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군사논평원의 글에서 "(천안함 침몰) 북 관련설은 날조"라며 "허황한 '북 관련설'을 내돌리고 있는 역적패당의 불순한 음모가 있는 것"이라고 강변했다.(☞관련 기사 : 北 "천안함 '북 관련설'은 날조"…첫 공식 입장 표명)
그러면서 군사논평원은 글 말미에 △국회의사당 방화사건(1933년, 독일) △로구교(盧溝橋. '루거우차오'의 북한식 호칭) 사건(1937년, 중국) △바크보만('통킹만'의 북한식 호칭) 사건(1964년, 베트남)을 거론했다.
북한이 언급한 이 사건들은 20세기 세계사에서 조작으로 드러났거나 조작 의혹을 받았던 대표적인 것들이다. 북한이 이 사건들을 거론한 것은 천안함에 대한 자신들의 연루를 부정하는 동시에 이번 일이 남측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을 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은… 나치에 독재의 길을 열어준 사건이다.
▲ 방화로 불타고 있는 독일 국회의사당 라이히스타그 (1933년) |
발생 2시간 30분이 넘어서야 진화될 정도로 격렬했던 불은 이후 방화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범인으로 네덜란드 공산당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는 판 데어 루페라는 네덜란드 청년이 지목됐다. 그는 즉시 범행을 자백한다.
나치는 방화범 루페의 공산당 활동 전력을 빌미로 공산주의자들이 곧 봉기를 일으킬 것이며 공산당 통치 체제가 찾아올 거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에 화재 다음날부터 독일에 있는 공산당 각 지역 지부를 압수수색하고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나치 반대 지식인 5000여 명을 체포하는 등 공안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 과정에서 나치는 공산주의자들이 봉기를 모의한 증거가 있는 문건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문건이 실제로 세상에 드러난 적은 없다. 범인으로 지목됐던 청년 루페는 처형당했지만 공범으로 몰렸던 세 명은 석방된다.
당시 독일은 총선거(3월 5일)를 앞둔 상황이었고 히틀러는 '전권(全權) 위임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나치당을 법률 통과에 필요한 의석 수(전체 의석의 2/3)만큼 당선시키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전권위임법은 총리가 의회의 동의 없이 법률안을 의결할 수 있는 사실상의 초법 권한이다.
1월까지 의석의 32%만을 차지하고 있던 나치는 의사당 화재 이후 격렬하게 몰아붙인 선전전의 덕을 입어 총선에서 44%를 득표했고, 군소정당을 협박해 이 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히틀러의 바람대로 정당들이 해체되고 의회·지방의회가 해산됐다.
루페가 의사당에 불을 혼자 냈는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저질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나치에는 절묘한 타이밍의 '행운'이었다는 것이 역사의 평가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중국 본토 침략을 노리던 일본군은 1936년 10월부터 베이징(北京) 남서쪽 교외의 융딩(永定)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루거우차오(盧溝橋) 부근에서 훈련을 펼쳤다. 이에 중국 국민혁명군도 이 다리를 기준으로 동쪽에 진지를 마련,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1937년 7월 7일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된다.
사라진 병사는 곧 귀대했지만 일본군은 중국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중국 주둔 지역으로 일본군을 보내 수색하겠다고 요청한다. 중국이 이를 거절하자 일본군은 바로 다음날 중국군 진지를 공격해 루거우차오를 점령한다. 격렬히 대치하던 양측은 사흘 후 중국의 양보로 현지 협정을 맺어 사태를 일단락 짓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협정을 깨고 루거오차오에 군대를 증파했고, 28일 베이징과 텐진(天津)에 대한 총공격을 펼친다. 나아가 확전을 감행, 12월 13일에는 난징(南京)에서 30만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렇게 시작된 중일전쟁은 이후 8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국제 역사학계는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에 앞서 단초를 마련하기 위해 이 사건을 스스로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고 있다.
● 통킹만 사건은… 미국의 베트남전 전면 개입을 시작하게 한 사건이다.
미국은 1964년 8월 2일 베트남 통킹 만 공해에서 작전 중이던 자국 해군 구축함 매독스호가 북베트남 어뢰정으로부터 선제공격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매독스호가 즉시 반격을 가했으며, 5일 북베트남 어뢰정 1척을 격침시키고 2척을 손상시켰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의회와 여론은 충격에 휩싸인다.
▲ 통킹만 사건으로 공격을 당한 구축함 매독스호 |
그로부터 닷새 뒤인 7일 미국 하원은 '통킹만 결의'를 414대 0으로 통과시킨다. 상원도 결의안을 88대 2로 지지했다. 미국은 원래 베트남전에 개입하고 있었지만, 통킹만 결의가 통과되면서 전면적인 개입을 하게 된다.
린든 B. 존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즉각 미 해군에 북베트남 해군 기지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965년 2월에는 베트남에 미 해병대를 보내고 B-52 폭격기를 동원하기 시작하는 등 미국의 베트남전은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이 결의 이후 약 200만 명의 베트남 사람이 피해를 보고 5만 8000여 명의 미군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2005년 로버트 한요크 미국국가안전국(NSA) 역사연구관의 비밀보고서는 통킹만 사건 당시 NSA 감청 요원들이 정보 왜곡이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북베트남 폭격을 지시했던 로버트 맥나마라 당시 미 국방장관도 그보다 10년 전인 1995년 통킹만 사건이 자작극임을 고백한 바 있다.
2007년 <뉴욕타임스>는 미 국방부의 비밀 보고서인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해, 미 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베트남전 확전을 위한 명분으로 이용했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폭로했고 결국 이 사건은 '자작극'의 대명사처럼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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