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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아이들이 잘 어울려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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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아이들이 잘 어울려 살 수 있을까"

산골 아이들 <4> 어울려 살기(上)

지난번 글을 보고 우리 아이들 사회성을 묻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는 사회성에 관한 글을 쓰려고 준비했는데, 그 댓글에 힘을 얻어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조금 길어져 두 번에 나누어 싣겠습니다. 필자.

***아이들 사회성 걱정**

아이들을 데리고 산골로 가 산다면 '동네에 또래가 있느냐?'고 물어온다. 없다면 걱정을 하신다. 좀더 논리적으로 사회성을 걱정하는 이도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살기 전에 누군가가 아이를 산골서 게다가 학교도 보내지 않고 키운다고 했다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걱정을 했을 거다. 하지만 살다 보니 우리가 그렇게 별나게 살고 있고, 게다가 그런 삶에 만족하고 있는 걸 어쩌랴.

그렇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 어떨까? 글을 쓰다 말고 옆집을 찾아갔다. 그 집은 우리 아이들을 가까이서 7년째 보고 있다. 옆집에는 마침 다섯 살 딸을 둔 다른 이웃도 와 있었다. 우리 아줌마 셋은 우리 아이들 사회성을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탱이가 먼저 도마에 올랐다. 탱이는 합격점, 상상이는 '아직 좀~'. 우리 아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른 아이들 이야기도 나왔다. 사회성이란 잣대를 놓고 보니 아이마다, 아이가 자라는 가정환경에 따라 다 달랐다. '자연에서 그리고 집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일반화시키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야기는 엉뚱한 데로 튀어나갔다. 한 분이 자신의 어린시절을 보기로 들면서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나왔다. 주인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병 꺼내고 우리는 낮술을 한 잔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이들 사회성에 대한 이야기는 자기 자신의 사회성으로, 그리고 성장과정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집으로 돌아오며 내 어린 시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나는 도시에서 모범생으로 학교를 마쳤는데 그럼 나는 사회성이 좋은가? 우리 아이들 이야기에 앞서 이 아이들의 엄마인 내 이야기를 털어놔야 할 시점이다.

***아이들 이전에 내 사회성은?**

어린 시절 그러니까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내가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인간관계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여자 아이들 사이에 패가 갈리고 패마다 우두머리가 있었다. 어느 순간 내가 외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쩌겠나. 그걸 벗어나려고 어느 한 패에 들어가려 노력했지. 그런데 결과는 그리 신통치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10월 유신과 함께 시작한 중학교 생활. 무시험 배정인 이른바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한 내 학창시절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집부터 학교까지는 버스를 두어 번 갈아타고 한 시간을 가야 했기에 친구들과 방과 후에 어울릴 시간도 많지 않았겠지만, 나 역시 내 세계에 갇혀 지냈다.

대학에 들어가 우연한 기회에 좋은 선배를 만나, 모임을 가 보았다. 거기 분위기가 어찌나 좋던지.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고. 돈이 있거나 없거나 함께 먹고 어울리던 지금 말로 하면 공동체 정신이 살아있는 곳. 그 모임이 참 좋았다. 열심히 나갔고, 그 시절 그런 곳에 열심이었으니 어느새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사회에 나와서는 직장에 마음 맞는 동료가 있으면 어울려 다니고, 결혼 뒤에는 비슷한 처지에 있던 아줌마들과 어울려 마음을 주고받기도 했고, 귀농한 뒤 이웃집 아줌마들과 언니 동생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러나 그건 내 사회성 덕이 아니라 어쩌다 내가 좋은 사람들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언제나 사람 사이에서 늘 엉거주춤했고, 내 뜻하고 다르게 크고 작은 부딪침이 있어 때론 상처를 주고받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한마디로 나는 사회성이 그리 좋지 못한 사람이다.

저녁을 먹으며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이 나한테 "반장은 해 보았어?", 하고 묻는다. 학교 때 사회성이 좋다는 게 반장이지 않은가. 창피하게도 나는 반장을 해 보지 못했다. 남편은 다시 "후보추천은 받아 보았느냐?"라고 짓궂게 묻는다. 더는 밀리기 싫어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동아리 대표한 이야기를 끌어다 댔다.

***나 자신과 공동체**

나는 왜 사회성이 그다지 좋지 못한가? 철들면서부터 사회성은 늘 내 화두였지만 농사를 하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그러기에 나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많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자기도 모르게 지난날을 돌아보고 그때 왜 그랬는지 생각하게 된다.

사회성을 사전에 찾아보니 '사회에 적응하는 개인의 소질이나 능력, 대인 관계의 원만성 따위이다'라고 나온다. 여기서 내게 문제가 되는 건 '대인관계의 원만성'이다. 대인관계의 원만함. 나 역시 그걸 바란다. 그런데 나는 남편과, 아니 나 자신과 원만하지 못했다. 내 마음이 내 몸을 마구 부려, 몸 생각하지 않고 악착같이 해야 했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때는 왜 그리 집착을 했는지. 아침이면 느긋하게 똥 눌 시간을 주지 못했고, 늘 종종거리며 뭔가 뜻있게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스스로를 다그치고, 때론 혹사하고. 자기 기대에 못 미치니 자신을 깎아내리기도 했다. 내가 나 스스로 평화롭지 못하니, 남편과도 부창부수하면서 살지 못했다. 남편과 이십여 년 살면서 얼마나 싸웠는가!

이제 산골 생활에 자리가 잡히고 나 자신을 돌아보곤 한다. 요즘은 아이들 눈치가 보여 전처럼 싸울 수도 없지만 싸울 거리가 생겨도 서로 웃고 넘어간다. 그러다 보니 집안이 화목해지고 평화로워진다.

아이들한테는 어땠는가? 탱이는 내가 도시에서 그런대로 활기차게 뻗어나갈 때 태어나, 탱이 덕에 의욕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다. 또한 탱이는 외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편안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거기 견주면 상상이는 내가 가장 흔들릴 때 태어났다. 상상이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시골로 왔고, 조금 적응할 만할 때 다시 옮겨야 했다. 낯선 시골 생활에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편과 부딪쳤다. 내가 평화롭지 못하니 나도 모르게 아이를 부담스러워했고, 아이 욕구를 읽고 그때그때 풀어줄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배운다**

그것뿐인가. 아이들이 자라는 걸 보면서 아이들에게 배운다. 탱이가 지난겨울에 하는 말이 사회성은 자기 몸이 건강한 만큼 생기는 것 같단다. 자기 몸이 건강하면 남이 뭐라 해도 웃어넘기는데, 몸이 피곤하면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더란다. 이 간단한 진리를 이 나이가 되도록 몰랐구나. 내 힘에 부치게 일한 날 저녁에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내면 탱이가 받아준다. 그리고 나중에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한다. "'건강한 내가 받아줘야지' 하고 받아준 거예요."

탱이 덕에 아, 내가 지금 짜증을 내고 있구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내가 너무 잘하려 하는구나. 그럴 때는 하던 걸 탁 놓고 딴 짓을 한다. 글을 쓰다가는 논밭에 가고, 논밭에서 일을 하다가는 집에 돌아와 쉰다. 내 경우는 스스로 원만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보다 그걸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 놔두니 좋아지는 듯하다. 오랜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지만 이제는 자신을 다그치지 않고 편안하게 해 주려 한다.

그래도 살다 보면 속상한 일이 있곤 하지. 그러면 내가 하소연하기 가장 좋은 사람은 탱이다. 식구니 앞뒤 설명을 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는지 대번 안다. 탱이는 내 하소연을 들어주고, 또 솔직하게 이야기 해준다.

'엄마, 엄마를 누구랑 비교하지 마. 엄마는 엄마로 소중해.'
'엄마가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는지 마,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요.'

살면서 내게 자신을 차분하게 돌아보게 해 준 사람은 탱이가 처음이다. 남편도 했지만 남편 말은 비판으로 들렸고, 친구도 했겠지만 못 알아들었겠지. 하지만 자기 자식이 하는 말은 가슴을 울린다.

남편을 많이 닮은 아들 상상이. 남편에 대한 내 불만이 상상이에게 날아들곤 했다. 집안을 어지른다고, 옷 단정히 못 입는다고, 자세가 바르지 못하다고……. 상상이가 제법 컸나 보다. 이제 상상이까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엄마는 완전 공주야", 하면서 그 까닭을 댄다.

"첫째, 막내니까. 둘째 이름이 꽃이니까(英蘭). 셋째 아버지는 머슴이고, 누나는 시녀고, 그럼 나는……. 나는 고양이네. 엄마가 비비고 끌어안고……."

내 비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비밀. 스스로가 잘 났는지 아는 병. 남이 나한테 잘 해주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병. 이런 병을 단칼에 들이댄다. 탱이는 조심스레 내 스스로 깨닫게 한다면 상상이는 한마디로 끝낸다.

우리 아이들을 보면 집에서 혼자 지내는 일이 마음공부 시간인 듯하다. 학교에 다니며 친구들, 선생님과 부딪치며 마음공부를 해 자신을 알아 갈 수도 있지만, 집에서 혼자 지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예부터 도를 얻으려 사람들이 산에 올랐겠는가? 혼자서 심심함을 이겨내려면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혼자서 하루를 보내려면 스스로를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되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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