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준 전 교육부총리가 취임 3일 만에 사퇴한 일은 새삼 우리가 여전히 '윤리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말해준다. 최첨단 과학기술 시대, 경제가 삶의 모든 것보다 우선시되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윤리적 잣대'를 세상사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일은 익히 알아온 것보다 이른바 '사회 지도층'의 부도덕함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속속 드러나는 이기준 전 부총리의 갖가지 비도덕적 행태도 문제였지만, 그런 허물이 그의 '전문적 능력'에 의해 덮어질 수 있다고 본 청와대의 인식이야말로 더 큰 문제였다.
이런 시점에 하버드 신학대학 교수인 하비 콕스가 쓰고 최근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동시 출간된 <예수 하버드에 오다>(오강남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를 읽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듯하다. 예수의 삶과 사유를 통해 현대 사회의 윤리적 위기를 극복할 단초를 제시하려는 이 책의 시도는 여전히 '윤리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고민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예수, 70여년 만에 하버드에 등장하다**
미국의 '사회지도층'을 배출하는 하버드 대학은 1980년대 초 의미 있는 결단을 내린다. 모든 대학생들이 '윤리적 사유'라는 이름 아래 개설된 여러 개의 과목 중 하나를 졸업하기 전에 꼭 이수하도록 한 것이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는 '윤리적 위기'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절박한 인식에서 비롯된 조치이다.
<세속 도시>(대한기독교서회 펴냄)라는 저서로 현대 신학에 선구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 하비 콕스도 많은 고민 끝에 여러 과목 중 하나로 <예수와 윤리적 삶>이란 과목을 개설한다. 1982년 이 과목이 개설되기 전까지 하버드 대학에서는 70여 년 동안 '예수'라는 이름이 들어간 과목이 없었다. 하버드 대학이 원래 1636년 목사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으로 시작된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이미 종교나 예수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접근이 아니라는 게 대세가 된 때였다.
하지만 하비 콕스는 그 후 20여 년 동안 이 수업을 진행하면서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다. 미국과 국제 사회의 주류로 진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이 똑똑한 학생들은 너도나도 예수를 통해서 윤리적 통찰을 얻기를 기대하며 이 수업을 신청했다. 수강생 수가 많아지자 강의실을 넓은 곳으로 옮겨야 했고, 나중에는 15명씩 여러 조로 나누어 토론을 할 수단까지 강구해야 했다.
20여 년 동안 강의를 하면서 하비 콕스는 1950년대에 대학을 다닌 자기와 21세기를 준비하는 10대 후반~20대 초반의 하버드 학생들 사이에서 놀라운 공통점이 있음을 알아낸다. 윤리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세계관만을 고수할 것으로 생각했던 이들이 보편적인 '윤리적 잣대'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20세기의 인물인 하비 콕스가 일생동안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이 책은 바로 그 20여 년 동안 하비 콕스와 하버드 대학생들의 나눈 대화의 산물이다.
***"1세기 예수의 지혜가 21세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책은 신약성경의 예수의 삶을 토대로 '도대체 1세기 예수의 지혜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하비 콕스와 그의 학생들은 때로는 예수의 삶과 통찰에 깊은 감동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그의 삶이 과연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점을 가진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도 유의미할지 회의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간다.
본문만 4백70쪽이 되는 방대한 분량으로 묘사되는 이들의 여정을 다 소개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의미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되는 부분이면서, 이 책의 백미이기도 한 '산상 수훈'을 하비 콕스와 학생들이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나갔는지 살펴보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로 시작하는 팔복은 산상 수훈으로 알려진 예수 가르침의 첫 부분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되뇌는 이 대목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예를 들어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를 통해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다음과 같다. 하비 콕스는 예수가 말하는 '슬퍼하는 사람'은 자기들의 개인적 재난을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예수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짓누르고 있고, 그들의 많은 지도자들을 부패하게 하고, 그들의 생계 수단을 앗아가고, 그들의 위엄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그 민족적 재난"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흔히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가난 때문이 아니라 '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휩싸이면서 삶의 의지를 잊는다. 즉 물질적 가난이 극단적인 마음의 가난을 초래하고, 이렇게 된 이들이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런 가난한 사람을 위로하고자 했다. 양극화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이 한번쯤 고민해봐야 할 '윤리적 지침'을 그가 2천년 전에 설파했던 셈이다.
하비 콕스는 산상 수훈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대목으로 항상 끝맺는다. 이 대목에 대해 처음에는 이런저런 해석을 덧붙였으나, 나중에는 학생들이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감을 잡게 되었다. 그가 이 대목을 조용히 읽으면 강의실에는 심오한 침묵이 흘렀다. 이 대목을 수없이 읽었을 우리나라의 그 많은 예수를 따르는 신자들은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가?
"내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마태복음 5:43~47)"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비 콕스는 예수의 가르침을 현대 사회의 윤리적 통찰과 연결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끊임없이 질문을 해봐야 한다. 도대체 예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이런 상상력이야말로 1세기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21세기의 윤리적 잣대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넓혀준다는 것이다.
특히 하비 콕스는 수전 니먼의 말을 인용해 현대 윤리의 가장 심각한 딜레마를 '비인격성'이라고 지적한다. 예전에는 나쁜 생각과 나쁜 행동이 가까운 곳에서 같이 일어났지만, 현대 사회가 복잡해지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더 이상 악한 '의도'에만 초점을 맞출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 채, 악을 저지를 가능성 속에 노출돼 있다.
과학기술자가 선의를 가지고 시작한 과학기술 연구개발이 끔찍한 살상 무기로 이어지거나, 힘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기업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더구나 요즘 과학기술자들은 온갖 장밋빛 전망으로 대중을 호도하면서, 의식적으로 이런 일에 협조하고 있기도 하다.
하비 콕스는 이런 상황이야말로 예수의 삶을 '상상력'을 통해 나의 삶에서 재구성하면서 끊임없는 의식화와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충고한다. 더 나아가 예수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위해 해 왔던 일들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택하기까지 한 '실천'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한다.
하비 콕스와 20여 년 동안 한 학기를 함께한 많은 학생들은 이미 미국 또 전 세계의 주류로 진입해 있을 것이다. 이 소중한 경험이 그들의 삶에 어떻게 작용했을까? 이 책을 직접 읽고 확인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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