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1943년 3월1일 美라디오서 독립운동가의 연설이 흘러나왔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1943년 3월1일 美라디오서 독립운동가의 연설이 흘러나왔다

귀암 김용중 선생 미국 단파 라디오 연설 발굴

미국 뉴욕 콜럼비아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민족운동가 귀암 김용중 선생의 영문자료가 최근에 발견됐다. 101주년 3.1절을 맞아 각계에서 독립운동 사료에 대한 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귀암 김용중선생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가 3일 독립운동가 김용중 선생의 영문 연설문을 공개했다.

이 자료는 1943년 3월 1일 미국 O.W.I(Office of War Information, 전시 정보국) 단파라디오 방송으로 재미 독립운동가를 대표해 김용중 선생이 고국의 동포들에게 보내는 영문메세지다. 이 자료는 최근 번역을 거쳐 87년만에 비로소 세상에 공개됐다.

귀암 김용중 선생은 미국에서 고국의 독립과 통일, 민주화를 염원하며 전 생애를 바친 인물이었다. 그는 재미 한국인으로서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역할을 했던 독립 운동가였고, 해방 이후에는 통일운동가, 민주화운동가로 활동했으며 성공한 사업가이자 언론인이었다.

1898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망국의 한을 품고 18세 때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학문연마를 통해 실력을 양성한 후 이를 바탕으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라'고 했던 몽양 여운형 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권유를 받고 도미(渡美)해 하버드대학교, 콜럼비아대학교, 조지워싱턴대학교, 남가주대학교 등에서 수학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할 역량을 쌓았다.

그는 1940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제5차 대표회의의 중앙상무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했고, 1941년 하와이에서 개최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집행부 선전과장에 선임되어 탁월한 어학실력과 호방한 기질로 대 서방 외교활동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아 활동했다.

또한 워싱턴에 있던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와 협조하여 태평양 전쟁 당시 재미동포들의 신분보장과 미국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노력했다. 1943년엔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 기관지로 한국의 소리(The Voice OF Korea)를 발행해 미국 정관계 및 국제기구의 요인들에게 한국의 실상과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김용중 선생은 성공한 사업가로서 막대한 독립자금을 지속적으로 헌납했고, 미국에 유학 온 한국유학생들에게 많은 장학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남북한 당국 및 국제 사회에 한반도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창하여 한반도의 분단해소와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다.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 투쟁에도 앞장서 미국에서 '한국민족자주통일촉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일로 박정희의 미움을 사 결국 고향땅을 두 번 다시 밟지 못하고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오래도록 잊혀졌던 김용중 선생의 이러한 활동은 외손녀인 김성희 여사(77세)에 의해서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성희여사는 1989년에 사재를 털어 미국으로 가 뉴욕의 콜럼비아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김용중 선생의 영문자료 일체를 넘겨받았고, 이를 보훈처에 제출했다. 2000년, 김용중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고,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에 애국지사로서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귀암의 외손녀인 피아니스트 김성희 여사는 외할아버지의 유지를 이어가고자 현재 '귀암 김용중선생기념사업회'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은 1943년 3월 1일(미국시간으로는 2월28일) 미국의 O.W.I.(Office of War information) 방송국 단파 라디오를 통해 연설한 귀암 김용중 선생의 메시지 일부다.

동포 여러분. 3.1절을 다시 맞이하였습니다. 우리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해방의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전진할 것입니다. 우리는 해방의 염원을 품고 투쟁 의지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어떤 것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독립을 선언한지 2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19년 오늘 우리 동포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조국을 위하여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오직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했을 따름이었는데 잔혹한 일제는 수천 명 애국자들의 팔다리를 자르고 살해하였습니다. 일제는 우리의 학교와 교회를 불태웠으며 도시와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동포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압니다. 우리의 가슴은 희생된 친지와 친구들 생각으로 찢어질 듯합니다. 우리의 귀에는 지금 “만세” 소리가 들립니다. 동포들의 비장하고 결의에 찬 얼굴 모습이 선히 보입니다. 우리는 그 날의 결의로써 이 날을 기념합니다. 지난 38년 간 우리 동포들은 나라 안팎에서 끊임없이 침략자들에게 저항했습니다.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장을 볼 것입니다. 그 모든 어두운 날들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절통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앞을 내다보면 새로운 용기가 솟아오릅니다. 우리는 충분히 당할 만큼 당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시간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희망의 새벽이 터오고 있습니다. 자유의 빛이 시시각각 밝아 오고 있습니다.

지난 석 달 동안에 세계대전의 전세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적 추축국은 이제 수세에 몰리고 있는 반면에 연합국은 전방위적으로 공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최근 연설에서 “동경을 겨누는 방향은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방향을 취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일제의 본거지가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습에 무너지고 연합국 군대가 동경의 시가지를 행진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대열에 합류해야 합니다. 우리가 행동할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 재미 한인들은 한시도 고국의 동포를 잊어 본 적인 없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속에 있습니다. 해방의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 재미 한인들은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운 고국에 계시는 동포 여러분, 왜놈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날이 속히 오도록 같이 기도합시다. 동포 여러분, 만세, 만세, 만만세!

애국지사 귀암 김용중(歸庵 金龍中. 1898.3.2–1975.9.6)선생.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이명선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