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잘 만드는 것과 크게 흥행을 하는 것은 때론 정비례하지 않는다. 지난 1일 동시개봉한 두편의 영화, 곧 김지운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과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가 바로 그런 경우다. 이 두 영화는 최근 발표된 한국영화 가운데 보기 드문 수작임에도 불구하고 개봉 초반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데는 실패함으로써 이른바 300만 이상의 ‘대박 흥행’ 도전은 어렵게 됐다. <달콤한 인생> <주먹이 운다>는 지난 주말(4월1~3일)동안 각각 전국 40만과 35만 관객 정도를 모으는데 그쳤다. 하지만 올 상반기에 발표된 작품 가운데 이 두 영화는 매우 의미있는 좌표를 만들어냈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먹이 운다>와 <달콤한 인생>은 물론 매우 다른 스타일, 다른 장르, 다른 스토리 라인을 가진 작품이다. 하지만 두 작품은 기묘하게도 닮아 있다. 무엇보다 두 작가가 작품의 내면에 담아내려고 했던 주제의식이 매우 흡사하다. 자신의 삶에서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는 사람들, 특히 남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지운 류승완 두 작가는 세상과 인생에 대한 공통된 시선과 태도를 유지한다. 무엇보다 이 두 영화는 지금의 세상에 대해 슬프고 어두운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정서를 유지하고 있다. 그건 이 두 작가 모두 현재 시대에 대한 불안증후군를 앓고 있으며 그 증상이야말로 지금의 우리 젊은이들이 안고 있는 난치병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주먹이 운다>의 두 주인공 태식과 상완은 신인왕전에서 혈투를 벌인다. 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무능해진 자신의 모습 때문에 실망해 있는 아들을 위해, 또 한사람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6라운드의 사생결단에 뛰어 든다. <피도 눈물도 없이>와 <장풍 아라한 대작전> 등의 전작을 통해 일명 ‘액션 키드’로 불릴만큼 화려한 액션 씬 연출에 보기 드문 재기를 선보여 왔던 류승완 감독은 이번 만큼은 액션 장면에 기교대신 진정성을 담아내는데 주력한 것처럼 보인다. 현대 한국영화 감독 가운데 가장 커트 수가 많다고 할 만큼 류승완은 자신의 영화를 늘 짦게짧게 끊어찍어 왔던 것과는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비교적 롱 테이크를 많이 구사했다. 류승완 역시 <주먹이 운다>에 대해 ‘정직하게 찍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주먹이 운다>가 흥행과 비평에서 양가적인 위치에 서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부 관객들은 이 영화가 류승완의 기존 영화와는 다른 착지점을 보이고 있어서인지 다소 지루하다고 보고 있는 반면 또 어떤 관객은 이 영화의 절절한 이야기들이 가슴에 저벅저벅 밀고 들어온다고 얘기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주먹이 운다>가 우리사회 밑바닥 계급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노력한 영화이며 좌절한 사람들에게 희망에 대해, 고색창연하거나 교훈적이지 않게 얘기하려고 애쓴 영화라는 점이다.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서 탁월한 능력의 해결사이자 히트맨인 선우역시 더 이상 돌아갈 구석이 없어진 인물이다. 그는 보스인 강 사장의 지시를, 그 지시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결정함으로써 달콤한 인생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복수를 펼치는 선우는 강 사장에게 말한다. “사람 잘못 건드렸어요. 몸조심하세요.” 그리고 최후의 대결에서 그에게 총을 겨누며 선우는 또 이렇게 말한다. “어쩔 수 없어요. 이제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잖아요. 돌이킬 수가 없어요.” <조용한 가족>에서 <장화, 홍련>에 이르기까지 김지운 영화의 키 워드는 폭력과 기묘한 유머, 냉혹한 공포의식쯤으로 해석돼 왔다. 그러나 김지운 영화의 진짜 핵심어는 아이러니다. 사실은 별 것도 아닌 오해로 인해 벌어진, 기도 안차는 세상사를 때로는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또 때로는 어둡고 공포스러운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려왔을 뿐이다. 이번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와 강 사장이 비극적인 파국을 맞게 되는 진짜 이유는 흔한 문제, 곧 여자때문이다. 강 사장은 선우가 혹시 자신의 여자에게 끌렸을지 모른다고 오해한다. 다만 그 오해를 거창하게 조직의 논리를 거슬렸다는 식으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류승완처럼 영화를 만들수록 나날이 진보하고 있는 김지운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자신의 영화광적 재기를 곳곳에서 드러낸다. 제목인 ‘달콤한 인생’은 1960년작인 페데리코 펠리니의 동명 타이틀에서 가져 온 것으로 그럼으로써 제목과는 달리 인생은 결코 달콤하지 않다는 역설을 유효적절하게 구사해 내는 데 성공했다. 선우와 강 사장의 아이러니한 핏빛 대결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킬 빌>의 두 남녀 주인공의 목숨을 건 사랑싸움을 연상케 한다. 선우가 어두운 창고에서 가혹한 린치를 당하거나 국내의 러시아 마피아 지부(쯤으로 보이는 국적미상의 갱단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장면 등은 트란 안 홍의 <시클로>를 닮아 있다. 호텔 레스토랑 라 돌체 비타(달콤한 인생이라는 뜻)에서의 마지막 총격 씬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를 생각나게 한다.
영화를 만들면서 진보하고, 영화를 만들면서 세상사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 나간다는 점에서 김지운, 류승완 감독은 지금을 넘어 앞으로의 한국 영화계를 놓고 볼 때 반드시 눈여겨 지켜봐야 할 작가들이다. 이들 둘은 영화 자체에 대한 천부적 끼와 감각을 지니고 있는 박찬욱 감독 등과는 비교 선상에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영화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과 미덕을 갖추고 있다. 물론 이번 영화는 흥행면에서 2%쯤 부족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확언컨대 그건 이 두 작가의 탓이라기 보다는 현재의 영화대중들의 수준 탓이다. 작금의 영화관객들은 지나치게 쉽고, 지나치게 가벼운 영화들만을 찾는 경향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영화의 미래에 대해 낙관론과 위기론이 엇갈리는 것은 그때문이다.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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