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미국 워싱턴DC 한복판의 워싱턴 컨벤션센터 인근에는 유대교 모자인 '키파'를 쓴 남성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컨벤션센터 건물 전체가 경호원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목에 명찰을 건 사람들만 입장이 가능했다. 언론 출입증을 사전에 신청해놓았던 기자도 이날 언론인 전용 출입구에 가서 출입증을 받고 입장했다.
간단한 검문검색까지 거쳐 입장한 컨벤션센터에는 목에 다양한 색깔(회원 등급 별로 줄의 색깔을 달리했다)의 명찰을 건 컨퍼런스 참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시민로비단체로 꼽히는 '미·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의 2020 연례 총회 현장이다.
미 정.재계를 쥐락펴락하는 AIPAC
AIPAC은 엄청난 로비력으로 미국의 정.재계를 쥐락펴락해서 '신의 조직'으로까지 불린다고 한다. 이 단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하루라도 빨리 전쟁에 개입했으면 유대인 수만명의 목숨을 홀로코스트로부터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자각으로 미국 내 유대인들 1947년 설립했다. AIPAC은 지난 1968년부터 매년 워싱턴DC에서 컨퍼런스를 개최해왔고, 매년 참가자가 늘어 올해는 2만여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미국 인구의 3%에 불과한 유대인들이 AIPAC을 통해 미국 정.재계를 움직이는 힘은 이처럼 엄청난 '동원력'과 '돈'이다. 올해 총회 모금 목표액이 4억 달러(약 4764억 원)라고 한다. 잘 알려졌듯이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 기업, AIG, 씨티그룹, 골드만삭스, 모건 스탠리, 메릴린치 등 금융기업, 유수의 석유화학기업, 헐리우드 영화제작사 등 미국 기업 어디에도 유대인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돈'의 힘만은 아니다. 이날 총회장 곳곳에는 AIPAC 활동가로 자원봉사할 사람들을 모집하는 창구를 볼 수 있었다. "미국의 유대인들이 전 세계 유대인의 안녕을 보장해야 한다"라는 사명을 강조하는 AIPAC은 미래 세대들을 대상으로 교육과 투자를 통해 지속성과 자발성을 이어가려고 한다. 매년 이스라엘 대학생과 미국 전역의 유대계 대학생들을 총회에 초청하는 등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
이번 총회에서도 AIPAC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3월 1일부터 2박3일 동안 진행된 총회에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 마이클 폼페이오 국무장관,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케빈 맥카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스탠리 호이어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등 트럼프 정부와 상하원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연설했다. 펜스 부통령은 연설에서 "우리는 오늘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다른 어느 때보다 굳건하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트럼프 정부 하에서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는 것을 전 세계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대선주자들 중에서는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이 직접 참석했고, 조 바이든 전 부통령과 에이미 클로버샤 상원의원은 동영상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스라엘 쪽에서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스카이프를 통해 생중계 연설을 했다. 또 켈스티 칼률라드 에스토니아 대통령, 이반 듀케 메르케즈 콜럼비아 대통령, 펠렉스 치세케티 콩고 대통령, 알렉산더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 등 외국 정상들도 참석했다.
미 부통령도 의회 지도자들도 '친 이스라엘' 발언 쏟아내
일반 세션 이외에 사전에 신청을 받아 진행하는 세션들도 컨벤션센터 곳곳에서 진행됐다. '중국의 성장이 이스라엘에 미칠 영향', '의회에서 친 이스라엘 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중동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의 변화', '이란과 이라크 관계', '이란 제재의 영향과 효과' 등 이스라엘과 중동 정세에 대한 주제가 다수였지만, '2020년 미국 대선에 라티노들이 미칠 영향', '미 의회 성소수자 모임 소속 의원들과의 대화', '선거에서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등 일반적인 주제도 섞여 있었다.
참석자들끼리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친해질 수 있도록 마련한 '빌리지'도 있었다. 컨벤션센터 지하 1층 전체를 터서 초청 정치인들과 진행하는 토크쇼를 구경할 수 있는 공간, 각종 전시 공간,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파는 공간 등을 마련했다. 여기서 진행되는 토크쇼에서 의원들은 "이스라엘에 가봤냐", "이스라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냐"는 등 이스라엘에 대한 우호적인 발언을 할 수 밖에 없는 질문을 받고 답을 했다. 2일 오후 엘리엇 엥겔 하원 외교위원장(민주당)과 마이클 맥콜 외교위원회 간사(공화당)는 함께 무대에 올라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철저하게 "초당적인 이슈"라고 다짐을 했다.
유대계 출신 샌더스 등 AIPAC 공개 비판
이처럼 엄청난 힘을 자랑하는 AIPAC은 그에 못지 않게 큰 비판을 직면하고 있다.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인 버니 샌더스 의원은 지난달 23일 "이스라엘인은 평화·안전 속에서 살 권리가 있고 팔레스타인 역시 마찬가지"라며 "나는 편견을 표출하고 기본적인 팔레스타인의 권리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에게 AIPAC이 플랫폼을 제공하는 데 대해 우려하기 때문에 그 컨퍼런스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
샌더스 의원은 유대계 출신이지만, 오래 전부터 미 의회가 친 이스라엘 조치를 취할 때마다 부정적인 입장을 밝혀왔다. 샌더스 의원은 특히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반대 입장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해 팔레스타인 주민 300만 명 가량이 살고 있는 요르단강 서안 지역을 합병하겠다고 밝히는 등 '전쟁주의자', '인종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샌더스는 지난해 CNN이 주최한 타운홀 행사에서 "나는 반(反)이스라엘이 아니다"라며 "하지만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극도로 불공정하게 대하는 우파 정치인"이라고 현 이스라엘 정부와 선을 그었다. 그는 이어 "나는 미국이 중동을 동등하게 다뤄야만 한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AIPAC에 대한 비판 발언은 샌더스가 처음이 아니다. 일한 오마(민주당, 미네소타37) 하원의원은 지난해 2월 "외국(이스라엘)에 충성을 강요하는 (특정 단체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발언해 미국 정계가 발칵 뒤집어지기도 했다. 소말리아 난민 출신인 오마 의원은 최초의 무슬림 여성 의원이다. 그는 "정치인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은 AIPAC의 돈 때문"이라고도 비판했다.
오마 의원은 민주당 내에서도 엥겔 외교위원장 등에 의해 "반(反)유대주의"라는 극렬한 비판을 받았고, 결국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지시로 "유대계 미국인을 불쾌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로비스트의 문제적 역할에 대해 지적하려고 했다"고 사과했다. 이어 하원은 모든 인종차별 발언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지지를 받기도 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당시 "친이스라엘 로비 단체로부터 많은 후원금을 받아온 의원들이 오마 의원 비판에 앞장섰다. 이러한 반응이 오히려 그의 주장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또 AIPAC에 비판적인 입장인 유대계 미국인 1200명도 "AIPAC의 유해한 역할을 지적하는 것이 반유대주의는 아니다"라며 오마 의원을 지지하는 서한을 발표했다.
AIPAC에 맞선 진보성향의 미국 내 유대계 시민단체인 'J스트리트'도 지난 2008년 창립해 점차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J스트리트'는 AIPAC과 정반대 입장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을 정책 목표로 하고 있다.
AIPAC 총회에는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샌더스는 지난해 10월 열린 'J스트리트' 총회에 참석했다. 샌더스는 이 자리에서 "네타냐후 정부를 인종차별주의라고 지적하는 것은 반유대주의가 아니며, 이는 엄연한 사실"이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경우,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38억 달러 규모의 군사원조를 팔레스타인과의 협상과 연계하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지난 'J스트리트' 총회에는 민주당 대선 주자 중에는 피트 부티지지 전 사우스밴드 시장, 줄리언 카스트로 전 주택도시개발 장관 등도 참석했고, 엘리자베스 워런 의원은 영상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AIPAC 총회에 축하 메시지를 보낸 바이든, 클로버샤 두 후보는 일정을 이유로 불참했다.
트럼프 정부 이후 심화된 공화-민주 갈등도 입지 좁혀
AIPAC은 '미국' 내 유대인들의 이익단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 내부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AIPAC의 '친 이스라엘' 정책의 방향성이 네타냐후 총리의 노골적인 '전쟁주의' 노선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에 트럼프 정부 들어 심화된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도 AIPAC과 같은 단체의 활동을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상황 변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 9월 "민주당(후보)에 투표하는 유대인들은 완전히 무지하거나, 엄청난 불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발언해 논란이 일었다.
이런 발언에 대해 'J스트리트'는 "역겹다. 미국의 대통령이 75%가 넘는 미국계 유대인들이 불충하거나 지능이 떨어진다는 주장을 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공화당을 지지하는 공화당 유대인연합회(RJC)는 "트럼프 대통령이 옳다. 공화당은 종교적 성향을 이유로 당신들을 증오하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해준다. 공화당은 반유대주의 문제와는 거리가 있으며 선출된 자도자들은 반유대주의를 처벌하기 위해 신속하게 대응한다"라고 트럼프 발언을 옹호했다.
유대계의 풀뿌리 운동 방식을 배우기 위해 1999년 AIPAC 회원으로 가입해서 매년 총회에 참석하고 있는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는 "올해 총회를 참석하면서 이제 AIPAC도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며 "가치와 방향성을 잃고 목표 달성에만 집중하다보니 역풍을 맞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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