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환경과 농업을 살리는 건강한 농지제도 개편을 위한 연석회의(농지제도 연석회의)'와 공동으로 최근 농지법 개정을 둘러싼 찬반 논란을 통해 촉발된 우리나라 농업정책의 바람직한 방향을 공론화하는 기획을 마련한다.
이번에는 농업문제에 오랫동안 천착해온 충남대 박진도 교수(경제학)가 글을 보내왔다. 박 교수는 우리 농업·농민이 특히 정부의 잘못된 농업정책으로 인해 계속 몰락해온 현실을 지적하고, 도대체 지금 왜 농업·농민을 위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지를 꼼꼼히 지적하고 있다. 그는 '21세기 식량 안보', '생태·환경의 관점', '농업이 갖는 사회·문화적 효과'를 염두에 둘 때 농업을 살리는 것이 바로 '도농 상생의 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편집자.
***농업·농촌의 위기와 상생의 길**
우리나라는 2004년 2월 칠레와 최초로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였다. 한·칠레 FTA가 체결되는 과정은 우리 사회에서 농업이 오늘날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정부가 칠레를 FTA의 첫 상대로 잡은 것은 다른 나라들과 FTA 체결에 대비해 연습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고 한다. 칠레와는 경제교역 규모도 커지 않고, 지구의 남반부와 북반부에 위치해 기후가 반대라 농업에 대한 영향도 적을 것으로 생각했다. 동시에 칠레는 이미 다른 나라와 FTA를 많이 체결하였기 때문에 FTA에 대한 노하우를 배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막상 논의를 시작해보니 우리의 실익은 작고 농업부문에 대한 피해가 예상보다 크다는 것이 밝혀졌다. 농민들은 한·칠레 FTA의 국회비준을 저지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수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농민의 이익과 이른바 국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띠게 되면서, 농민과 농업은 개방화, 세계화 시대의 경제성장의 걸림돌로 인식되고 '왕따'를 당하는 결과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수출주도형의 불균형 공업화를 통해 빠른 속도로 성장해왔다. 이 과정에서 농업은 고전적 경제발전론이 가르치듯이 경제성장을 위한 기여자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공업화에 필요한 값싼 식량을 공급하고, 공산품에 대한 시장을 제공하였다. 무엇보다도 농촌부문이 공급한 양질의 저임금 노동력은 우리나라 공업화의 최대의 원동력이었다. 공업화를 통한 고도성장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급격한 구조전환을 겪었다. 2003년 현재 우리나라 농업의 비중은 국민총생산의 3.5%, 취업자의 8.5%이고, 전체인구에서 점하는 농가인구의 비중은 7.4%이다. 오늘날 선진국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생산과 취업자에서 1~3%인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 농업의 상대적 비중이 지속적으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농업의 비중이 감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이른바 Petty의 법칙).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는 농업·농촌부문이 급격한 구조전환 과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농업은 해체되고, 농촌사회가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농업의 위상과 농촌 지역사회의 공동화**
한국경제에서 농업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3년 말 현재 국민총생산의 3.5%, 총취업자의 8.5%, 전체인구의 7.4%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전국 평균 수치이고, 수도권을 비롯한 광역대도시의 높은 집중도를 반영한 것일 뿐, 농촌을 배후로 한 시군 지역에서 지니는 농업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 농촌지역경제의 구성을 보면, 기간산업인 농업을 중심으로 농업 및 농촌주민 관련 공공 서비스, 그리고 도소매·음식숙박업 등으로 되어 있다. 거의 대부분의 농촌지역에서는 제조업을 비롯한 2차 산업은 무시할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농촌지역경제는 한 마디로 농업경제의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 우리나라의 행정통계에서는 흔히 읍면 인구를 농촌인구, 동 인구를 도시인구로 구분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농촌인구의 비중은 1980년 42.7%에서 2002년에 20.5%로 하락하였다. 이것은 농촌지역의 기간산업인 농업이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농업의 지역경제에서 갖는 의미는 순수농촌지역이라 할 수 있는 읍면(혹은 군) 지역만이 아니다. 행정통계상 동(혹은 시)으로 분류되는 많은 지역에서도 농업은 기간산업의 지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UR 협정 타결 이후 농가경제 상황은 급속히 나빠지고 있다. 1980년대 이후의 실질농업소득의 연평균 변화율을 보면, 1980~85년에 7.5%, 1985~90년에 5.6%, 1990~95년에 4.8%로 점차 낮아지기는 하였지만 플러스 증가율을 유지하였으나, 1995~2000년에는 -4.1%, 2000~2003년에는 -5.5%로 실질농업소득이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이것은 농업소득률(농업소득/농업조수입)이 1980년 74.9%에서 1995년에 65.4%로 하락하고 2003년에는 44.8%로 급락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농업소득에 농외소득을 포함한 실질농가소득도 1995년의 2,780만 원에서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2000년 2,307만 원, 2003년에는 2,002만 원으로 감소하였다. 반면에 실질농가부채는 1995년 1169만 원에서 2000년 2,021만 원, 2003년에 2,321만 원으로 급증하고 있다.
농가경제의 위기는 도시와의 격차 확대로 심화되고 있다.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에 대한 농가소득의 상대비를 보면, 1995년의 95.1%에서 2000년에는 80.6%, 2003년에는 76.2%로 낮아졌다. 농가와 도시근로자 가구의 가구구성의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1ha 이상 농가만 도시근로자가구와 비교해 보면, 90년대 중반까지는 실질소득에서 농가가 우위에 있었던 반면, 2000년부터 격차가 발생하여 2003년에는 도시가구소득의 80.4%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농촌내부에서도 소득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예를 들면, 농가소득 하위 20%의 평균소득에 대한 상위 20%의 배율을 보면, 1998년의 7.2배에서 2003년에는 12배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되어 농촌 지역의 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고 농촌지역의 공동화가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인구 2천 명 미만의 읍면의 수가 1990년에 30개에서 2000년에 170개로 늘어나고, 2010년에는 470개로 급증할 전망이다. 이처럼 농촌인구가 급감하게 되면 농촌지역 유지를 위한 최소인구의 부족으로 인한 이농의 악순환이 되풀이 되게 된다.
***21세기, 위협받는 식량안보**
공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식량 재배면적의 감소와 물 부족, 기상이변 등으로 인해 식량공급은 정체되고 있는 반면에 인구증가와 소득향상으로 인한 식량수요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곡물소비 증가는 국제적 수급 불안정을 증가시키고 있다. 이런 이유로 국제농업전문가들은 세계적 식량위기의 도래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세계 식량위기의 가능성은 식량공급량의 절대적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농산물수출은 소수 국가가 장악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이른바 곡물 메이저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에게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식량위기와 식량의 무기화에 대응하여 국내에 일정한 식량생산력을 유지하는 것은 농업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식량자급률은 2004년 현재 25.3%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식량자급률이 1985년의 48.4%에서 1995년 29.1%, 2003년 26.9% 등으로 끝없이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날 비만을 걱정하고 다이어트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식량안보의 중요성이 잊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앞으로도 더욱 하락하여 식량안보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할 전망이다. 우선 그 동안 식량자급률을 일정한 수준에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쌀이 100% 자급되었기 때문인데, WTO 협상 결과 쌀 의무수입량이 2014년에는 현재의 두 배 수준인 41만 톤으로 증가하게 됨에 따라 쌀의 자급률이 90% 전후 수준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WTO DDA 협상과 FTA의 진전 등으로 농산물시장 개방 압력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지만, 현재와 같은 국내 농산물의 가격경쟁력 조건 하에서 국내 농업생산의 위축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농지면적과 경지이용률이 급격히 감소하고, 농업노동력의 고령화 등으로 인해 국내의 농업 생산기반도 점차 약화되고 있다.
***국토 환경의 파괴와 농업의 사회문화 기능의 쇠퇴**
농업은 홍수조절효과, 수자원 함양, 토양유실 방지 및 토양 보전, 대기정화, 수질정화, 산소공급 등 국토 및 환경보전에 기여하는 가치가 매우 크다. 이것을 경제적으로 환산해보면, 홍수조절 효과 13조 원, 수자원 함양 및 수질정화 4조 원, 대기정화 및 기후순화 5조원, 토양보전 및 오염원 소화 1조 원, 경관적 가치 1조 원 등 논밭의 환경적 가치는 연간 약 24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이는 농업의 연간 부가가치 생산액과 맞먹는 값이다.
또한 농업은 야생동물들에게 서식지를 제공하여 생물자원을 보호하고 생태계를 보전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유전자원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우리의 현실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논은 141종의 조류와 28종의 포유동물, 24종의 양서류 및 파충류의 서식지이다. 논밭이 수행하고 있는 환경적 기능은 농업생산이 유지될 때 수행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농업생산의 위기는 국토 및 환경 보전 기능의 위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농업은 환경에 대해 부의 효과도 준다. 화학비료와 농약의 과다사용으로 인한 토양의 산성화, 토양 및 수질오염, 자연생태계 파괴 등이 발생하고, 집약적 축산은 가축분뇨 및 오폐수로 인한 수질오염, 악취와 공기오염 등을 가져오고, 논 농업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는 온실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따라서 농업생산을 유지하되, 그것을 환경친화적으로 전환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또한 농업·농촌은 농촌거주자에게는 지역사회의 안정과 균형, 지역정체성의 확립, 농촌문화의 보전, 전통문화의 계승 등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도시거주자에 대해서는 보건과 휴양의 공간, 정서적 안정과 기능 회복, 자연과 전통문화의 체험 등을 제공한다. 특히 최근에는 농촌고유의 생태적, 문화적, 경제적 가치를 지닌 자연환경, 역사문화, 전통지식과 생산품, 공동체 등 유무형 자원을 기반으로 한 농촌 어메니티(rural amenity)의 중요성이 매우 커지고 있다. 특히 농업·농촌은 사람들의 정서함양뿐 아니라, 자연과 전통문화의 체험, 생명 및 생태계의 존중, 인간성 회복과 공동체적 의식을 고양시키는 인간교육의 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경제성장 과정에서 근대화와 개발을 앞세워 농업·농촌이 지니는 생태적 문화적 가치를 파괴해왔으며, 도시 흉내를 낸 농촌개발로 인해 농촌의 어메니티가 훼손되었다.
***농업·농촌의 회생과 도농상생의 길**
우리나라 국민의 농업·농촌에 대한 감정은 이중적이다. 우선 명절이면 민족 대이동이 일어날 정도로 뿌리 깊은 농촌 연고, 공업화가 농업·농촌의 희생 위에서 이룩되었다는 일종의 보상 심리, 도시와 농촌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격차구조에 대한 우려 등이 국민들 사이에 농업·농촌에 대한 보호와 지원을 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농업과 농촌은 전근대적인 것이고 그 비중이 빨리 작아질수록 우리사회가 근대화되는 것이고,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농업과 농촌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근대화론 혹은 성장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적 감정 구조는 최근 크게 흔들리고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우리나라 농업과 농촌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더구나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농촌지역을 배후에 둔 지방 국립대학 학생들이란 점에서 절망감조차 느낄 때가 있다. 그리고 국민들 가운데는 "그 동안 농업부문에 엄청난 투자를 했는데 달라진 것이 뭐냐, 우리 농업은 가망이 없는 것 아니냐"는 불신을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농업·농촌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단순히 값싼 농산물의 공급이 아니라, 안전하고 건강한 식품의 공급, 국토 및 환경보전이라는 공익적 기능의 유지·증진, 농촌 어메니티(rural amenity)와 아름다운 경관, 전통과 문화가 살아 있는 풍요한 농촌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요약하면, 그 동안 농업·농촌을 지탱해온 일종의 농본주의적 정서는 쇠퇴하고, 농업·농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희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농업·농촌의 회생을 위해서는 국민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즉, 농업·농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기능 혹은 가치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농업에 대한 투자 덕분에 사시사철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아스팔트의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 우리의 정서를 함양할 수 있는 것은 농촌경관이 유지되기 때문이요, 최근 각광을 받는 농촌관광은 도시민을 위한 휴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반면에 농업·농촌의 붕괴는 농민뿐 아니라 국민의 삶의 질을 악화시키고, 농촌지역뿐 아니라 중소도시의 몰락을 동반하면서 대도시의 인구집중에 따른 교통문제, 환경문제, 주거문제, 실업문제, 교육문제의 고통을 한층 더 가중시킨다. 더 이상 농업·농촌이 망가져 회복 불능 상황에 빠지기 전에, 농업·농촌이 지니는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농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란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것은 동시에 우리가 근대화론에 입각한 성장제일주의를 극복하고, 물질 중심의 생활에서 벗어나 삶의 질을 중시하는 인간과 인간의 공생,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지향하는 새로운 공동체 사회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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