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은 왜 국내에서 버림받고 해외에서 인정받는가**
김기덕 감독은 국내 프레스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해외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기뻐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국내 시사회 때마다 김기덕 감독은 기자들을 향해 비아냥대기 일쑤다. 예를 들어 무대 인사 때 박수가 그리 크게 들리지 않으면 “오늘 오신 분들 가운데는 기자들이 많은가 보군요”라고 꼬집는다. <해안선> 개봉 때에는 “이 영화를 두고 평론가들이 어떻게 얘기할지 두고 보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언뜻 보기에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늘 논쟁을 몰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흥행에서 실패하는 것은 언론에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김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도 그리 이해 안 될 일이 아니다. 그의 영화는 거의 대개가 찬반논란에 휩싸여 왔고 호오(好惡)가 확연하게 갈려져 왔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찬반 토론에서는 반대쪽의 목소리가 조금 더 부각되기 일쑤다. 언론이 아무리 양쪽을 비중 있게 싣는다 하더라도 그의 영화는 국내 관객들에게는 보고싶은 영화라기보다는 다소 거부감이 느껴지는 영화로 인식돼 왔던 것이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김기덕이 문제적 작가임은 분명히 인정하지만 대중적인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영화에 대한 그의 야생적 본능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경향을 보여 왔다.
김기덕 영화의 생경함은 예컨대 <섬> 같은 영화에서 극단화된 형태로 나타난 바 있다. 낚시바늘로 여주인공의 음부를 꿰는 장면 등은 여성에 대한 작가의 가학적 태도, 세상을 남성근본주의적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후의 작품 <수취인불명>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남자 주인공이 차가운 논바닥에 거꾸로 처 박혀 죽어 있는 모습은 이 작가가 꿈꾸는 영화적 풍경이 일반 관객들의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전복적인 형태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전복은 때론 혁명을 낳지만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해야 된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는 종종 선후가 뒤바뀌는 현상을 보여 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늘 매우 인상적이지만 그 인상이 오랜 여운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취약점을 나타낸다. 한마디로 특수가 보편을 규정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눈에 띄긴 하지만 공감대를 넓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박찬욱의 영화가 비평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일정한 사회적 흐름의 파도를 타는 것과는 달리, 그의 영화가 흥행면에서 늘 배신을 당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껏 11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김기덕감독은 솔직히, 영화작가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스트나 저널리스트의 입장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왔다. 김기덕의 영화적 주제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것을 끄집어 낸다. 윤락, 강간, 원조교제, 군대라는 집단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 안의 파시즘, 종교의 문제, 가정폭력 등등 그의 영화적 소재는 늘 날이 서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덕의 영화는 종종 소재주의적 질곡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그가 만들어 내는 사회적 이슈 파이팅이 보다 근본적인 주제의식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는 흥미진진하게 벌어지는 ‘100분 토론’이다. 토론은 물론 재미있지만, 토론이라는 것이 왕왕 그렇듯이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논쟁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찾는 경우가 많다. 김기덕의 영화가 그 어떤 감독보다도 강한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있으며 그만큼 세상에 대한 치열성을 가진 작가는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서는 내면의 치유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의 영화가 대중과의 소통에서 충돌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의 영화가 국내에서 거의 대개가 흥행에서 참패하고 있는 것은 원초적으로 김기덕 자신의 책임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그 실패에 관한 한 그는 더 이상 부끄러워 할 것도, 아쉬워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제시하는 사회적 이슈라고 하는 것은 멜로 영화나 로맨틱 코미디, 볼거리가 풍성한 액션영화 등등 손쉽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만이 횡행하는 이 나긋나긋한 상업영화의 세상에서 처음부터 맞지 않는 것이다. 그의 영화가 일견 대중에게 깊게 천착해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11편의 영화를 만드는 내내 김기덕이란 작가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끈질기게 도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건 분명 고통스러운 작업의 연속이긴 하지만 대신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만한 일이다.
베를린과 베니스영화제가 잇따라 김기덕에게 감독상을 안겨준 것은 국내 영화계뿐만 아니라 세계영화계에서도 그 사례를 쉽게 찾아 보기 힘들만큼 대단한 성과임에 틀림 없다. 해외 영화계 특히 이른바 빅3 영화제가 김기덕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구사하는 직설적 화법 때문일 것이다. 해외 영화권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대중들이 어떻게 그의 영화와 소통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천착해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을 수 있다. 그보다는 그가 던져 놓는 그 우직스러운 영화적 화두의 명쾌함에 탄성을 자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기덕의 영화엔 늘 강한 자신의 주장이 실려 있다.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야수의 포효가 있다. 영화제 관객들은 아마도 그의 그런 점에 흠칫 놀라고, 섬뜩해 하며, 외경심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김기덕에게 이제 남은 일은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수법’으로 국제 영화제에서의 성과를 토대로 국내 관객들에게 보다 온화하고 친절한 자세로 자신의 영화를 올바로 ‘홍보’하는 일이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작품의 완성도가 아니라 이 시대의 작가가 필요악으로 가져가야 할 정치적 역량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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