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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는 전체주의 일보 직전 상태"

[인터뷰] 서승-서준식씨 동생 서경식 재일 교수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고향을 찾는 한가위. 기억해야 할 이들이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고 온 고국 때문에 명절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 왔던 재외동포 1세들과 한번도 밟은 적이 없는 모국(母國) 때문에 '삶의 무게'가 더 무거울 수밖에 없었던 재외동포 2, 3세들이 그들이다. 특히 모국의 무능력과 무관심 때문에 60만 재일 조선인들이 겪었던 한 세기에 가까운 고통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삶이다.

도쿄게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서경식(53) 교수도 재일 조선인이다. 그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1920년대 살아남기 위해 고향 땅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건너와 공사 현장, 농장 노동자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1945년 해방 후에도 고향 땅으로 돌아간 가족의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귀국을 미루다 결국 일본 땅에 정착하게 된다. 1951년 서경식 교수는 이 재일 조선인 가족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둘째 형과 셋째 형은 바로 악명높은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인 서승, 서준식 선생이다. 1965년 한일 간 국교가 정상화된 후 모국을 알기 위해 또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는 모국의 동포들과 함께 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던 20대 초반의 재일 조선인 형제는 1971년 봄 간첩으로 몰려 각각 19년, 17년의 수감 생활을 한다. 옥고를 치르다 고문의 잔혹함을 알리기 위해 난로를 껴안기도 했던 서승 선생은 현재 일본 리츠메이칸대 법학부에서 교편을 잡고 있고, 서준식 선생은 석방 후에도 우리나라에 남아 1993년 인권운동사랑방을 만드는 등 인권운동에 헌신해왔다.

20세기 우리 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온 가족이 안고 살아간 서경식 교수가 <소년의 눈물>(이목 옮김, 돌베게 펴냄)을 번역·출간했다. 이 책은 사춘기 입구부터 두 형이 정치범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한국의 동포들과 더불어 좋건 싫건 정치적 폭풍의 눈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 때까지를 기록한 '책과 함께한' 성장기이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는 '한일 협정'으로 재일 조선인들이 또 한번 모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시기이며, 일본 사회에서 '다른 사회를 향한 변화의 물결'이 '안보 투쟁'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지던 때이다. 이 책은 그 시기를 담담하게 재현하면서, 우리 앞에 재일 조선인들의 '뜨거운 삶'과 그들의 고민을 펼쳐 보인다.

서경식 교수는 <소년의 눈물>로 1995년에 재일교포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다. 재일교포로 이 상을 처음 수상한 이유는 "빼어난 일본어 표현"이었다. 그는 책의 한국어판 머리말에서 그 고통스러운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반대한다. 그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정책을 반대한다. 식민 지배의 죄과를 부인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사상을 반대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하고 있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인 것이다. 그 감옥 속에서 나는 더 너른 광장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조국의 동포들에게까지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해왔던 것이다."

서경식 교수는 '더 너른 광장'이 한민족의 틀 안에 갇힌 '편협한 민족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한다.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추방당하고 모어의 공동체에서 축출된 무수한 '디아스포라'(모국을 떠난 뒤에도 모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이들)와 연대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보편적 인간'에 다가서게 만드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책 출간에 맞춰 고국을 방문한 서경식 교수를 지난 16일 만났다. 인터뷰는 <소년의 눈물>을 번역한 이목 선생의 통역으로 1시간 30분 동안 신라호텔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하는 '한겨레' 있다는 것 알리고 싶어"**

프레시안 : 처음부터 외람된 질문을 드리겠다. 굳이 일본어로 인터뷰를 진행할 필요가 있나? (웃음) 선생의 한국어는 충분히 유창하다.

서경식 : 아시다시피 나는 1951년 일본에서 태어나 '우리말' 교육과 같은 기본적인 '민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나의 '모국어'는 조선말이지만, 나의 모어(태어나면서 처음 배운 기본적인 언어)는 일본어이다. 나는 <소년의 눈물>이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수상했을 때 나를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이라고 표현했다. 일본어를 거치지 않는다면 나의 사고며 표현 행위마저도 모두 불가능하다. 조국의 동포들에게 나의 이 '뜨거운 마음'을 일본어로 전해야 하는 사실이 나도 안타깝다.

한편으로는 동포들에게 일본어와 같은 다른 말을 모어로 하면서도 '한겨레'인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이 때문에 이목 선생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서경식 선생이 인터뷰를 굳이 일본어로 진행한 진짜 이유는 두 번째인 듯싶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매우 유창하다. 그는 질문을 듣자마자 바로 대답을 했고, 대답을 통역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은 바로 우리말로 덧붙이기도 했다.)

***"1960년대 초엽, 나는 마침내 작은형(서승)과 셋째 형(서준식)과 2층에서 생활하게 되었다.…우리 세 형제들은 커다란 이불 한 채를 덮고 잤다. 이불 속으로 들어간 작은형은 내가 잠들 때까지 동서고금의 재미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어떤 의미에서, 그 시기의 나는 작은형의 품에서 자랐다는 느낌마저 든다."**

프레시안 : 선생을 한국에 처음 알린 책은 <나의 서양 미술 순례>(박이엽 옮김, 창비 펴냄)이다. 그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도 형들-서승, 서준식-의 존재가 깊게 드리워 있다. 개인적으로 선생에게 형들은 어떤 의미인가? 아버지보다 형들의 존재가 더 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경식 : (웃음) 때로는 아버지보다 형들의 존재가 더 컸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에 나는 작은형, 막내 형과 함께 사춘기를 같이 보냈다. 특히 형들이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잘 알기 위해서는 1960년대라는 시대가 재일 조선인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알 필요가 있다. 재일 조선인은 1952년부터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상태를 종결하고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일본이 미국·영국 등 48개국과 체결한 조약)' 이후 전체가 무국적자가 됐다. 그 전까지는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선거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이 자격 상실(?)이 그 시점에 일어난 것이다.

즉 195~60년대 재일 조선인들은 국적이 없는 상황에서 일본에서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시기였다. 그 시기에 재일 조선인들은 돌아갈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돼 대립하고, 한일간 국교가 없는 상황에서 고통스러웠다. 특히 1959년에는 '북조선 귀국 운동'이 벌어져, 약 10만 명 정도가 북한으로 귀국하는 일이 벌어졌다. 북한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한국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국적이 없는 채 일본에 남아 있을 것인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두 형과 나에게도 '삶의 무게'로 다가왔다.

프레시안 : 서준식 선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67년에, 서승 선생은 1968년에 한국의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1960년대의 시대 분위기가 그런 선택에 영향을 줬는가?

서경식 : 형들은 그런 차별을 받으면서, 일본의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단지 한국으로 유학을 간 것은 '일본에서 받는 차별에서 벗어나자. 한국에서 더 나은 삶을 찾자', 이런 안이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형들은 1960년 4·19 혁명에 대해서 또 박정희 독재 체제 하에서 투쟁하는 동포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뛰어난' 동포들과 연대하자, 이런 차원에서 한국행을 결심했다.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 바로 그 소외의 상황을 의식하는 일이야말로 전진을 가능하게 한다. 그 전진이란 다름 아닌 답답하고 옹색하게 굴절된 일상에서 광활한 보편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형들이나 나나 굳게 믿고 있었다. 원대한 이상과 일상의 욕망, 그 괴리에 온몸이 찢기면서도 제 삶을 의미 있는 무엇으로 만들려면 서투를지언정 이상을 향해 도약해야만 한다고."**

프레시안 : 1965년 한일 협정은 어떻게 다가왔나? 선생은 1965년 한일 협정이 체결된 다음 해 1966년 고교 1학년 때 처음으로 모국을 찾는다.

서경식 : 재일 조선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일 협정'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과거사 청산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책임을 묻지 않은 점이었다. 일본이 과거 오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일 간 교류를 하게 되면, 일본 사회가 재일교포에게 가하는 차별과 억압을 반대할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일본인들이 자신의 과거사에 대해 분명한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 정부마저 그것을 용인하는 모양새가 됐으니까.

형들이 한국을 선택한 여러 가지 이유 중에는 한일 협정에 반대해 싸우는 민주 투사들과 연대하고 싶었다는 것도 있었다. 결국 두 형은 한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 후 형들이 정치범으로 몰리면서 나는 한국에 갈 기회를 잃어버렸다.

프레시안 : 두 형들이 옥고를 치르면서 전개된 상황이 조국을 인식하는 데 영향을 줬을 것 같다. 재일 조선인으로서 일본의 차별에 저항하는 한편에서는, 모국인 한국 정부에게 고초를 당하는 형들이 있었다.

서경식 : 박정희 정권에 의해 두 형들이 체포돼 고초를 겪는 과정에서 그런 감정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박정희 정권의 거대한 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발견한 것이다.

특히 긴 옥중 생활 동안 형들은 한번도 자기가 선택한 길, 한국으로의 유학,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신념이 흔들린 적이 없다. 만약 형들의 신념이 흔들렸다면 나의 마음도 흔들렸을 텐데, 형들은 절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두 형의 옥바라지를 위해 40여년 만에 한국을 찾은 어머니를 김지하 시인의 어머니나 이소선 여사 같은 분들이 격려한 것도 큰 힘이 됐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보통 사람들, 동포들에 대한 애정은 더욱더 커졌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움과 민중에 대한 애정이 같이 공존했다고나 할까?

***"과거사 청산 없이는 한일 관계의 건설적 미래는 없다"**

프레시안 : 1965년 한일 협정 당시처럼 일본 정부는 여전히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문제는 한일 관계의 미래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하지만 그 때보다 오히려 지금 일본 사회가 변할 가능성은 더 없어 보인다.

서경식 : 1965년 시점에서 보자면 일본의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 만주국 관료 출신 정치인이나 제국주의 관료와 같은 이들이 많았다. 일반 국민의 경우에도 패전 이전의 군국주의 인식이 많이 남아 있었고. 그런 1965년 상황이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세대가 교체되고, 교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큰 문제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최근에 제주도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회담을 하면서, 노 대통령이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발언을 했는데, 아주 잘못된 발언이었다. 일본의 과거사 청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일 관계의 건설적인 미래는 없다.

***"(지금 모 국립대학의 교수가 되어 있다는) N군은 '일본은 조선에 철도를 놓아주었고 공장도 지어주는 등 은혜를 베풀었다. 또한 일본이 아니었더라면 러시아가 조선을 지배했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는 식의 판에 박힌 반론을 제기했다.…그 사건은, 지배하는 자의 저 후안무치한 변명이 공기처럼 혹은 물처럼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스며들고 있다는 현실을 나에게 깨우쳐주었다.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이런 아이는 루쉰이 말했듯이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일본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어떤가? '망각하기'가 주된 분위기인 것 같다.

서경식 : 그렇다. 일반인들은 재일교포가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에 대해서 그 맥락을 자세히 모른다. 그래서 정치적, 학술적으로 재일교포의 존재를 해명하고, <소년의 눈물>과 같은 책을 통해서 일본 사회가 소수자인 재일교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를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루쉰의 경우 교과서에도 등장하고, 경제인들이 좋아하는 두 번째 인물로 꼽히는 등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쉰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인격을 형성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루쉰의 그런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다. <소년의 눈물>에서도 썼듯이 나는 재일교포의 눈으로 본 루쉰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보고 싶었다.

프레시안 : <소년의 눈물>을 쓰면서 의도했던 그런 정치적 목적이 일본 사회에서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가?

서경식 : 불행히도 내 생각이나 의도는 일본인들에게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에세이스트클럽상 심사위원들조차도 이해를 못했다. 그들은 "외국인치고는 일본말을 잘한다. 일본에 언제 왔느냐",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외국인이면서 일본말을 잘 하는 게 아니라, 외국인이면서 일본말밖에는 배우지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인데, 정작 바로 그 원인을 제공했던 당사자들은 그 진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에 대한 인식이 없다.

프레시안 : 최근에 과거사를 둘러싸고 한·중·일 3국 관계가 좋지 않다. 우려스러운 것은 각국이 과거사 문제에 접근하면서 모두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로 나아가려는 분위기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과거사 진상 규명은 필요하되, 공격적인 민족주의가 확산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서경식 : 나도 한국에서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가 젊은이들 사이에 확산되는 것에 상당히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문제를 볼 때 모든 것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보는 것은 제대로 된 인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에 있다. 한일 간 역사 분쟁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쪽은 일본에 있다.

일본 정치인들이 여전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극우 시각으로 왜곡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채택하는 상황에서 한국이나 중국의 공격적인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이를 테면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이스라엘의 태도 변화가 전제돼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무엇보다도 일본이 먼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최근 한·중·일 3국 간의 역사 분쟁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문제이다.

***"일본 사회, 전체주의 일보 직전 상태"**

프레시안 : 선생은 일본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무엇을 강조하고 있고, 반응은 어떤가?

서경식 : 인권과 소수자 문제를 주로 얘기하고 있다. 재일교포 문제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보이는 또 보이지 않는 많은 소수자들을 드러내고, 일본인들이 그 소수자를 얼마나 인식을 못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 대학생들은 소수자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되는 상태에서 가장 편안해 한다. 일본 사회 전체가 다수가 생각하는 의식과 방향을 따르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대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반론을 제기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다. 반론이 없다고 해서 내용을 공감하고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단순히 점수를 얻기 위한 과정으로만 보지, 자기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설사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을 선생이 얘기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따라간다. 나는 그런 일본 학생들의 상태가 전체주의 일보 직전 상태라고 생각한다. 이런 분위기 탓에 인권과 소수자의 문제를 알리기보다는 일본 학생들에게 자기 스스로 힘으로 생각하고, 가치관을 확립하게 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프레시안 : 선생 얘기를 듣고 보면, 일본의 현실은 우리나라와도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일본 사회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도 갈수록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문화가 노골화되고 있다. 젊은 세대일수록 비판적 의식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서경식 : 한국의 경우에는 민주화를 쟁취한 것에 대한 기억이 자주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으로 사람들에게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1970~80년대 자기희생을 통해서 민주화를 쟁취한, 시민혁명을 이루어낸 한국 사회는 아직 가능성이 많지 않나? 그것이 내 판단 착오가 아니길 바란다. (웃음) 일본의 경우에는 그런 게 거의 없다. 자기 힘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일을 일본 학생들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프레시안 : 젊은 세대만을 비교해보면 권위주의 문화와 같은 것은 한국의 경우 더 심하다.

서경식 : 이런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한국에서 일본에 비판적 인식을 갖고 있던 사람이 막상 일본 사람을 만나면 인식이 크게 바뀔 것이다.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은 탈권위적이고 상냥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 전체는 매우 권위적이고 폭력적이다. 이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그 친절하고 상냥한 힘없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과거에는 군국주의에 동원돼 폭력을 '날 것'으로 드러냈다. 그런 게 가장 위험하다. 약자들이 하나의 집단이 돼 타인을 침략하고 공격하고, 폭력을 휘두를 때 가장 끔찍한 상황이 초래한다. 전체주의 하에서 순응적인 문화는 순식간에 집단적인 폭력으로 돌변할 수 있다.

현재 일본 사람들도 그 때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명령을 내린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정식 군대를 보유할 수 없는 일본 헌법이 결국 바뀌면 군대가 생길 테고, 그 때 군대에 가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개개인은 너무나 선량한 일본 학생들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지금 벌어지는 이런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전혀 없다.

***"'정의'와 '이상' 냉소하는 일본 기성세대들"**

프레시안 : 한 가지 의문이 있다. 현재 일본 사회의 허리 역할을 하는 이들은 1960년대 '안보투쟁'에 몸담았던 세대다. 지금 젊은이들은 그들의 아이들이고. 그런데 그들이 권력에 저항했던 기억들은 일본 사회를 전혀 변화시키지 못했다. 1970~80년대 권력에 저항했던 이들이 장년층이 되는 우리나라도 같은 길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서경식 : 좋은 지적이다. 나도 동 세대 일본인들에게 크게 실망하고 있다. 1960년대 안보투쟁이 종식 되면서 기성세대가 된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이 좌절된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의 중추가 됐다. 일본의 회사, 관청에서 이들을 바로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0~80년대, 20년 동안 일본이 고도 성장하면서 이들은 자기 삶 자체가 윤택해진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결과를 놓고 이들은 "우리들이 패배했기 때문에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난 게 아닌가", "패배한 것이 오히려 잘 됐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자신의 이상이 패배한 대가로 체제 내에 흡수돼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스스로의 패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한 것이다. 정의나 이상을 저버린 그들은 정작 지금 정의나 이상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반응하곤 한다. "나도 젊을 때는 너처럼 이상을 가지고 정의를 위해 싸웠어",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내가 <NPO 전야>라는 잡지를 준비하는 것도 이처럼 냉소적인 반응에 익숙한 일본 사회의 동 세대들에게 일종의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다.

프레시안 : <NPO 전야>는 주로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게 되는가? 일종의 지식인 잡지인가?

서경식 : 일본 사회의 소수자들을 대변하는 지식인들이 모여 문화를 매개로 "너희들 사회가 이렇게 문제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식이 될 것이다.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긴 안목을 가지고 근본적인 문제를 짚는 것을 지향하고자 한다.

프레시안 : 강상중 교수와 같은 지식인과도 연대하거나 공동의 행보를 취하는가?

서경식 : 강상중 교수는 <NPO 전야>를 같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우경화, 보수화에 대해서 비판하는 큰 전선에서 같이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단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 강상중 교수는 일본에서 소비 대상이 되고 있는 '소수자 지식인'이다.

프레시안 : 일본 사회가 일종의 면죄부로 강 교수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인가?

서경식 : 그렇다. 강상중 교수 개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그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강상중 교수가 TV에 나와서 여러 가지 비판을 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 편안한 것만 방송이 되고, 또 그것만 일본인들에게 받아들여진다. 언젠가 강상중 교수가 "김희로 씨의 석방을 계기로 한일 양국이 화해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얘기를 방송에서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강 교수는 그 전에 "30여 년 전에 재일교포가 처한 상황이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는 얘기를 먼저 했지만 그것은 방송이 되지 않았다.

<NPO 전야>를 만드는 것은 이렇게 강상중 교수 같은 지식인이 미디어를 통해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자는 취지도 있다. 나도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하는데 천황제에 대한 비판은 전혀 보도가 안 되고 있다. 그래서 인터뷰하기 전에 편집자가 마음대로 편집하지 말라는 조건을 달고 인터뷰를 하는데, 바로 그 때문에 인터뷰하자는 기자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웃음) 일본 사회의 보이지 않는 힘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산의 비애, 모어 상실의 고통에서 여러 디아스포라와 연대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보편적 인간'에 다가서게 만드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프레시안 : 선생은 일본 사회에서 파시즘이 내면화된 의식을 비판하고 잠든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문필 작업을 계속 해왔다. 앞으로도 활동 계획을 듣고 싶다.

서경식 : 앞에서 나가 싸울 때가 있으면 싸워야지. (웃음) 우선 <NPO 전야> 등을 통해서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 활동을 계속 할 것이다. 다른 중요한 것은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일본 사회에 대한 평론과 교육, 이 두 가지를 축으로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해나갈 생각이다.

한 가지 더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전 세계 '디아스포라'들의 연대이다. 그들은 아픈 역사를 온 몸으로 껴안는 과정에서 정체성을 모국에 두면서도 더 넓은 정체성을 지향하는 독특한 존재들이다. 재일 조선인들은 정체성을 한반도에 두고 있으면서도, 일본 사회와 소통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디아스포라'들의 정체성이 동아시아의 평화 또 세계 평화를 위해 큰 자극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세계 각지의 조선인 '디아스포라'들, 또 다른 많은 '디아스포라'들과 연대를 모색할 것이다.

프레시안 : 앞으로 한국도 더 자주 방문하기를 바란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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