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신항만과 인천 국제공항 등 대형 국책사업 공사가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은 약한 지반 위에 그대로 진행돼 지반이 내려앉는 등 안전사고의 위험이 높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일선 현장에서는 여전히 부실 배수재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확산될 전망이다.
***배수 공사 부실로 가라앉는 부산 신항만-인천 국제공항**
21일 건설교통부와 건설업체 등에 따르면, 언론 보도와 국정감사 때 문제점이 수차례 지적됐음에도 불구하고 부산 신항만과 인천 국제공항 등 대형 국책 사업의 배수 공사에 논란이 된 배수재 필터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약한 지반을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 땅 속의 물을 빼내는 배수 공사는 땅 아래 수십m 깊이로 배수재로 꽂아 배수재 주변의 물이 배수재로 흡수돼 땅 밖으로 배출하도록 한다. 이 때 배수재가 주변의 물을 흡수하지 못할 경우, 배수 공사가 제대로 안 돼 나중에 지반이 내려앉는 등 안전사고의 위험이 크다. 특히 국내 건설업체들은 그 동안 구멍의 크기가 큰 배수재 필터를 사용해 물의를 빚어왔다. 이 경우 물과 함께 흙 알갱이도 필터를 통과해 배수재가 배수 기능을 못 하게 된다.
실제로 국내 건설업체들의 이런 부적합 배수재 필터를 사용한 부실 배수 공사는 국내외에서 큰 문제점으로 지적돼 왔다. 단적으로 부산의 녹산 국가 산업단지의 경우 단지 내 지반 침하가 끊이지 않아 공장 신축에 차질을 빚는 등 입주업체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다. 1만8천 평 규모의 공장을 짓기로 한 한 대기업은 현재까지 지반을 다지는 데만 7억원 이상을 들였다.
<사진 1> 배수 공사 현장.
***잇따른 문제제기에도 '불량' 의심 배수재 그대로 쓰여**
<프레시안>이 배수 공사 시공업체 등에 확인한 결과, 지금 현재 부산 신항만 등 대형 국책 사업 공사 현장에서는 배수재 필터 표면에 칼렌더링(Calendering, 이른바 '곰보 처리')한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기존 배수재의 문제점이 여러 차례 지적되자 건설업체들이 2004년부터 새로운 배수재로 칼렌더링 제품을 수입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배수재는 이미 1997년에 그 문제점이 지적돼 사용이 중지된 것이어서 새로운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현재 쓰이는 칼렌더링 제품 역시 실제 구멍의 크기는 기존 필터와 별 차이가 없다. 물과 함께 흙 알갱이가 그대로 통과되는 문제점은 그대로 남는 것이다. 더구나 칼렌더링한 표면의 30%는 아예 물을 흡수할 수 없어 기능 면에서는 오히려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림1> 문제가 된 필터(왼쪽)와 새로 사용하기 시작한 필터(오른쪽)의 비교. 표면에 칼렌더링 처리를 했으나 구멍 크기는 똑같아 물과 함께 흙 알갱이가 들어오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오히려 새로 쓰기 시작한 것은 물이 통과할 수 있는 표면적이 70% 정도로 줄어들어 배수 기능이 더 떨어진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기업들이 배수재 필터의 구멍 크기 통과 시험이 문제가 되자, 편법으로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기능이 떨어지는 배수재 필터를 도입한 것이다. 실제로 시방서에 명시된 시험을 정상적으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가격이 1.5배나 비싼 필터를 사용해야 하나, 이렇게 칼렌더링한 필터를 사용할 경우 시험을 통과한 것처럼 눈속임이 가능하다.
실제로 부산 신항만의 경우 애초 시방서에서는 칼렌더링한 배수재 필터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시방서에서는 시방서 변경 절차도 없이 이 내용이 갑자기 빠지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7~9년 전 두 차례나 문제점 지적돼**
더 충격적인 것은 정부와 관련 업체에서 이미 7~9년 전에 이와 같은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97년 건교부 산하 한국토지공사 토지연구소는 <연약지반의 처리공법과 침하측정에 관한 연구>에서 "기업들이 제조원가를 낮추기 위해 중량이 작은 필터 재료를 사용한 후 시방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필터 표면을 1~2㎜ 원형으로 녹여 칼렌더링하고 있으나, 이렇게 칼렌더링한 부분은 물이 통과할 수 없어 '투수 면적'을 감소시킴으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칼렌더링 배수재 필터가 국내에 처음 소개돼 사용된 1993년부터 여러 차례 문제점이 지적돼 왔던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특히 1995년에는 삼성중공업 건설기술연구소와 한국지반공학회가 공동으로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 연구 역시 "(칼렌더링) 제품과 같이 유효 구멍 크기가 작은 경우 막힘 현상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칼렌더링 배수재 필터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7년 전부터 해외 전문가들도 그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미 1997년 관련 전문가인 네덜란드의 블레어 로스 박사는 <국제토목학회지>에서 "제조 원가를 낮추기 위해 필터 표면을 지름 1~2㎜ 원형으로 녹이는 칼렌더링을 하고 있는데, 이런 처리는 녹은 부위가 물이 통과되지 않아 투수 면적을 감소시킨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YTN에서 로스 박사에게 직접 확인한 결과, 현재 국내에서 사용중인 배수재 필터가 논문에서 지적된 바로 그 문제의 필터임이 밝혀졌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미 싱가포르에서는 1990년대 중반 칼렌더링 배수재 필터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사용이 중지됐다. 배수 공사가 제대로 안 될 경우 치명적인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2> 1997년 한국토지공사 토지연구소는 칼렌더링 처리의 문제점을 공식으로 지정했다.
<사진 3> 1995년 삼성중공업 건설기술연구소와 한국지반공학회가 공동으로 조사해 발표한 연구에서도 "칼렌더링 제품은 배수 기능에 문제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원제조사 "배수 기능에 문제 없다" 해명했지만...**
이런 국내외의 의혹 제기에 대해서 배수재 필터를 국내에 수출하고 있는 원제조사 D사는 "칼렌더링 배수재 필터도 배수 기능에는 문제가 없다"고 해명하고 있어 앞으로 공방이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
D사의 해명과 달리 배수재 필터의 칼렌더링 부분과 일반 부분을 전자 현미경으로 찍어(100배, 500배), 사진을 대조해 보면 칼렌더링 처리된 부분은 섬유와 섬유의 선들이 녹아 달라붙어 있어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일반 부분은 섬유와 섬유의 선들이 선명하게 구분돼 구멍이 보임을 알 수 있다. 전자 현미경 사진 결과만 놓고 보면, 칼렌더링 부분의 투수성에 문제가 있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사진 3> 일반 부분(왼쪽)과 칼렌더링 처리된 부분(오른쪽)을 비교하면, 칼렌더링 처리된 부분은 섬유와 섬유의 선들이 녹아 달라붙어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D사의 설명은 다르다. D사는 최근 YTN에 보낸 답변에서 "2차 칼렌더링은 섬유의 연결 정도를 높이는 것이지 섬유를 녹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멍이 더 작아지는 것은 아니"라면서 "(전자 현미경 사진의 경우) 100배, 500배는 너무 좁은 부분만 볼 수 있기 때문에 15~50배 전자 현미경 사진을 통해 더 넓은 부분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D사는 또 "필터의 3차원적 구조(두께)도 기능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단순히 필터 표면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기능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반박했다.
***장관이 특별감사 약속한 건교부, 2달이 지나도록 감사 결과도 내놓지 못해**
D사가 원제조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해명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것은 정부 기관의 몫이 될 것이다. 하지만 건교부 등 관련부처들은 1년이 다 되도록 이 문제가 여러 차례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늑장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 지난 10월 국정감사 때 이 문제에 대해 강동석 건교부 장관이 특별 감사를 약속했지만, 건교부는 2달이 지나도록 감사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어 그 배경에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건설업체들 눈치를 보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건교부 관계자는 20일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현재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세 가지로 정리해 조사를 하고 있다"며 "종합적인 검토 결과는 1월에 나올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지만 종합적인 결론을 내리기 전에는 공개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건설업체들은 국가의 반영구적인 재산이 될 기반 시설의 안전성과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부실 배수 공사에 앞장서고, 정부는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 현실. 건설 강국 대한민국의 현 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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