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과 반동은 하나의 움직임이다. 2020년 총선에 처음으로 도입되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개혁에 반발한 자유한국당의 후신 미래통합당은 위성정당을 창당했다. 이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기득권 양당체제를 조금이나마 개선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민심을 왜곡하는 행위이다. 준연동형 비례의석 30석 중 70%에 해당하는 의석을 미래한국당이 차지할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올 만큼, 선거제 개혁의 결실이 상당히 훼손될 위험에 처해 있다.
정치가와 시민의 책임윤리
우리나라에서 정치개혁의 핵심은 비례성 높은 비례대표제 도입에 있다. 각 정당이 정당의 실력만큼 의석을 얻게 만들어 다당체제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인 모순으로 인해 정당의 실력보다 과잉하여 의석을 얻어온 기득권 양당의 손해는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기득권인 미래통합당은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정치적 금도를 넘었다. '페이퍼 정당'을 내세우는 유례없는 꼼수를 자행한 것이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정치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며 나아간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해도 끝까지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공동체의 운명을 짊어진 정치에서만큼은 명분이나 선의가 나쁜 결과를 덮어줄 수 없다. 선한 결과를 만들기 위해, 정치가는 개혁의 결과까지 짊어지고, 좋은 결과를 내야만 한다. 막스베버가 말한 책임윤리다. 결과를 위해 명분을 외면하라는 말이 아니다.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정치개혁을 열망한 시민들도 신념윤리 이상의 책임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유례없는 상황 앞에 새로운 해법을, 현실적 방안을 모색해야 할 과제가 던져졌기 때문이다.
지난 2월 28일 시민사회 일각에서 선거연합정당 창당이 제안되었다. 아직은 현재 정치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아이디어 수준이다. 이후 제안은 연합을 위한 협상에서 더 다듬어질 수 있다. 얼마나 기민하게 움직이느냐가 산개한 장벽을 넘는 관건이다.
물론 시민들은 우려할 수 있다. 미래한국당 꼼수를 넘자고 진보판 꼼수를 자행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충분히 타당한 문제의식이다. 그럼에도 선거연합의 문제의식을 무게 있게 봐야 한다.
선거연합의 형태와 사례
외국 사례에서 보듯이, 선거연합의 형태와 사례는 다양하다. 선거용 정당 창당뿐만 아니라 후보단일화(nomination agreement), 공동 비례후보 명부(joint PR list), 분할투표 지시(dual ballot instruction), 선호투표 이양 지시(vote transfer instruction), 연립정부 구성 선언(public commitment to govern together) 등 다양한 방식으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행위며, 정치적 가능성을 무궁무진하게 넓혀주는 정치적 행위이다. 특정 선택지에 고정될 필요 없이, 대안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선거연합과 연합정치
선거연합은 연합정치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연합정치는 선진국 정치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민주주의는 권한의 확장과 분산을 지향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독자적으로 특정 과제를 수행할 수 없을 만큼 개별 세력의 영향력이 작아지게 됨을 의미한다. 필연적으로 협상과 타협, 연합을 기본 전제로 두는 것이다.
이념적으로 가까운 정당 간의 연합도 있을 수 있고, 이념적 거리가 먼 정당과도 교량연합(bridge coalition)이 가능한 것이다. 고정된 이념이나 명분의 틀을 넘어서 정치 과정을 구성해 갈 때, 현실 속 변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특히 민주주의 수준이 높을 때, 어려운 정책적 과제를 온전히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탈성장 정책 같은 급진적 과제나 복지국가 이행 같은 구조적 과제를 독자 세력화로 수행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유럽 선진국의 복지체제는 다당체제에 기반하여 다양한 연합정치가 만들어낸 정치적 산물이다. 비례성 높은 비례대표제는 다당체제를 구성하고, 궁극적으로 연합정치를 견인하는 것이다.
고도화된 연합정치는 합의제 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를 향해간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뿌리 깊은 사회적 균열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하다(Blondel 1993). 민주주의가 고도화되면, 갈등을 드러내며 상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봉합하고 공동체를 통합하는 능력이 발휘된다는 의미다.
연합정치는 연합구성의 시기와 목표에 따라 크게 선거연합과 연정연합으로 나눌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선거연합과 연정연합은 독자적으로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거연합과 연정연합을 구분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연합정치는 과정이다. 선거연합과 연정연합의 수행과 결합 정도는 연합하는 정당들의 협상에 따라 달라진다. 협상장에 들어가기 전에 공동의 규칙을 선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연합을 위한 논의가 빠르게 시작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대통령제와 선거연합
선거연합은 의원내각제의 틀 속에서 적합한 방법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니다. 의원내각제든 대통령제든 통치집행제도(executive system)의 종류와 무관하게 연합정치의 움직임 자체가 기득권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의회의 선거제도(election system)는 양당제냐 다당제냐를 결정한다. 그리고 다당제일 경우 연합정치와 친연성이 높아진다. 다당제와 연합정치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개혁의 우선순위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개혁 논의에 있어서 첫 단추는 항상 선거제도 개혁이 되는 것이다. 한국 통치집행제도가 대통령제라 하여 한국에서 연합정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우려는 기우일 뿐이다.
대통령제 아래에서도 의회 다수파 형성을 위한 연합정치는 빈번하게 발생한다. 체이법(Cheibub, Prezeworski, and Saiegh 2004), 니그레토(Negretto 2006) 등 국외의 학자들과 국내 학자들(홍재우, 김형철, 조성대 2012)의 연구에 따르면, 대통령제를 시행하는 국가에서도 평균적으로 50% 이상이 의회 다수파 구성을 통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등 연합정치가 발생했다. 심지어 대통령제 하에서 연립정부가 만들어내는 정치적 결과물이 불안정한 소수파 정부가 산출하는 것보다 훨씬 안정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정치적 상상력을 제도적 틀에 가두어 둘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선거법 개정의 취지를 살리는 연합정치여야
지금 진보진영 앞에 놓여진 선거연합 논의,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소선거구제 중심의 제도적 환경 속에서도 지역구에 여러 후보를 내서 지역정치를 일구려는 정당의 경우 선거연합에 참여하기 위해 검토해야 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연합의 방법은 다양하게 모색할 수 있다.
단, 여기서도 원칙을 지키자. 이번 연합정치 논의는 양당 기득권을 넘어선다는 원칙, 이와 연동해 소수정당의 비례대표성을 보장하여 원내 진출을 최대화한다는 애초 선거법 개정의 취지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
('내만복칼럼'은 복지국가 발전을 위한 다양한 논의를 담습니다. 필자의 글이 '내가만드는복지국가'의 공식 입장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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