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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자연으로 한발, 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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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자연으로 한발, 한발"

산골 아이들 <9> 서울 아파트를 떠나 무주로

지난번 세뱃돈 이야기를 쓰면서, 내 안에 숨어있던 문제가 드러나면서, 자기 스스로를 치유하는 경험을 했다. 그런 경험은 2부, 서울을 떠난 때부터 탱이가 학교를 그만둘 무렵까지를 쓰면서 계속되었다. 서울을 떠나 탱이가 학교를 그만두는 데까지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거듭했다.

글을 한 머리 정리하고 나니 왜 그리 쓰고 지우기를 거듭했나 보인다. 푸념이 줄이어 나오고, 수다스러운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다. 써 놓고 보면 푸념이다. 그러면 지웠다. 다시 써놓고 보면 수다다. 다시 지웠다. 푸념에 수다에 숨어있던 상처가 드러났고, 내가 쓴 글을 내가 읽는 시간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시간이었다. 필자.

***1996년 봄 우리 식구**

1996년 봄까지 우리 식구는 이렇게 살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채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서울서 탱이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은 나이든 남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준비물을 안 챙겨 와도, 아이들 책상 밑에 휴지가 떨어져 있어도 손바닥을 때리셨다. 탱이는 자기가 안 맞아도 두려웠나 보다. 아침에 학교로 떠난 탱이가 조금 뒤 집으로 돌아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면 달래고 달래서 교실 문 앞까지 데려다 주고, 어떻게든 아이가 학교에 적응하게끔 노력했다. 그때 학교를 안 다닐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했으니까.

농사는커녕 베란다에 화분도 제대로 못 가꾸었고, 시골 생활은 민속박물관에서 보는 구경거리였다. 풀꽃 이름 하나, 나무 이름 하나 몰랐다. 그런 우리 식구가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한 발 한 발 걸어온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그때는 짙은 안개가 껴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느껴져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두려웠다. 두려웠기에 헛디디기도 하고 미끄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니 그리 두려워 할 것도 아니었는데 쯧쯧쯧……. 두려움도 안개와 함께 사라진다. 요즘도 눈보라 치고, 어두운 날이 있다. 두려움이 휘감지만 이제는 기다릴 줄 안다. 기다리면 눈보라가 개이고 해가 뜰 테니까.

***"다 자기 팔자지요"**

여성민우회 회원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한 분이 내게 어른이야 자기가 좋아서 산골에서 산다지만 아이들은 어떠냐고 물으셨다. 내 대답은 한마디로, '다 자기 팔자지요.'

별나게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어째서 산골에서 사느냐, 그렇게 사니 행복하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그러니 나 스스로는 얼마나 거듭 물었을까? 남편은 귀에 딱지가 앉았을 거다.

이 질문은 1995년 늦둥이를 낳으며 시작되었다. 뜻밖에 늦둥이를 가졌다는 걸 안 건 1994년 연말이었다. 새 목숨을 받아들이고 나니 봄이 왔다. 아이가 뱃속에서 자리잡아갈 무렵 아이들에게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쓴 말씀이 자꾸 귀에 들린다. 생명은 생명을 부르는 듯 아파트 단지를 걸어 다녀도 콘크리트 틈새에서 자라는 풀꽃이 보였다. 먹고픈 것도 찐 감자, 삶은 옥수수……. 때맞춰 남편은 시골 가서 살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 자식을 가지니 남편은 정신이 번쩍 났나 보다. 도시 생활에서 지치고 상처받아 무기력하기까지 했던 사람이 명상수련을 열심히 다녔다. 무척 좋다고 모두 함께 다니자 했다. 저녁이면 세 식구 수련을 다녔다.

그곳에서 사람은 자기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까지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말이었다. 그 뒤 이 아기는 나를 왜 부모로 선택했을까? 생각이 들었다.

제왕절개수술을 해 아기를 낳았다. 낳고 보니 남자애였다. 수술 뒤끝이 좋지 않아 몸이 안 좋고 머리는 텅 빈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도 아파트에서 자라는 남자 아이들이 떠올랐다. 내게 온 이 아이를 그렇게 키워야 하나?

남편은 신들린 사람처럼 시골 가서 살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엄두가 나지 않고 멍할 뿐이었다. 늦둥이를 키우려면 까마득한데, 눈앞에 확실한 삶을 놔두고 미지의 세계로 갈 자신이 없었다. 아기를 낳자마자 수도꼭지 틀면 더운 물이 좔좔 나오는 아파트를 떠나 시골로 가서 살자니…….

남편이 혼자서라도 내려가겠다며 집을 나섰다. 일이 풀려나가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 고민을 이야기하다 한 곳을 알게 되었다. 산골에서 젊은이 여러 집이 모여 살면서 아이들도 함께 키우고 작은 학교를 열어보자는 곳이 나타난 거다. 솔깃했다. 농사할 엄두가,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내게 알맞은 곳 같았다. 그쪽과 죽이 맞기에 일단을 내려가 보기로 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프라이드DM에 간단히 짐을 꾸려서. 그때가 1996년 6월. 그 길이 내가 서울을 떠난 길이 되었다.

지금은 열 살이 된 상상이에게 말한다. '네가 나를 엄마로 선택했잖아, 뱃속에서부터 나보고 시골로 가자고 했잖아.', 하고. 그게 사실인지야 누가 알리요. 다만 상상이가 그런 전환점에 태어났고 그것이 우리가 서울을 떠나게 된 변수가 되었다.

그때 알던 한 분은 지금도 귀농과 홈스쿨을 꿈꾸는데, 그러면 아내가 "그런 말 하지 말고, 방에 들어가 잠이나 자요. 괜히 애들 헷갈리게 하지 말고", 한단다. 나 역시 그때 상상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비슷하지 않았을까?

***전교생 여섯 명 분교**

여행 짐을 꾸려서 떠난 뒤 서너 달 임시숙소에서 살다 드디어 살 곳을 정했다. 처음에 가자마자 거기서 살라면 도망갔겠지만, 세 달이지만 산골에서 살아보니 내 발로 찾아들어갔다. 우리 이삿짐 차가 다다른 곳은 경남 산청. 관악산 연주암처럼 산 위에 있는 외딴집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자연을 처음 만난 듯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아침이면 발아래 안개가 깔리는 그곳에서 자연은 날마다 새롭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한편 두렵기도 했다. 비가 오면 길이 끊기고, 전기가 나가고. 버스가 다니는 길까지는 까마득한 곳이었으니.

초등학교 2학년이던 탱이는 그곳에 있는 전교생 여섯 명인 분교로 전학을 갔다. 여기서 탱이 이야기를 해 보자. 탱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외가가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자랐다. 내가 일하러 나가면 외가에서 돌보아주었고 다섯 살 때부터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탱이에게 이 세상은 자기가 자란 아파트 단지였고, 아이들도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이었다.

집이 학교 옆 동 아파트라 베란다에서 학교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살던 탱이. 그 탱이가 엄마 아버지 따라 한번도 가 본 적도 없는 산속에 살게 되었던 것이었다. 토네이도를 타고 날려 오즈의 마법 세계로 들어간 도로시처럼.

신문은 물론 텔레비전 안 나오고, 가스나 기름을 배달하려면 몇날며칠 신신당부를 해야 배달해 주었다. 대신 맑은 공기, 맑은 물, 이웃들 인심이 있었다. 집에서 탱이가 다니는 분교까지는 꽤 멀었다. 산길로 이 키로. 그 산길을 탱이 혼자서 걸어 다녀야 했다. 그러나 다행이도 여섯 명 학생 가운데 탱이 또래 여자애가 둘. 탱이는 그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산골 분교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적어놓은 글을 보자.

학교 길

학교 갈 땐 산을 하나 넘고 고개 하나 없어 혼자서 외로이 학교 가도 같이 가 주는 사람 없어 외롭게 걸어가는데, 특히나 비 오는 날이면 진흙탕이 돼 버려 한 시간 걸리는데 힘들어서, 비 오는 날만 꼭 그날만 차 태워 줬으면 하지만, 흙탕물이라 차가 못 빠져 나가 걸어가야만 하는 걸.(1997년에 탱이가 쓴 글)

둔철분교 식구

건축일 하는 집 큰아들 훈이
젖소 목장 집 외딸 송이
부모 따라 도시서 온 탱이
아버지가 요양 왔다가 눌러 사는 현이, 용주
언니 오빠 따라 놀러오는 여섯 살 지예, 용환이
고향 산청 작은 마을서 태어나 지금까지 사시는 나이 지긋한 민 선생님
진주에서 출퇴근하시는 젊은 노선생님
아이들은 부산으로 공부시키러 보내고 혼자 사시는 이 주사 아저씨
이 주사 아저씨가 키우는 어미 개와 강아지.(1997년에 장영란이 쓴 글)

그때 무엇이 탱이를 이끌었을까? 내 느낌에는 해방감 때문이라 생각한다. 서울서 학교 다닐 때와는 다른 자유로움. 그때 쓴 글을 뒤적이니,

서울서는 늘 "심심해, 심심해"였는데 여기서는 친구 하나만 있으면 하루하루가 너무나 즐겁다. 여름에 서울 다녀오며 이제 서울 안 가고 싶다며, "서울서는 되는 게 없어", 하며 여기서는 안 되는 게 없단다. 학교만 끝나면 완전 자기들 세상이다. 넓은 들판에서 놀다가 심심하면 선녀탕에 물놀이하러 가면 되고, 가을에는 아랫마을 강아지 구경하러 갔다가 홍시 주워 먹고 동생 주라고 한 개 들고 돌아오면 되니.

선생님은 두 분. 탱이 반은 나이 드신 선생님이라 재미없어 해도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 그네도 타고, 누구네 집에서 옥수수 삶아오고, 학교 배 땄다고 식구수대로 얻어오고. 준비물 없고, 시험이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어쩌다 한번 내 주는 숙제를 해가든 안 해 가든 놔 둘 수 있다. (1996년에 장영란이 쓴 글)

지금도 분교에서 처음 맞았던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날 아침 우리가 방학숙제를 걱정하던 일이 떠오른다. 만판 놀다보니 방학숙제를 하나도 못했고 그런 채로 학교를 가도 되나? 우리는 그전까지 서울 학교 생각을 떨칠 수 없어 주저주저했다. 그런데 돌아와서 하는 말,

"선생님도 애들도 아무도 방학 숙제 이야기 하지 않았어."

분교 교실은 두 칸. 탱이네 반은 학생이 셋. 보통 교실을 반으로 가른 작은 교실 가운데 선생님 책상이 놓이고 맞은편에 책상이 하나. 양쪽으로 책상이 하나씩 놓여있었다. 따로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지 않으니 선생님이 나가 놀라면 아이들은 우르르 운동장에 나가 놀고 놀다 보면 선생님은 작은 종을 쳐서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소풍 때는 아이들 집안 나들이처럼 집집이 부모가 차를 몰고 갔다. 한번은 지리산에 있는 가랑잎 폐교로 갔는데 선생님과 아이들, 학부모가 모두 둘러앉아 점심 먹고, 어른들이 술 한 잔 하며 이야기하는 사이, 아이들은 뛰어놀았다.

거기서 탱이와 나는 해방감을 만끽했다. 나중에는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오면 선생님한테 전화하고 안 가곤 했다. 자연공부, 준비물, 숙제 이런 부담을 벗고, 틈만 나면 자연으로 놀러갔고, 학교 오가는 길에도 자연을 보기 시작했다. 탱이도 나도 이렇게 자연의 품에 안겨 본 게 처음이었으니까. (계속)

*1997년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교육부는 분교들을 없애기 시작했고, 탱이가 다니던 분교 역시 그런 흐름에 따라 없어졌다.

***필자 소개**

무주 산골에서 자급 농사를 하며 자연에 눈 떠가고 있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맛을 나누고 생각이 서로 이어지는 이와 만나고 싶어 틈틈이 글을 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을 두루 할 수 있는 전인이 되고 싶다. <자연달력 제철밥상>(들녘 펴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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