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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 그릇 안에 쏟아진 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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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 그릇 안에 쏟아진 별빛"

김민웅의 세상읽기 〈214〉

근대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우리의 살림살이도 변했지만, 그 정신사의 충격은 더 하였습니다.

어제까지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졸지에 구식이 되었고, 미신(迷信)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생각과 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미개한 일이었고 문명의 사각지대가 되는 것을 자초하는 선택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도시는 반듯해야 했습니다. 양장이 한복보다 우월한 복장이 되었고 외국어 표현방식이 더 세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이었습니다. 우리 것은 점차 밀려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해갔습니다.

이른바 "근대적 열등감"이 우리 사회에 깊고 깊게 스며든 것이었습니다. 식민주의적 사고는 이렇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과 함께 우리의 의식 밑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밀교(密敎)처럼 은밀하게 포교가 되던 기독교가 서양문물의 힘과 함께 득세해나가면서 우리의 정신적 기초를 이루고 있던 종교적 양상도 변화를 겪게 됩니다. 많은 것들이 미개한 종족의 종교적 습성으로 매도되어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문명발전의 길을 가로막는 풍속으로 지목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유교와 불교라는 제도종교의 위력에 눌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민간 신앙의 위상은 전락의 운명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민중들의 아픔과 슬픔을 담아내고 있던 민간 신앙의 그릇은 쪽박 깨지듯 깨져나가고 말았습니다. 길에 뒹구는 쪽박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걸 주어 들고 있으면 구걸을 하는 거렁뱅이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종교의 분류도 고등종교와 저급 종교로 나뉘면서, 제도화된 종교의 위상은 다른 것을 지배해나갔습니다. 신학적 논리가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미신이었고, 그것은 버려야 할 목록 속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논리가 타당했던 것일까요? 그로써 우리는 행복해지고 인간과 자연의 화합을 보다 수준 높게 도모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일까요?

오래 전, 이 나라의 어머니들은 모두가 잠든 한 밤중에 맑은 물 한 사발을 떠 놓고 달빛 교교한 시간, 나무 앞에서 빌고 빌었습니다. 자식과 남편을 위해, 가족의 미래를 위해, 그 기원의 절박함은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자 이걸 미신이라고 질타했습니다. 그까짓 물 한 그릇이 무얼 해줄 수 있느냐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그 물 한 그릇 속에는 별빛이 쏟아져 있고 달빛이 담겨 있으며 바람 소리가 그 안에 있습니다. 하늘의 맑은 공기가 품겨져 있고 땅 속에 스며 나무뿌리를 적신 세월이 있고 바위틈을 지나 강으로 흘러 흘러 대지의 생명을 키운 힘이 있습니다. 생명의 원초적 아름다움을 위해 영롱한 이슬이 되어본 기억도 있는 것입니다.

그 맑은 물 하나에 담긴 우주의 능력, 그 배후의 원초적 신비, 그것이 이 나라의 오래 전 어머니들이 머리를 숙이고 빌고 빌었던 대상의 정체입니다. 그 경외감의 근원입니다.

누가 자신의 힘으로 그 물 한 그릇인들 만들 수 있겠습니까? 목마른 이 시대에, 그 맑디맑고 생명의 기운이 녹아 있는 물 한 그릇이 되어 이 세상의 갈증을 채워줄 수 있을까요?

〈물의 날〉을 맞이하면서, 그 물 한 잔의 감사가 이 세상의 온갖 오만과 잘난 척과 야만, 그리고 갈증을 이겨내는 힘이 되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 이 글은 〈프레시안〉의 편집위원인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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