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을 특정 대학 출신 연구자들이 나눠먹기식으로 독식해온 정황이 포착돼 논란이 일고 있다. 연간 2~3억의 지원비를 최장 5년까지 실험실 단위로 지급하는 과학기술부의 '국가 지정 연구실(NRL)' 사업을 서울대 출신 연구자들이 심사를 맡아 같은 대학 출신 연구자들에게 나눠줬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서울대 학맥, 국가 R&D 사업 좌지우지하는 '마피아'"**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의장 주대환)는 19일 "과기부의 NRL 사업의 2002, 2003년도 연구 과제 선정에 대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서울대 학부 출신 연구자의 비율이 과반수를 차지한 것으로 드러나 학맥에 의한 공정성 훼손 정황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민노당은 "그 동안 국가 R&D 사업에서 특정 인맥과 학맥 등의 네트워크로 구성된 이른바 '마피아'들이 연구 과제 선정과 지원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과학기술자들 사이에서는 상식이었다"며 "이번 조사는 서울대 학맥이 그 네트워크의 한 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NRL 사업은 1999년부터 시작돼 2003년까지 총 5백39개의 국가 지정 연구실에 연구비가 지원돼 온 대형 프로젝트이다. 특히 이 사업은 각 1인의 연구자가 책임을 지는 연구실 단위로 수년간 지속적으로 연구비를 지원하는 특징 때문에 지금까지 진행됐던 국가 주도의 R&D 사업 중 연구 현장의 여건을 가장 고려한 지원 사업으로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사업 초기부터 특정 인맥-학맥-계열에 의한 편파적인 심사와 선정에 대한 논란이 계속 있어왔다. 이 과정에서 제기된 공정성 훼손 의혹도 탈락자의 불만 수준에서 마무리돼 현장 연구자들의 좌절감은 더욱더 클 수밖에 없었다.
***최종 선정자-평가위원-운영·책임까지, 서울대 출신들 넘쳐**
민노당 조사결과에 따르면, 최종 선정자, 평가위원, 최근까지 이 사업의 책임을 운영·책임을 맡아왔던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전문위원의 구성을 살펴보면 서울대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15개 분야에서 총 55명을 선정한 2002년도의 경우에는 30명(54.5%)이 서울대 학부 출신 연구자였다. 특히 환경 분야는 5명의 최종 선정자 전원(100%), 생명보건1 분야는 5명의 최종 선정자 중 4명(80%)이 서울대 출신으로 확인됐다.
12개 분야에서 총 54명을 선정한 2003년도의 경우에도 이 비율은 바뀌지 않는다. 최종 선정자 54명 중 서울대 출신은 27명으로 50%에 해당됐으며, 생명보건2 분야는 8명 중에서 7명(87.5%), 기계1 분야는 4명 중 3명(75%), 정보전자2 분야는 3명중 2명(66.7%)이 서울대 출신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서울대 출신 편중 현상은 연구 과제 평가와 선정을 담당한 평가위원회의 구성을 살펴보면 더욱더 심하다. 15개 분야 총 1백41명으로 구성된 2002년도 평가위원회를 살펴보면 서울대 출신은 65명으로 전체의 46.1%나 된다. 15개 소위원회의 구성에서는 이 비율이 더욱더 높아져 평균 50.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생명보건2 분야는 10명 중 8명(80%), 융합4 분야는 10명 중 6명(60%)이 서울대 출신으로 확인됐으며, 모든 소위원회에 2명 이상의 서울대 출신이 포함돼 있었다.
12개 분야 총 1백20명으로 구성된 2003년도 평가위원회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대 출신은 61명으로 전체의 50.8%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위원회 구성 비율도 서울대 출신이 평균 46.1%나 됐다. 특히 생명보건2 분야는 9명 중 7명(77.8%), 소재1 분야는 11명 중 8명(72.7%), 기계2 분야는 10명 중 7명(70.0%)이 서울대 출신으로 확인됐다.
각 분야 평가위원 후보를 추천하는 등 평가위원회 구성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KISTEP 전문위원의 구성은 더욱더 심하다. 1999년부터 2005년 현재까지 7개 분야 총 18명의 전문위원 중 서울대 출신은 14명으로 무려 77.7%나 된다. 연세대와 고려대 출신이 가각 2명씩 근무하거나 근무 중인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 비율이다.
***심사위원-선정자 모두 같은 과 선·후배, 선·후배끼리 밀어주고 당겨줘**
그렇다면 이렇게 서울대 출신이 곳곳에 많은 것이 정상적일까? 현재까지 파악된 전체 이공계 연구자 중에서 서울대 출신이 3분의 1도 못 미치는 현실을 고려하면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실제로 학술진흥재단과 과학재단에 등록된 이공계 부문 연구자 3만7천6백75명 중에서 서울대 출신은 1만5백58명으로 28%에 불과하다. 실제 연구자의 3분의 1도 못 미치는 서울대 출신이 현장 연구자들이 가장 선망하는 국가 R&D 사업의 3분의 2 이상을 독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노당 정책위는 이같은 서울대 학맥에 의한 공정성 훼손 가능성이 두드러지는 구체적 사례까지 집어냈다.
2002년 소재 분야의 평가위원 10명 중 서울대 출신은 6명이나 됐는데 그 중 4명은 금속공학과 출신이었다. 5명의 2차 심사 대상자 중 서울대 출신은 3명이나 됐으며, 최종 선정자 3명 중에는 서울대 금속공학과 출신이 1명 포함돼 있다. 이런 상황은 2003년에 더 심화된다. 소재1 분야의 평가위원 11명 중 서울대 출신은 8명이나 됐고, 역시 금속공학과 출신이 3명이나 포함됐다. 10명의 2차 심사 대상자 중 서울대 출신은 4명이었으며, 최종 선정자 6명 중에서 3명이 서울대 금속공학과 출신이었다. 같은 과 선·후배들끼리 당겨주고, 밀어주기를 한 것이다.
다른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2002년도 생명보건1 분야의 평가위원 10명 중 서울대 출신은 3명으로 그 중 약학과/제약학과 출신이 2명 포함돼 있다. 13명의 2차 심사 대상자 중 서울대 출신은 8명이었으며, 최종 선정자 8명 중에는 서울대 약학과 출신이 3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2002년도 환경 분야의 경우에는 평가위원 9명 중 서울대 출신이 4명이었는데, 9명의 2차 심사 대상자 전원과 최종 선정자 5명이 서울대 출신이었다.
***"서울대 학맥은 '마피아' 네트워크의 일부 구성 요소일 뿐"**
이번 조사결과를 접한 현장의 연구자들은 결과에 놀라움을 표시하면서도 "서울대 학맥에 의한 네트워크는 국가 R&D 사업을 좌지우지하는 '마피아'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번 연구에 처음부터 동참한 서울 소재 대학의 한 연구자는 "예상은 했지만 조사 결과 나타난 서울대 학맥의 영향력에 새삼 놀랐다"며 "국가 R&D 사업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현재 소속 기관만을 고려한 평가위원의 구성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하지만 실제로 국가 R&D 사업을 좌지우지하는 네트워크는 학맥으로만 구성돼 있지 않고 학회․연구회 등에서 맺게 되는 인맥 등도 큰 영향을 준다"고 지적했다.
대전의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한 연구자 역시 "국가 R&D 사업 선정 과정과 서울대 학맥의 연관성을 보여준 것에는 큰 의미가 있다"며 "단 과학기술자의 경우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하면서 맺게 된 네트워크가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출신 학부가 유일한 변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NRL 책임자의 경우 대부분 외국에서 석·박사를 하고 온 사람이 상당수라는 것을 고려하면 학부 학맥은 무시 못 할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민노당 정책위의 한재각 과학기술 담당 연구원도 "이번 조사 연구는 과학기술 R&D 사업 선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다양한 변수 중에서 출신 학부에만 초점을 맞춰 본 것"이라며 "네트워크 전체를 검토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일부 지적을 수긍했다.
그는 "이번 조사 연구를 통해 학맥에 의한 국가 R&D 사업 선정 과정의 공정성 훼손 가능성이 매우 높음이 드러났다"며 "현행 국가 R&D 사업 선정 과정의 평가위원, 2차 선정자, 최종 선정자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연구 과제 선정 평가 이후 투명하게 공개된다면 연구자 동료에 대한 사후적 감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프레시안은 NRL 사업을 비롯한 각종 국가 R&D 사업 선정 과정의 공정성 훼손 사례를 현장의 과학기술자들로부터 제보를 받습니다. 제보하신 분들의 신분은 철저하게 보장해 드립니다. tyio@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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