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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한국전때 원폭 34개 사용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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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맥아더, 한국전때 원폭 34개 사용 요청"

[화제의 신간] 커밍스, "북핵은 부시가 만들어준 폭탄"

<김정일 코드>(따뜻한손 간)는 한반도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미 노스웨스턴대 정치학 교수의 최초의 본격적인 북한 연구서다.

***커밍스, "북핵은 부시가 만들어준 무기"**

한반도 분단체제의 구축은 한반도에 대한 그의 원초적 관심의 출발선이었다. 그 산물이 그를 '한국 현대사에 가장 정통한 외국학자'로 평가받게 한 <한국전쟁의 기원>(1991년)과 <한국현대사>(1997년)라면, <김정일 코드>는 한국 현대사의 키워드가 '자주'와 '통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공감하게 된 커밍스 교수가 필연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북한 연구의 집대성이라 하겠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분단체제 구축.한국전쟁 등으로 인해 한국사에 대한 관심을 남한에서 북한으로까지 확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조지 W.부시 대통령이 지난 2001년 취임 직후 북한을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하면서 가중된 북핵 위기의 본질을 그의 표현을 빌면 '선과 악을 넘어' 객관적으로 파헤치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나아가 60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미국과 북한의 '톰과 제리식 게임'을 명료하게 분석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우선 커밍스 교수는 "진정한 악이란-부시가 믿고 있듯이-선의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도덕적 고귀함 자체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서 일방적인 '선악 구도'를 거부했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는, 지난 세기에 나타난 어느 한 정권을 그대로 복제한 경찰국가가 저지른 평범한 사례보다도 '사악한' 면이 덜했다"면서 "'악의 축'의 다른 두 국가인 이란과 북한은, 도덕적.윤리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와 자신들을 구분해주는 것으로 상당히 진지하게 믿고 있는 원칙들을 존립근거로 삼고 있다"고 '악의 축'이라는 부시의 일방적 선언을 일축했다.

커밍스 교수는 "오늘날 북한은 또다시 스스로의 생존이 경각에 달렸다고 믿고 있다"면서 "북한의 판단이 그른지 모르지만, 현재의 변덕스러운 국제관계에서 그 정도로 중차대한 문제를 놓고 북한이 위험을 무릅쓸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지적한다.

그는 "북한은 국가주권을 생명 그 자체와 같이 소중하게 여긴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야만적인 일본의 식민지로 수십 년을 수탈당한 뒤 북한을 건립한 이래 국가적 주제가 되어왔다"면서 "1950년 미국이 엄청난 인적 희생을 무릅쓰고 북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거대한 작전을 시도했다가 중국 때문에 실패하게 된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고 덧붙였다.

***맥아더, 한국전쟁 발발 2주만에 원폭 사용 신청**

그는 "미국은 타국의 주권에 대한 존중 대신 암살.제거.정권교체를 앞세웠다"며 "북한에 대한 미국의 마지막 침공은 철저히 무장한 병영국가를 낳았다. 그리고 50년 뒤 그 국가는 여전히 미국과 더불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해, 오늘날 병영국가 북한의 원인 제공자가 미국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을 거대한 육군과 성인 인구의 상당부분으로 구성된 예비병력, 그리고 1만5천개를 상회하는 안보관련 지하시설을 갖춘 '병영국가'로 규정한다. 2천3백만 인구 중 1백만영이 군에서 복무하고 6백만 명이 예비군이며, 거의 모든 성인 남녀가 군복무 경험이 있다. 1978년 CIA는 17세와 49세 사이 남성의 12%가 정규군이라고 추정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북한은 왜 이같은 병영국가가 됐나"라고 질문을 던진 그는 "무엇보다 한국 전쟁 동안 대학살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 중 '모든 폭탄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붙은 무게 2만1천5백파운드짜리 '모압'(MoAB) 폭탄이 등장해 세계를 놀라게했지만, 이미 한국전쟁 당시 비슷한 성능의 폭탄이 사용됐다. 미국은 B-29 폭격기를 동원해 북한 강계지역에 '타존 폭탄'을 투하했다. 이전에는 탑재된 적이 없었던 1만2천 파운드(6천kg)급의 엄청난 신형(공대지 미사일) 폭탄이었다.

그러나 '타존 폭탄'은 궁극적인 화력인 원자폭탄에 비하면 폭죽에 불과했다. 1950년 7월9일 전쟁이 시작된지 겨우 2주쯤 되던 날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에게 원자폭탄 사용을 제안했다. 그러나 합참은 원폭사용을 불허했다. 원폭을 써야할 만큼 거대한 표적도 없으며, 히로시마에 이미 원폭을 투하했으므로 세계 여론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0년 10월과 11월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투입되면서 이러한 방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4백50개 이상의 원자폭탄을 소유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25개를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러시아의 원폭 대응 우려는 거의 없었다.

12월9일 맥아더는 한국 전역에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는 사령관 재량권을 희망했다. 크리스마스 전날에는 "제거 목표물 리스트"를 제시하며 26개의 원자폭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그는 또 '침략군'에 투하할 원폭 4개와 적 공군의 핵심시설 밀집지역 파괴용 원폭 4개를 추가로 요구했다.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했던 바로 그 무렵인 1951년 4월 초는 미국이 원자폭탄 사용에 가장 근접했던 시점이었다. 이 일과 관련된 일화는 대부분 아직도 기밀에 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트루먼이 단순히 맥아더의 반복적인 불복종 때문에 그를 해임한 것은 아니었다. 핵폭탄을 사용해야 할 경우에 대비해, 그는 맥아더보다 더 신뢰할 만한 지휘관이 필요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자신의 원자폭탄 정책과 맞바꾼 것이다.

1951년 4월4일 드디어 원폭 사용허가가 떨어진다. 그러나 '맥아더 해임에 따른 혼란' 때문에 결국 트루먼의 명령은 하달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 대통령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았을까? 이유는 두 가지였다. 트루먼은 이 절박한 상황을 맥아더의 해임에 합참이 동의하도록 유도하는 데 활용했다.

맥아더 해임은 4월11일 발표되었다. 또 하나는 중국인들이 전쟁을 심각하게 확대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원자폭탄은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1953년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는 움직임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원자폭탄이 실제로 투하되지는 않았지만 원폭투하 실험은 실제로 실행됐다. '허드슨 만' 작전이라는 '대량살상무기 프로젝트'에 따라 1951년 9월과 10월 B-29폭격기들이 북한 상공으로 단독 비행해 핵탄두를 제거한 원자폭탄들과 대단히 육중한 TNT폭탄들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러한 폭탄들은 유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어마어마한 수의 적군을 적시에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는 순전히 기술적 이유였다.

***"북한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표적이었다"**

미국은 대규모 폭격으로 북한 전역이 완전 초토화된 것뿐 아니라 양민학살도 극심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특파된 헝가리인 티보 메라이 기자는 "한국전쟁에서 남북한 가운데 어느 쪽이 얼마나 더 잔인했든지 간에 미국인들이 저지를 파괴와 끔찍한 소행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메라이 기자는 "북한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군인들의 표적이었다. 내가 받은 인상이란, 움직이는 것이라면 모든 것에 재미삼아 총을 쏘아댔다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또 "1951년 8월 압록강을 건넜는데, "압록강에서 평양까지 완전히 쑥대밭이었다. 문자 그대로 북한에 더 이상의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커밍스 교수는 이같은 대학살이 자행된 비극에도 불구하고 "'종전' 이후 50년 이상 지난 오늘날까지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쉽게 끝이 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실질적으로 미국은 북한과 전쟁 중"이라고 지적한다. 1953년 7월27일 서명된 휴전협정으로 총성은 멎었으나, 진정한 평화는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은 세계에서 최장기간 계속되고 있는 분쟁의 하나"라면서 "물론 훨씬 장구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는 중동과 발칸 지역의 분쟁도 있지만, 지금까지 연이은 햇수로 따지자면 남한과 북한과의 충돌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갈등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그 해결이 용이하지 않은 한국전쟁이야말로, 발을 들여놓기는 쉬워도 전쟁으로부터 발을 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증명하는 가장 좋은 사례"라면서 "미국이 1945년 9월 한반도 이남 지역에 처음 진주한 이래,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이 붕괴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3만7천 병력이 여전히 그 자리에 주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반도 해법은 김대중-클린턴-김정일 합의**

그는 "더욱 두려운 것은 전쟁 재발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아주 빨리 그런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이후 이라크 전쟁이 북한의 위기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해 왔다. 그는 "이라크 점령에 따른 끊임없는 문제가 부시의 외교정책 주도권에 타격을 입혀, 북한으로서는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면서도 "부시가 대통령으로 재선됨으로써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심대한 위기가 닥치라는 점은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경고했다.

그는 "전쟁 직전 상태인 현재의 긴박한 재난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2001년 이전의 상태로 조속히 귀환하는 것"이라면서 "귀착점은 김대중.클린턴.김정일에 의해 도출된 것으로, 최초의 위기를 종결한 강제적이고 여전히 유효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진정한 안보는 핵무기의 배치와 사용에 달려있을 뿐이라고 믿는 양국의 강경파를 제외하고는, 그 결과로 혜택을 얻을 사람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면서 "북한이 결국 핵무기를 가지게 된다면, 그 무기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시가 만들어준 무기(Bush'bomb)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정권차원의 공식 선전 내용과는 달리, 21세기의 북한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1991년 갑자기 북한을 저버린 소련의 붕괴 이후 새롭게 형성된 위협적인 전략 환경에 대처하고, 북한이 처한 현재의 어려운 전환기를 극복하며, 남한이 흡수통일하지 못하도록 현지에 남아서 개입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커밍스 교수는 "미국의 대통령이 이 사실을 이해하게 돼, 위기가 종식되고 북한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면서 "그렇게 되면 미국인들은 아름다운 은둔의 왕국을 여행하여,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온화하고 고상하며 자부심 강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최근 몇 년간의 행태에 비추어 볼 때, 미국이 과연 자신들의 독자적인 경험의 폭을 초월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북한)와 공존할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서 북핵 위기가 장기화될 것을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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