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님의 단식이 '중생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런저런 촌평들이 뒤를 잇고 있다. 굳이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스님의 행보가 가볍지 않다.
환경, 생태, 이 모든 말들은 이미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특히 민주화가 일정하게 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혹은 너무 민주화가 되어 오히려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회정치세력들조차도 외견상 이 말이 지니는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른바 거대담론이 뒤로 밀려나고 미시적인 일상의 담론, 일상의 정치가 이야기되면서 환경, 생태 등의 말들과 그것을 화두로 하는 운동들이 주목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들 문제는 일국의 계급과 계층을 넘어서는, 인류의 문제라고 이구동성 말해 왔다. 그렇다면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가.
30여 년 전, 지식인 친구를 갈구하던 청년노동자가 지금은 패션의류타운 밀레오레가 하늘을 찌르는 평화시장의 후미진 골목에서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이고 뛰어나오며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다 죽어갔다. 전태일이다. 새삼 그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노동자들, 가난한 자들에게 가하는 억압, 고통과 관련하여 그의 외침이 주는 역사적 반추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분신을 하며 세상을 등지고 난 다음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를 역사의 가운데로 밀어 올리고자 그렇게 많은 고통과 인간적 아픔을 감수했는지, 바로 그것을 다시 곰곰이 되씹어 보기 위해서다. 그것은 그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면에서 찌들어 가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온몸을 던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인식의 깊이와 무관하게 생산현장에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진정 자본의 논리를 넘어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관계들'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한지의 문제를 우리 앞에 던져주었고,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고 실천하도록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그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반 걸음, 한 걸음 다가서기보다 '시장합리성'을 강조하며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하고 단절시키는 글로벌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어야 하는 현실 속에 있다. 한쪽에는 너무 많은 부와 권력에 어찌할 줄 몰라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한 끼를 해결하기 어려워 피눈물을 삼키는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있다.
전태일이 생산현장에서 착취와 억압의 인간관계를 분신으로 고발하며 세상을 등진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 외견상 그 때와 상황은 많이 달라진 듯하지만, 권력의 핵심부인 청와대 부근 어느 작은 방에서 인간을 넘어 자연을, 생태를 살려달라고 한 스님이 곡기를 끊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도 '개혁'을 외치는 권력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기대를 접은 채, 아니 오히려 그 '권력의 화신'에 대해 '인간적 연민'을 간직한 채, 자신의 몸으로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 작은 체구의 스님은, 이제 더 이상 작아질 수조차 없는 몸을 정신으로 가다듬으며 바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자기 스스로, 우리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다.
전태일이 착취로 얼룩지고 파편화된 생산현장에서의 인간관계를 온몸으로 고발했다면, 이 비구 스님은 그러한 과정과 맞물려 함께 파괴되어 온, 그러나 전태일이 외치기 전, 바로 그와 동일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에 대해 무지했던 것처럼,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것처럼, 너무나 우리에게 밀착되어 있기에 우리의 일상의 관심사로부터 비껴 있는 분절된 인간과 자연의 관계, 생태에 대해 성찰할 것을 요구하며 기도하고 있다. 그는 지금 애써 한 호흡을 들이쉴 때마다, 한 모금의 물을 마실 때마다 자신의 묵언이 염화미소로 전해지기를 염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지난 수십 년 간 급속히 진행된 자본주의 산업화, 물질화가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포함한 우리 삶의 환경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내고 있는지 진정 되돌아 볼 것을 간구하고 있다. 이 문제들이 더 이상 우회할 수 없는, 말로만 떠들 수 있는 미래의 사안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해 있는 절박한 현실의 문제임을 자각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이 문제가 먼 미래의 일이기에, 표심을 잡기 위해 '빈 약속'으로 남발할 수 있는 이런저런 사안들이 아니라는 점을, 따라서 더 이상 이론적, 행정적 형식합리주의의 틀 속에 가두어 둘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환경, 생태문제가 계급ㆍ계층을 초월한, 나아가 일국의 문제를 넘어서는 전 지구적인, 전 인류가 직면한 문제임을 그렇게 강조하는 사회정치세력들이 지금 우리 앞에서 보이는 또 다른 침묵은 무엇인가. 그것은 알고 보니 이 문제가 '미시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 없는 너무도 거대한 차원의 난제이기에,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속으로 강변하며 기존의 관행을 밀고 나가거나, 손을 놓겠다는 또 다른 상징인가.
사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노무현정권에 거는 기대는 크지 않다. 무엇보다 노무현정권은 과거의 성장주의를 수정하고자 하는 어떠한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은 한 발 더 나아가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추종자로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내 몰고 있다. 이제 이 사회는 많은 양식 있는 지식인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아니 현 정부의 관료들 스스로도 이런저런 수식어로 인정하고 있듯이 '한 국가 내에 두 국민'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모든 사회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는 '가진 자들'이고, 다른 하나의 부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배제되거나 배제되고 있는 '가난한 자들'이다. 거기에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빈민 등이 핵심을 이룬다. 시장에 맡겨진 이들은 '그래도 살만해지겠지'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그 와중에 가장 먼저 아이들과 노약자들이 배고픔에 시달리고, 그를 지켜보는 연약한 어미는 말라가고, 이를 보다 못한 능력 없는 노동자 가장들은 자신의 삶을 죽음으로 마감하곤 한다. 조그만 가게 하나 꾸리는 것조차 어려운 사람들은 부도와 신용불량자라는 딱지를 단 채, 이 거리, 저 거리를 배회한다. 이른바 'IMF 위기'를 계기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대중경제론'을 버리고 신자유주의로 방향을 틀었던 전임 대통령조차도 '가난은 나라도 구할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이제 '이 빈곤은 나라가 구해야 한다'고 할 정도이다.
사정이 이렇게 절박함에도, 노무현정권은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그동안 오직 경제문제의 해결을 위해 시름하였으며, 지난 해 비정규직 일자리 40만개를 창출하여 대국민 약속을 이행했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조국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일하는 자본의 애국심에 감명 받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거의 모든 언론 매체는 '대한민국 삼성호'가 낸 순이익이 1백억 달러를 넘어, '무슨 클럽'에 가입했다고 보도하면서 찬양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단지 일부 양식 있는 언론인들만이 삼성의 성장을 뒷받침한 '무노조 신화'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사실상 인간 이하의 존재로 치부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진정 그러한 성과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의미로 다가 갈까. 이들에게 정부가 만든 그 일자리는 '악어의 눈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IMF 위기' 때보다 살기가 더 어렵다는 이 시기에 삼성의 1백억 달러 순이익 달성은 자본과 노동자의 소득격차가 더욱 커졌다는, 나아가 이 사회의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었음을 확인해 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2만 불의 장밋빛 시대'를 열어젖히기 위해 생산현장에서, 교육현장에서, 그리고 여타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진행되는, 그나마 남아 있는 '더불어 사는 삶'과 관련된 발상과 행태를 생산력주의, 성장주의로 일소하라는 주문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한데, 거기에 환경이, 생태가 자리 잡을 여지가 있을 리 없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근본적으로 환경이, 생태가 인간의 삶과 공존, 양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며, 그 구체적인 대상들은 미래의 성장을 위한 하나의 상품, 자원으로만 보일 뿐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최소한의 '환경정의'에 대한 발상, 그 진정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가난한 자들'은 더 열악한 인간적ㆍ자연적 환경, 생태 속에서 이중의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이처럼 그 어느 때보다 비대칭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관계가 재생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이 자신들의 행위 근거로 '시장합리성'을 더욱 더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결국 이러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겠다는, 다양한 영역에서 불균등하게 진행되고 있는 기존의 상황을 방관 내지 암묵적으로 인정하겠다는 선언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개혁정권'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또한 정책결정 과정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강변하면서, 번영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생산성 제고를 통한 경쟁력 확보는 불가피하다고 되뇌이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한 스님의 절규가 어디 가슴에 와 닿겠는가. 오히려 어느 한 쪽에서 그것이 미칠 사회적 파장에 노심초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수지타산의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이들의 모습을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국가가, 권력이 항상 자본의 편에 있음을 우리는 이론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 또한 그들의 몫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는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 또한 본능적으로, 경험적으로 잘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비대칭성을 극복하기 위한 일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할지 알 수 없으며, 또 가까운 시일 내에 그것을 향한 의미 있는 진전을 목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가 어느 한 개인의 의지와 힘에 의해 넘을 수 있는 그런 장애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얼굴 한번 뵌 적 없는 이 스님이 온몸으로 이야기하고자하는 바가 무엇인지 공감하면서도, 이 소중한 생명을 건 단식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그것의 중단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이 권력에 무엇인가 기대하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대로 이들이 진정 역사적인 조건 속에 있는 인간, 환경, 생태문제를 자기 문제로 삼고 해결해 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노무현정권은 그 출범에 즈음하여 자기 스스로 고백한 바대로 '미래를 열어나가는 정치세력이 아니라 과거를 마무리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동안 수구세력과의 타협으로 일관한 이들의 정치 궤적에 눈을 돌릴 때, 그 결과 또한 미봉적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점을 예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그동안 이들이 '개혁리스트'에 올린 무수한 공약들, 환경과 생태문제를 포함한 그 공약들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에 의해 확인된다. 집권 전반기를 마무리한 지금, 이들이 개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시장개혁' 뿐이다. 그것도 자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고용의 유연성'이라는 담론으로 포장된 노동에 대한 공세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 자본을 필두로 한 이 사회의 진정한 지배세력들은 이들 권력이 자기의 존립근거로 내세우는 그 '무늬만의 개혁' 조차도 포기할 것을 내걸면서, '경제 살리기'라는 외피를 매개로 자신들이 그동안 축적해 온 '돈, 정치적 지지와 경륜'을 제공하겠다고 공공연히 제안하고 있다.
바로 이런 권력이 어떻게 생산력주의, 성장주의에, 그것의 화신인 자본에, 그리고 모든 것을 이들의 이해관계로 환원시킬 수는 없지만, 이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환경, 생태 문제에 메스를 들이대겠는가. 애초 그 성장의 이면에서 파괴되는 사회관계에 주목하지 않는 이들에게, 애초 이들이 신봉하는 그 '합리적 시장'이 구조적으로 불균등한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거래의 장이라는 사실을 외면하는 이들에게, 그리하여 삶의 고통에 처한 대중을 위해 자신들이 최소한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러한 '개혁'이 자신들이 그토록 목소리를 높이는 '과거청산'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물질적인 토대의 구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거나 외면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자본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을 아무리 '참여정부'라는 '국민적 외피'로 가린다고 하더라도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가려질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스님이 이 권력에 대해 기대를 접은 이유와는 다소 상이하지만, 최소한 이들에게 기대를 걸었던 양식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비판하는 것은, 이들이 여전히 스스로를 '개혁세력의 화신'으로, '민주화된 권력,' '합리적인 권력'으로 자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집권하기 이전에 어느 사람이 그랬듯이 '좋아하는데 먼 이유가 필요한가'라는 말장난은 이제 웃음으로 받아넘길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 무언지 모를 그들만의 짝사랑의 비밀'이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난감한 현실에 더 이상 눈감는 것을 허락하는 보증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스님이 제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이 권력이 그토록 자기 스스로를 규정해 왔던 '합리적 정책결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납득할만한 투명한 근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스님의 단식을 대하는 권력의 태도에서 우리는 진지한 반응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미 교육부총리 임명과정에서 드러난 바 있지만, 이들이 작동시키고 있는 정책논의와 그 결정을 위한 시스템은 단지 자신들만의 검증시스템일 뿐이다. 이들의 정책기제들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대중으로부터 자립하여 결국 자기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가고 있다. 지난 교육부총리 임명 과정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서 대중들의 비판은 그 수준이 어떠하든 일단 귀담아 들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진, 자기이해만을 내세우는, 봉황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낡은 발상과 행태의 표출로 간주될 뿐이다. '참여'로부터 배제된 대중들은 이제 더욱 더 저만치 떨어져 그들의 행위를 바라보는 객체가 되고 있다.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거대 초국적 자본과 관련 기관들, 이미 초국적화된 유수의 '국내자본'과 관료세력들, 그들을 따르는 이런저런 기능적 이데올로그들이 포진해 있다. 그들은 서로를 보완하며 대중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최소한의 진정한 개혁'을 바라는 대중들을 조롱하며 이제 피로감만을 주는 그 '무늬만의 개혁'조차 벗어버리라고 충고 한다. 그와 동시에 민주주의는 점차 대중의 삶과 분리되고 있다.
한 스님이 3달 가까운 단식을 통해 공정한, 투명한 '환경영양평가'를 재차 요청하고 있다. 이에 또 기존에 투여된 예산이 얼마라느니, 예산낭비라느니, 특정 종교의 '님비'라느니, 언제부터 그렇게 철저한 생태주의자가 되었냐는 등의 '야유'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소리들이 들려온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상이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천성산 터널관통 문제는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 생태 문제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긴장 관계에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향후 어떻게 풀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촉구하는 시대적, 역사적 흐름의 과정 속에서 표현된 하나의 계기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특정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 생태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된 그 동안의 문제들이 누적, 응축되어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낙동강 페놀방류사건, 시화호, 새만금, 부안 방패장, 북한산 외곽순환도로 관통문제 등을 경험하면서도, 중장기적 전망과 대안 없이 여전히 한 자리를 맴도는, 그 때 그 때 임시방편으로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는, 이른바 국정을 책임져야 할 권력의 직무유기에, 그것을 생산성과 시장에서의 경쟁력의 문제로만 사고하는 크고 작은 자본의 그 질긴 조합주의적 발상과 행태에 더 큰 만성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30여 년 전 전태일이 제기했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에 더하여, 그 동안 그 뒤에 가려 있던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해결해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화두로 건 한 스님의 호소는 이 문제가 더 이상 우회할 수 없는 것임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만들고 있다.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던졌을 때, 권력은 그리고 우리들은 그 당시 찢겨진 그 인간관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였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아니 그 현실의 모습이 어떻든 인간과 함께 하고 있는 환경, 생태문제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이 호소가 지니는 시대적 의미를 그저 하나의 정책의 문제로, 현실을 모르는 한 스님의 '고집스런 의지'의 문제로 축소시키고 외면할 것인가. 글로벌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산산이 부서진 사회관계와 맞물려 제기되고 있는 이 문제를 다만 텔레비전 환경다큐멘터리의 소재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간다면, 그러면서 상대적이지만 환경, 생태 문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다른 나라, 사회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우리사회에 희망이 없음을 스스로 공표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