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비정규직법안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는 이유로 정부와 재계로부터 질타를 당하고 있다. 재계야 이해관계 당사자의 한 축인 만큼 그 민감한 반응을 이해 못할 바 아니나, '(인권위가 비정규직 문제에서) 무식하니 용감하다'는 식으로 발언한 노동부 장관의 반응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크다.
***사회경제적 권리 옹호, 인권위의 기본 임무**
인권은 세 가지 중심 축으로 구성된다. 정치권, 경제권, 사회권이 그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정치적 권리, 즉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뤄진 사회에서는 내용적 민주주의, 즉 사회경제적 권리의 증진이 주요한 과제로 떠오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민주화 이행기에 인권위의 임무는 정치권의 확립에서 경제권과 사회권의 옹호로 확대되어야 한다.
지금은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어 있고, 관련 법안의 국회 처리가 노사간에는 물론 정당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년 전부터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다뤄온 인권위가 정치․사회적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비정규직법안에 대해 기준을 제시하고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인권위가 '월권'을 했다는 노동부장관의 비판은 정부의 비정규직법안이 정부안에서조차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못한 졸속 법안임을 반증하는데, 이는 노사정위원회가 비정규법안 논의 과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노동부의 독선과 오만이 혼란 초래**
노동부가 법에서 규정한 인권위와 노사정위의 위상과 역할을 충분히 인정하여 비정규직법안의 인권 측면은 인권위에서, 사회적 대화 측면은 노사정위에서 검토 의견을 받았다면 법안 처리와 관련한 정치적 논란과 사회적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무부처고, 우리만 전문가'라는 노동부의 오만과 독선이 현재의 혼란을 초래한 것은 아닌 지 노동부의 관료들은 곰곰이 반성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비정규직 문제라는 현 시기 최대의 사회적 화두를 내팽개친 정부여당의 무책임과 무능력도 비판받아야 함은 물론이다.
외국의 인권위는 행정부와 입법부를 향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며, 이를 법제도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호주의 인권기회평등위원회(HREOC)는 위원회의 임무와 관련하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권한을 가지며, 해당 사안에 대해 어느 때나 주무장관에게 보고하고 주무장관의 처리를 요구할 권한을 가진다.
***외국의 인권위는 정부에 권고 권한 가져**
캐나다인권위(CHRC)는 1987년 의회에 공정임금 관련 법조항 개정을 제안한 바 있으며, 수 차례에 걸쳐 공정임금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비판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해왔다. 그 결과 캐나다 연방정부의 법무부와 노동부는 중립적인 전문가를 반장으로 하는 공정임금 대책반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캐나다인권위는 임금차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 방향을 마련한 특별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해 놓고 있다.
뉴질랜드인권위(HRC)도 고용 차별로 인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조정에 나설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가지며, 인권위 차원의 분쟁 해결이 불가능할 경우 해당 사안을 법원으로 보낼 수 있다.
인권위 설치를 통해 노동현장의 차별 문제를 처리하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와 달리 미국과 영국은 각각 고용평등위원회(EEOC)와 기회평등위원회(EOC)를 인권위와는 별도로 두고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 인권위는 정치적으로 핍박받거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소수자들만을 위한 기관으로 인식되어 왔다. 정부 부처들 역시 인권위를 '정치적 악세사리'로 치부해온 게 사실이다. 물론 여성, 청소년, 외국인노동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를 위한 인권위의 활동도 중요하다. 하지만, 인권위의 활동이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인권위, 국민의 보편적 권리 기구로 발전해야**
인권은 보편적인 것이고, 국민 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경제적 권리는 인권 문제의 핵심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국민 다수의 문제이고, 이것의 해결 없이는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의 문제 역시 해결될 수 없다. 고용 형태의 측면에서 여성 노동자의 70%, 근로 청소년과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장애인 노동자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다.
영화 '마라톤'의 실제 주인공이 월급 70만원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음은 인권위의 나아갈 방향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 크다.
비정규직법안을 둘러싼 이번 논란을 계기로 인권위가 인권을 동정이나 시혜 차원에서 접근하는 협소한 인식에서 벗어나 사회경제권을 포함한 국민의 보편적 권리를 증진하는 명실상부한 국가 인권 기구로 발전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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