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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혐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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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혐오'는 없다

[인터뷰]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혐오섞인' 표현, '혐오적인' 표현, '혐오스러운' 표현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세월호 단식 농성장에서 '일베' 회원들이 일명 '폭식 투쟁'을 한다며, 피자와 치킨 등을 배달해 먹기도 했다. 단식 농성을 하는 세월호 유가족을 조롱하기 위해서다.

한국 사회를 마비수준으로까지 몰고 간 '코로나19'로 혐오 표현은 서슴지 않고 표출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코로나19'를 '우한 폐렴'으로 여전히 칭하고 있다. 중국인과 신천지 교인을 두고는 온오프 가리지 않고 혐오 발언이 쏟아진다. 물론, 자정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진보진영에서는 혐오가 이번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되레 협조를 받아야 하는 집단 내지 개인들을 음지로 들어가게 한다는 주장이다.

혐오 표현이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줄 지는 모르지만, 사태의 본질을 회피하고, 한 발 더 나아가 악화시킨다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한다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다. 우리 사회가 혐오에 지배됐다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다.

진보운동도 예외는 아니다. 일례로 작년 12월, 광화문 광장에는 무릎꿇은 전두환의 동상이 세워졌다. 12·12 쿠데타 40주년을 맞아 전두환이 감옥에 갇힌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상이었다. 5.18단체들이 주도했다. 그렇게 세워진 전두환 조각상은 이후 광화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길질을 하고 머리를 때려서 깨지기도 했다.

지난 2월에는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려는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의미로 아베 총리 얼굴에 붉은 손도장을 찍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2018년에는 한 대학생 단체가 북한에 강경한 '매파' 인사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전두환의 머리를 때리고 아베의 얼굴에 손바닥 낙인을 찍고 매파 인사를 교수형에 처하면 속은 시원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되레 전두환·아베 개인에 국한한 분풀이로 끝날 수 있다. 혐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거부감이 드는 방식을 선택해 대중에게 외면받는 건 덤이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퍼포먼스가 중대한 문제를 보여주는 방식인가"라고 공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을 시작으로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를 만나 '운동에서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다음은 일문 일답.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프레시안(최형락)

"표현이 개인 혐오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프레시안 : 페이스북에 '진보 운동에도 혐오에 대한 경계가 무너져있다'고 썼다. 이게 무슨 뜻인가.

박진(이하 박) : 매티스 전 미국 국방장관이 방한했을 때다. 한 진보단체에서 그를 교수형에 처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인형을 만들어 그의 얼굴 사진을 붙이고 매단 것이다. 그가 미국 '매파'(북한에 강경한 입장)에 속하고 한반도 평화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관료인 것은 맞다. 하지만 표현하는 양식이 혐오를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소름끼쳤다. 반전평화집회 내부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지적될 정도였다.

광화문에 있는 전두환 동상도 그런 사례라 생각한다. 그가 무릎꿇고 있고 사람들이 때리게끔 하는 것이다. 바꿔서 생각하면 태극기 집회 사람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똑같은 퍼포먼스를 벌인다면 용납이 되겠는가. 표현 방식에도 윤리적인 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표현이 개인을 혐오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비슷한 사례로는 또 최근에 아베 정부가 방사능 오염수를 해양으로 방류한다는 것 때문에 여러 시민단체에서 아베정부를 규탄하는 퍼포먼스로 아베 얼굴에 빨간 손바닥 도장을 찍고 뺨을 때리고 급기야 그림이 찢겨졌다. 그것도 문제라 생각한다. 아베가 하는 일은 나쁜 짓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반대하지만, 이를 아베 얼굴에 낙인 찍기로 표현할 수 있는 문제인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표현 방식도 아니다. 그저 아베라는 자연인을 혐오하는 방식이다. 이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프레시안 : '혐오'는 주로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알고 있다. 권력자를 향한 비판을 하는데도 윤리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박 : 윤리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력자를 비판하는 방식도 혐오가 아니라 충분히 설득력 있는 방식, 보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은 방식, 문제의 근본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고민돼야 한다고 본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권력자가 개인이 아닌 '시스템'과 '사회구조'를 상징한다 할지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 개인, 자연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경계가 애매하다. '대통령 욕을 하면 안되냐', 할 수 있다. 사회적 공인이라 할 수 있는 재벌총수도 욕할 수 있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 윤리적 선을 넘는 점은 다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교수형에 처하고 얼굴을 때리고 이런 방식은 권력을 비판하는 본질에 가깝지 않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주장하는 내용은 정당하니까, 따라서 어떤 표현을 하더라도 정당하다, 사회적 공론장에서 조차 다루어질 필요도 없이 '표현의 자유'로만 인정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 피해는 자연스럽게 가장 취약한 집단과 개인에게 몰린다. 혐오에 쉽게 노출되고, 누구라도 비난하기 좋은 대상은 누구일까? 억압은 아래로 흐른다. 가장 힘없는 약자들에게 향해도 이를 방어하기 힘들어지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전두환 같은 이들을 단죄하지 말자는 뜻은 물론 아니다. 그의 죄를 정확하게 누구나 동의하는 방식으로 알려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도 표현은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전두환 문제에서와 똑같이 약자들을 혐오하고 조롱할 때도 '개개인을 탓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 사안에 대해, 동성애는 죄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게 내 표현의 자유 아니냐'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하나. 위에서 시작된 혐오는 아래로 흐를 수 있다.

전두환 퍼포먼스는 누군가는 속 시원할 수 있겠지만 매우 불편하다. 전두환을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트럼프도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머리를 발로 차는 퍼포먼스를 한다거나 박근혜를 단두대에 매달아서 세운다거나 그런 거는 윤리적인 기준을 넘는다 생각한다. 그런 방식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라는 걸 전달해야 한다. 자극적이고 참혹한 방식만이 분노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그런 방식은 결국 더 선정적인 자극을 요청하게 된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프레시안(최형락)

"표현에 윤리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

프레시안 : 자극적인 방식은 결국 대중에게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는 말인가.

박 : 그렇다. 밑도 끝도 없이 극한으로 가는 혐오는 설득력을 잃는다. 비극적이게도 모든 사람이 전두환을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으로 나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는 전두환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5.18에 무관심하고 역사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전두환 머리 때리기'로 전두환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가 설득이 될까. 그게 나한테는 속 시원하고 기쁠 수 있다. 나 역시도 전두환은 벌레 같은 인간, 인간쓰레기라 생각한다. 근데 그게 운동으로써 무슨 의미가 있나. 운동은 확장력이 있어야 한다. 자가당착적이어서는 안된다. 내 분은 집에서 풀면 되지, 광장까지 가지고 나오지 않아도 된다.

프레시안 : '혐오'를 동력으로 하는 운동은 확장력을 잃는다는 뜻인가.

박 : 얼마 전 숙명여대 학생들이 트랜스젠더 합격자의 입학을 거부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합격을 반대한 움직임이 '여성인권운동', 즉 권리운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이 안타까웠다. '권리운동이 다른 권리를 혐오하는 기반에 서 있구나' 라고 생각해서다.

20대 엘리트 여성이 중심이 된 운동에서는 트랜스젠더 혐오가 강하고 그것이 동력이 될지언정 밖에 있는 사람은 공감하기 어렵다. '쟤네 인권운동하면서 다른 사람을 혐오해' 이렇게 된다.

그분들은 여성운동이라 하겠지만 아까 말한 대로 운동이라는 건 '자리를 확장하는 것'이다. 여성의 자리를 확장하는 건 생물학적인 여성의 권리만 확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성의 권리라는 자리에 많은 사람을 앉혀야 한다. 트랜스젠더 빼고 남자 동성애자 빼고, 기혼여성 빼고... 막 이러면 이건 운동이 아니다. 그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게 숙대 사태다 본인들은 운동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자리를 좁히는 것을 운동이라 부를 수 있겠나.

프레시안 : 그렇지만 그들이 주도한 운동들이 성과를 거두긴 했다. 낙태죄 폐지나 불법촬영 등 이들이 주도해서 공론화했다. 사회가 이를 문제로 여기게 되고 많이 부족하지만 대책을 마련하려고 하지 않나. 이건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박 : 난 '여성의제'만을 주로 다루는 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확히 진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든다. 한국사회는 지극히 여성에게 잔혹한 사회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여성들은 공포 속에서 일상을 살아간다. 불법촬영같이 극단적인 문제들에 늘 노출되어 있다. 모든 여성이 피해자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들로써 어떤 목소리든 낼 수밖에 없다. 그런 잔혹한 사회에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식으로의 목소리가 발화하는 단계가 아닐까 한다. 그게 발화단계에서, 또는 다양한 권리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워마드 같은 폐해가 생길 수 있다.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정말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한다.

이들의 주장이 소위 '화력'이 세고, 극단적 피해로부터 등장한 권리이기 때문에 무시하거나 평가 절하할 수도 없다. 또 이들의 언어는 직관적이고 설득력있다. 그 설득력은 감정을 잘 울린다. 그러나 여성에게 좋은 사회, 이토록 극단적인 여성혐오의 사회를 끝내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 바로 여성의 자리가 넓어지는 사회 아닐까.

누구를 배제하는 주장은 의외로 힘이 세지만 결국 이런 주장은 여성의 자리를 좁힌다. 누구는 이래서 빼고, 누구는 저래서 빼면 자리가 넓어질 턱이 없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그들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지 몰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앉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여성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이 자리에는 페미니스트 남성, 트랜스젠더들도 같이 와야 한다.

프레시안 : 취재를 하다보면 동물권 시위도 극단적일 때가 많은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동물권을 지지하고 그런 표현이 속시원하지만 한편으로는 대중을 설득할 수 있을까 싶을 때가 많다.

박 : 동물권 단체가 그런 시위를 많이 한다. 포장지에 들어간다거나. 극단적인 메시지를 주는 방식이다. 선명하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해서, 깜짝 놀라게 한다. 배우기도 한다. 동물을 대변해야 하기 때문에 더 강력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되는 같은 방식의 표현은 심정적으로 동의가 잘 안된다.

말했듯이 운동은 자리를 넓히는 것과 동시에 합리적인 이야기와 논의의 장이 펼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확장되는 과정에서는 피해자들의 발화가 있고 이것을 합리적으로 논의할 논의의 장도 있고, 실천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모두 상호작용하는 것이 운동이다.

그런데 그냥 센 거, 논쟁이나 합리성 없이 '우리가 옳은데'라는 주장만 먼저 우위에 둘 때 논의의 장이 막혀버린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표현에 윤리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 보통사람들이 바라볼 때 불편하지 않는 방식을 선택해야한다. 퍼포먼스 방식을 생각하면서 그 퍼포먼스로 어떤 논쟁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그런 걸 생각해야한다.

자극적인 것을 보지 않고도 설득된 사람들이 더 강한 힘을 낸다. 자극적인 걸 보아야만 설득이 된다면 그거보다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퍼포먼스 아니면 그 사람들은 설득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을 감안해야 한다.

프레시안 : 당장 관심을 끌려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퍼포먼스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박 :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좋아졌는지 검증해야 한다. 눈에 띄기에는 손쉬운 방식이다. 굉장히 선정적으로 표현한다거나, 누군가를 극단적으로 악마화하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게 손쉬운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운동은 손쉬운 방법 보다는 더 좋은 방법을 늘 고민해야 한다. 다만 동물권 단체는 말씀드린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동물들을 대변하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인 표현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하지만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동물의 아픔을 표현할 수 있을 때, 그 힘이 더 놀라울 수 있지 않을까.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프레시안(최형락)

"혐오를 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프레시안 : 좋은 방법이란 건 어떤 게 있나.

박 : 정답이 있을까. 좋은 방법이란 게 늘 있을 수도 없다. 다만 어떤 이슈를 표현할 때 논의를 많이 해야한다.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한 퍼포먼스는 어떤 방식이 있을까, 뭘 하면 사람들 마음을 울릴 수 있을까, 글을 쓸 때도 퍼포먼스를 준비할 때도 여러 사람이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하고 준비하면서 좋은 방법을 찾아 나가야 한다.

누구의 목을 친다거나 하는 방식도 할 수는 있다. 그런데 안 하는 거다. 누가 그걸 보고 설득되겠는가. 당장이야 선정적이고 눈에 띄겠지만 보기 불편한데. 외국의 퍼포먼스, 행동들을 많이 참고한다. 재밌는 방식이 많다. 이를테면 경찰들의 공권력이 너무 심할 때 공권력을 악마화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거울을 들고 서 있다. 경찰과 극단적으로 대치됐을 때 거울을 들어 상대편에 보여준다. '경찰아 너희들 얼굴 보아라' 이렇게. 그럼 그 순간이 멈춘다.

누군가는 꽃을 전달한다. 누군가 보기에는 '뭐야 저게' 싶지만 꽃 하나 전달함으로써 서로간의 팽팽한 분노가 수그러들 수도 있다. '우리가 원하는 건 평화다, 공권력 진압이 아니다' 이게 전달이 된다. 누군가를 악마화하지 않아도 가능한 대안이다. 그래서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비폭력 트레이닝도 받기도 한다.

프레시안 : 윤리적인 기준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가.

박 : 나도 보통사람이고 너도 보통사람 아닌가. 그냥 보통사람이 생각하는 통상적인 윤리적 기준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보통사람의 시선에서 봤을 때 너무 극단적으로 불편하면 안된다. 그리고 그런 기준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해야한다. 누구나 끝없이 이야기를 통해 단련된다. 민주주의는 단정짓지 않고 질문하고 회의하면서 발전한다. 예를 들어 교수형에 처한다거나 하는 방식은 보통사람의 시선으로 봤을 때 혐오스럽지 않은가. 왜 그런 것을 봐야 하나. 보고 싶지 않다. 누가 봐도 최대한 불편하지 않을 방법이 찾으면 있지 않겠는가.

프레시안 : 외국에서는 오히려 '표현의 자유'라고 해서 권력자에 대한 비판이 더 자유롭다. 2016년 미 대선 당시에는 트럼프의 나체도 전시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박 : 우선, 한국에서 그 퍼포먼스를 했을 때 반응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그 사회의 역사와 그 사회의 기분이 있을 테니까. 분명한 건 미국과 한국의 반응과 논의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미국은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상이 높은 국가다. 권력자에 대한 조롱은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영역으로 본다.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표현 자체에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원칙을 확립한 나라다. 이것은 '공적 담론'의 장이 가능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에 가능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미국에도 혐오표현을 제한하는 다양한 사회적 기제들이 있고 작동한다. 반차별 정책이 시행중이다. 한국과 단순 비교는 어렵다. 형사처벌은 없지만 다른 규제는 존재한다. 유럽의 경우는 또 다르다.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은 혐오표현에 대해 금지하는 법제들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그 사회에서 얼마나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한국사회가 이러한 혐오표현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된 공론의 장이 열렸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나의 경우 어느 정당 정치인들이 굉장히 싫다. 그 사람들이 왜 문제인지 사회적으로 알리고 싶을 뿐이다. 그 사람들을 조롱할 마음은 없다. 그런 조롱에 다른 사람들이 설득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 일부는 속시원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표현은 오히려 많은 비난에 부딪히리라 본다. '그건 불편하다'는 한국사회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보통의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게 운동의 목표이기 때문에 혐오적인 방식은 제고해야 한다고 이해하면 되나.

박 : 운동은 '무브먼트(movement)' 아닌가. 내가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단계에 머물지 않고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좋게 생각하게 해서 사회를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운동의 지반을 넓히는 게 필요하다.

프레시안 : 전두환 같은 사례는 한 사람을 악마화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혐오라면 혐오인데, 전두환은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대학살을 저지른 사람이다. 전두환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선을 지켜야 하나.

박 : 개인적으로 전두환이 자기집에서 자연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다 죽음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지은 죄에 적법한 처벌말이다. 그러니 전두환은 국가의 법정에서 국가의 감옥으로 보내서 단호하게 처벌해야 한다. 그걸 위해서 광장에서 뺨을 때리는 운동보다 폭넓은 운동이 고민되었으면 한다. 누구라도 자신이 짓지 않은 죄로 처벌받아서도 안되고, 사적 처벌을 받아서도 안 된다. 전두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전두환이든 누구든 감옥에 보내면 피의자로써 기본적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 그건 인권이 누구나에게 적용되기 때문이고 전두환도 기본권을 향유할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건 당연한 말 아니겠나.

시민사회운동에서 혐오를 이용하는 문제는 복잡하다. 논의가 잘 안된 측면이 있다. 왜 저런 식으로 표현하지,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운동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우리 편이니까 봐 주는 거다. 손석희 사장이랑 윤석열 검사가 태극기집회 초반에 교수대에 매일 매달려 있었다. 그거 보면서 사람들이 엄청 욕을 했다. 태극기집회 사람들 수준이 이렇다면서.

그런데 반대로 자기편인 사람들 무대에서 그런 퍼포먼스를 벌일 때는 별 말들이 없다. 어떤 표현 방식의 윤리적 기준도 진영에 따라 다른 걸 보면서 이건 논의가 좀 필요하다 생각한다. 태극기 집회에서 하든, 여기서 하든 간에 안 되는 건 안 된다. 좀 우리가 지켜야 할 선, 이 퍼포먼스를 보고 이 표현양식을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공감 가는 방식, 그리고 좀 덜 불편한 방식, 이런 것을 같이 노력해서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정리해보면 보통의 사람들한테 불편하지 않으면서 최소한 개인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그런 기준인가.

박 : 그걸 보는 내가 불편하다는 건 다른 누군가도 불편하다는 뜻이다. 인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누구나'는 이주민일 수도 있고, 아동이거나 성소수자, 장애인, 비정규직일 수 있다. 그런 이들의 입장에서 불편하지 않은 표현이면 보통의 사람들에게 불편하지 않고, 최소한의 개인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싫어하는 정치인 비판한다면서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 하는데, 그런거 하지 말자는 말이다.

혐오를 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실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피곤하다. 그러나 혐오하고 배제하는 방식은 게으르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도 없다. 누구를 자꾸 제외시키고 자리를 좁힌다. 어떤 이는 그런 표현이 속 시원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표현 때문에 완전히 자리를 빼앗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걸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지금은 성실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권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공론장에서 배제되었던 사람일수록 더 많이 참여해서 논의하게 하는 아주 성실한 자리. 그게 필요할 때라고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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