보급하는 종자를 강요하고, 유기농업을 하는 농업인을 빨갱이라고 매도하고, 농업인이 시장에 적응하고 대응하는 농업경제조직인 농협을 농정의 파이프로 전락시켰다. 한국 농업의 위기는 결코 WTO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단지 미국의 사정이 급해지면서 이러한 동원형 농업체제의 사망 시간이 앞당겨졌을 뿐이다.
지속가능한 농업은 자연자원을 보전하면서 지금과 미래 세대의 수요를 충족해주는 농업이다. 이는 안전한 먹을거리를 보장하고, 농업인의 경제생활과 지역사회를 유지하는 농업이다. 흙과 물과 공기와 생물다양성은 농업의 토대이다. 동원형 농업체제만이 자연자원을 해친 것은 아니다. 도시자본과 시민이 버리는 쓰레기와 폐기물과 땅 투기는 농업의 지속성을 위협하고 있다.
정부의 농지법 개정안은 철회되어야 한다. 지속가능한 농업에서는 농업인과 지역 시민사회의 연계는 필수적 요소이다. 이 점에서 지금의 지역 친환경 농산물 학교 급식 운동은 큰 의미가 있다. 지역에서 난 친환경 농산물을 학교 급식에 우선 공급하는 공급체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학교 급식 현장에서 신선한 조리와 먹을거리 교육이 바르게 되도록 직영체제를 운영하고, 먹을거리 교육과 학교 급식 조리사의 직무를 학교급식법에 법제화하는 것이 긴요하다. 그리고 농업인들이 지역과 중앙에서 친환경농산물시장에 대한 대응능력과 정책 참여 능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친환경농업육성법을 만든 지 8년이 되도록 친환경 농업단체는 아직 법제화되지 않았다.
유시민 의원은 홈페이지에서 쌀 수매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더 시장 친화적이라면서 "경쟁력이 있는 농가는 가격을 시장에 맡겨도 알아서 살아나간다"고 하였다.(2004년 6월 12일 아침편지) 그러나 부지런한 독자라면 미국의 농장주들은 1933년부터 70년이 넘도록 담보농산물가격(loan rate)이라는 최저가격제도의 혜택을 농산품신용공사에서 받고 있는 것과, 미국 의회가 2007년까지 적용할 담보 농산물 가격을 쌀, 밀, 옥수수 등 작물별로 일일이 정해 놓은 2002년 농업법 제1202(b)조를 쉽게 검색할 수 있을 것이다.(www.fsa.usda.gov/ccc, www.usda.gov/farmbill) 그리고 미국 농장주들이 2005년에 정부로부터 받을 직접지불금(direct payments) 전망치 2백41억 달러가 농장주들 순 소득 총액 예측치인 6백44억 달러의 37.4%에 해당한다는 것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www.ers.usda.gov)
미국이 1970년대 초반에 공장형 농업으로 구조조정을 완성한 것은 1933년부터 지금까지 70년이 넘게 유지되고 있는 농업조정법 체제의 산물이다. "가격을 시장에 맡겨 알아서 살아 나가는" 농업인은 선진국에는 없다. 동원형 농업체제를 극복하는 것은 미국 농업에 백기 투항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경작 면적을 늘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한국의 자유주의가 그 내용을 보다 더 풍부히 갖추어 농업 혁신에 이바지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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