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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견한 생활 '공동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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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견한 생활 '공동체', 가족"

산골 아이들 <14> 좌충우돌 속 자리잡기

***가족의 재발견**

전에도 가족을 꾸리고 살았다. 남편과 아내, 딸 아들로. 그러나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 두고 집에 있게 되면서 가족은 살아가는 절대 공동체가 되었다.

어느 부모가 아이 학교를 그만 둘 때 '책임 질 수 있을까?', 하는 진지한 자기 물음을 하지 않으리오. 그 대답은 쉽게 나올 수 없고, 오로지 부모 자신이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전까지는 책을 보아도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보았다면 이제는 종합 사전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학교 때부터 한번도 가까이 해 본 적이 없는 과목까지 열심히 파고들었다. 아이들 책부터 전문 서적까지. 집안에 공부하는 분위기가 넘쳐나기 시작했고 입을 뻥긋하면 교양강의 시간이 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것도 한 때. 두려우니 자신감을 가지려는 몸부림이었다. 부모가 자식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일. 아이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걸 지켜보면서 두려움이 풀렸고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한 가지 일을 해도 창조적인 일을,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자기 발견의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로 돌아가 그때 우리 집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날마다 혁명을' 하는 분위기였다. 20대부터 혁명을 꿈꾸었지만, 여기서 이렇게 혁명을 맞이하게 될 줄이야!

가족이 절대 존재가 되니 식구 사이에 의견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전에는 아이의 반 이상을 학교에 맡겼지. 그러니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어쩔 수 없지 하고 물러서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온전히 우리 몫. 부부 사이에 생각이 다르면 작은 일 하나까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어느 혁명에나 있는 '사상투쟁', 두 권력자인 우리 부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닐 때는 우리 식구 삶을 이 사회에 의지하고 살았다면 이제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야 했다. 독립선언. 그 당당함이 어디 공짜인가.

남편은 '이제부터 돈 주고 팔기 위한 농사는 하지 않겠다', 선언을 했다. 돈벌이를 하기보다 자기 성장에 도움이 되는 농사를 하겠다. 농사는 직업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길이고, 우리 식구 먹을거리를 자급하는 길로 삼자는 논리인데. 나 참. 돈벌이를 그만 두자니…….

농사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밭을 갈지 않고 땅 힘에 따라 자연스레 농사하겠단다. 작은 밭 한두 다락은 내가 앞장서서 그렇게 해왔지만, 천 평이 넘는 밭을 그렇게 하자니 막막했다. 논농사도 쌀을 많이 생산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실험의 장으로 바뀌었다.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직파, 논을 갈지 않고 농사하는 무경운, 머리빗 같은 홀태에 벼이삭을 훑는 타작, 나무절구로 방아 찧기…….

돈벌이를 그만 둔 집이니 돈을 안 쓰고 살았을까? 아니다. 오히려 돈 쓸 일이 있으면 아낌없이 쓰자 한다. 전에는 앞날을 위해 한 푼이라도 저축을 해야 했다면, 지금은 필요하다면 예금을 깨서라도 돈을 쓰자고 한다. 앞날의 행복보다 지금의 행복이 더 중요해 졌으니까. 필요한 건 서슴없이 사고, 여행을 가고 싶으면 떠나자.

***첫해―'방콕'의 해**

우리 식구의 혁명. 그 소용돌이 과정에서 엄마인 내가 중심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 그 이야기를 한해씩 나누어 적어보겠다.

아이들과 가게에 들어갔는데 마주친 어른이 깜짝 놀라며, "너 왜 학교 안 갔니?", 그 소리에 우리까지 놀랐다. 그 분은 아이가 학교에 안 갈 만큼 무슨 일이 있나? 놀랐던 거다. 남을 놀래지 말아야지. 우리는 학교가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밖에 다니곤 했고, 탱이 혼자서 먼 거리를 다닐 때는 주말에 다니곤 했다.

탱이는 잠을 많이 잤고, 하루 대부분을 '방콕'하고 지냈다. 책 귀신이 씌웠는지 책을 읽고 또 읽고. 집에 있는 책을 다 읽자 이웃집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책을 빌려 읽어나갔다. 또 손으로 무얼 만들었다. 실을 꽈 팔찌를 만들고, 수를 놓고. 방구석에서 그러고 있는 걸 내가 답답해하면 '무얼 만들 때는 아무 생각이 안 나고 거기 빠져들어 좋다', 한다.

학교를 그만 두니 우리와 비슷하게 사는 집, 우리 아이들처럼 집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그립다. 그들은 어떻게 지내나? 우리보다 먼저 귀농하고, 그 집 남매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집에서 지내는 집이 생각났다.

가까우면 좋으련만 60령 넘어 먼 곳이다. 서툰 솜씨로 차를 몰아 그 집을 찾아갔다. 네 식구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한 방에 모두 둘러앉자, 그 집 아저씨가 탱이를 보고 물었다.

"왜 왔니?"
탱이 머뭇머뭇하며, "심심해서요."
그러자 그 아저씨, "우리가 심심풀이 땅콩이냐?"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탱이 갑자기 당황했다. 다시, "보고 싶어서요."

그 대답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져 막힘없이 이야기가 이어졌다. 우리 생각엔 그 집 남매 역시 심심할 때가 있을 것 같다. 탱이가 심심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 집 아줌마는 공부하다 일하다 하면 심심할 겨를이 없다고 한다. 공부하다 지겨울 만 하면 일하고, 일하다 지겨우면 공부한단다. 그렇구나! 공부하고 일하고 하면 되긴 되겠네.

***둘째 해 검정고시**

일하고 공부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간디도 그랬고, 자연에서 사는 많은 성현들이 그랬다. 말은 간단하지만 그렇게 살아가기가 쉬운가. 공부에서 놓여나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공부를 하지는 않는 상태. 한마디로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학교를 그만 둔 지 1년이 지나자 학교에서 연락이 와 의무 취학 유예원을 다시 내라고 했다. 서류상 탱이는 학교에 적을 둔 채 학교를 쉬고 있어, 의무 취학 유예원을 1년에 한번씩 부모가 내야 한단다. 우리는 학교와 어정쩡한 관계에 있다는 걸 알았다. 학교를 다녀온 남편은 검정고시를 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검정고시를 통과하면 학교와 관계가 말끔히 정리되고 어른들 걱정도 줄어들 거고.

검정고시라? 이것 또한 새로운 일이다. 검정고시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치는지를 알아보았다. 고입(중졸) 검정고시는 일년에 두 번. 주소지 도교육청에서 치는데, 재학할 나이는 검정고시에 응시할 수 없단다. 그럴 수가…….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 의무 취학 유예 중인 경우에는 유예원 사본을 내면 응시자격을 준단다. 신청 기간에 도교육청에 찾아가 신청서를 냈다.

시험을 보려니 준비를 해야지. 둘레에 검정고시를 친 집에 알아보니 기출문제집을 하나 사서 풀어보면 된단다. 문제집을 보니 어렵지 않았다. 문제집을 보고 시험 준비를 했다.

시험장은 도청소재지에 있는 중학교. 시험 날 아침 온 식구가 새벽같이 나왔다. 시험장은 검정고시 학원 사람, 수험생, 야학 식구, 수험생을 따라온 식구로 붐볐다. 탱이 교실까지 바래다주는데 탱이 앞자리에는 아줌마, 뒷자리에는 할아버지가 앉아계시다 탱이가 앉으니 싱글벙글한다. 그 교실에는 탱이 또래 남자 애가 엄마, 아빠와 함께 시험을 치러 앉아있기도 했다. 지금까지 어떤 시험장에서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 거기 있었다.

점심시간에 탱이 입을 다물 줄 모른다. 시험장 풍경이 너무 신기했나 보다. 할아버지 아줌마와 함께 치는데다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니 인심이 넉넉하단다. 시험 감독관 역시 못 본 척 눈감아주고. (좀더 자세한 분위기는 검정고시를 친 분에게 물어보시라.) 인디언은 시험을 볼 때 서로 힘을 모아 문제를 푼다지. 그 말이 떠올랐다. 아까 탱이 앞뒤로 앉았던 할아버지와 아줌마가 싱글벙글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시험을 보고 나니 홀가분하고 마음이 절로 여유롭다. 뒷간에 갈 때와 나올 때가 진짜 달랐다.

탱이 검정고시를 치는 과정에서 탱이 동문을 많이 만났다. 이웃집 아저씨도 검정고시 동문이고, 아버지 친구도 동문이고, 손님도 동문이었다. 밤하늘의 별들처럼 우리 둘레에 검정고시 동문은 많이 있었다.

시험 결과가 나오고 중학교에 그 결과를 통보해 주었다. 그때 마침 '우리 쌀 지키기 백인 백일 걷기 운동' 대열이 우리 동네를 지나간다는 소식이 들렸다. 탱이 한번 가 보고 싶어 했다. 백인걷기는 어른만 아니라 아이들이 함께 걸었고,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길 위의 학교'처럼 굴러갔다. 탱이는 거기가 좋았는지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갔다.

탱이가 걷는 동안, 나는 허리 병이 도져 한번 찾아가 보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그렇게 한 게 잘한 일이었다. 탱이는 거기서 자기 힘으로 많은 사람을 사귀었고, 거기서 알게 된 이들과 탱이가 직접관계를 맺게 되었으니까.

집에 돌아와서도 그곳에서 만난 이들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되새기고, 언니, 친구들과 편지가 오고갔다. 어디서 모인다더라 하는 소식이 들리면 엉덩이가 들썩들썩. 실제 탱이가 걸었던 날은 보름 남짓이었지만 그해 가을 내 거기 마음을 빼앗겼다. 몸은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집밖을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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