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름이 끝나가고 이제 가을이 오고 있다. ‘10년 만에 찾아온 더위’만큼이나 한국 사회는 뜨겁고 혼란스러운 여름을 보냈지만 그 뜨겁던 기억은 벌써 잊혀지는 듯 하다. 특히 이라크전에서 희생당한 ‘김선일’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그렇다.
***“김선일 사건, 한국인 인식균열 가져와”**
이라크전과 김선일 사망 사건을 되돌아보는 책이 한 권 나왔다. <당대비평>이 특별호로 기획한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슬라보예 지젝, 도정일 외 지음. 생각의 나무 펴냄)다.
당대비평은 “김선일 사망사건은 한국인의 인식에 균열을 가져왔다”며 “이제까지 한국에서 ‘테러리즘’의 폭력은 ‘정당성’에 있어서 자명한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뉘어 있다”고 평가한다. 한국 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그 한축에는 정당성이 결여된 테러리즘적 폭력으로서의 ‘지배권력에 의한 비합법적 폭력’이 자리잡고 있고 다른 한 축에는 정당한 테러리즘적 폭력으로서 ‘지배권력의 폭력에 대한 대응폭력’이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김선일 사망사건은 바로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한국인들을 당혹하게 만드는 결과를 나았다. “한국인 자신이 지배 권력의 협력자로 규정되면서, 대응폭력적 테러리즘의 대상이 된 것이다.” 21세기 폭력과 테러의 한 가운데에 한국 사회가 자리잡고 있는 현 시대에서 이 책이 저술되는 계기는 바로 이러한 성찰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그 성찰은 ‘이름을 기억하기’에서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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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그라이브 일들, 예외적 범죄 아닌 미국 생활양식 한 단면 드러내”**
이 책에는 모두 25명의 국내외 지식인들이 쓴 글들이 4개 부분으로 나뉘어 모아져 있다. 1부 <아부 그라이브, 미국식 유토피아의 감옥>에서는 4명의 해외 필진이 이라크전에 대한 ‘윤리적 비난’과 미국에 대한 ‘원칙적인 비판’을 넘어서 아부 그라이브에서 있었던 폭력과 야만을 고발한다.
우선 아부 그라이브에서 있었던 일들을 미국 시사잡지 <뉴요커>에 기사를 쓰며 심층 취재했던 프리랜서 기자 시모어 M. 허시가 <아부 그라이브에서 벌어진 일들 : 궁극적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를 통해 정리하고 있다. 허시 기자가 지난 5월 폭로했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의 성학대 등의 장면을 담은 사진들은 당시 전세계에 큰 충격을 던져줬었다.
그러나 이러한 병사들의 행위는 “미국이 지지하고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민주주의, 자유, 개인의 존엄과 같은 가치들을 반영하지 않는, 예외적인 범죄(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는 아니었다고 슬라보예 지젝은 지적한다.
주목받는 정신분석 이론가 중의 한 사람으로, 슬로베니아 태생의 지젝은 “포로들은 개인적 존엄, 민주주의, 자유라는 공개적 가치들에 필수 부가물을 이루는 미국 문화의 역겨운 이면을 맛본 것이며 그래서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제의적 성격의 모욕이 극소수의 제한된 사례가 아니라 광범위한 관행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분석한다. 즉 “포로들을 모욕하는 사진들을 볼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미국의 가치들“에 대한 미국적 생활양식을 떠받치고 있는 혐오스러운 쾌락, 바로 그 핵심에 대한 하나의 통찰”이라는 주장이다.
월터 데이비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 교수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데이비스 교수는 “아부 그라이브에서 있었던 일들은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패션 오프 크라이스트>에서 고문 가해자들이 그리스도에게 했던 짓처럼, 무력한 희생자들을 대상으로 고문을 행하면서 변태적 쾌감을 맛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문제는 바로 “미국인의 근원적 병리 상태에서 연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 책임 거부하는 정부가 무슨 의미 있나”**
2부 <국가의 무책임성과 국제연대 - 이라크 ‘일본인 인질’ 석방의 의미>에서는 고 김선일씨와 마찬가지로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된 후 무사히 석방됐던 일본인 인질 사건을 되짚어보면서 일본내에서 일었던 자기책임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특히 일본 도야마 대학 교수인 오구라 토시마루는 <전쟁 동조 체제와 배제 : 일본 정부의 ‘자기책임론’ 비판>이라는 글을 통해 일본 정부가 내세우는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자기책임론’은 “작위적인 책임전가”라며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책임을 떠맡지 않는 정부가 과연 어떠한 책임을 진다는 것이냐”며 냉혹하게 질타하고 있다.
아울러 직접 인질로 잡혔던 프리랜서 기자 야스다 준페이는 <‘미국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믿는 한 누군가 죽어갈 것이다>라는 글을 통해 “‘미국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결정해버리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며 “이것이야말로 사고정지상태에 빠지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중요한 점은 지금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이라며 “물론 안전보장뿐 아니라 경제문제, 에너지문제 등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으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은 스스로의 책임을 다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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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은 국내문제”-“한국인, 처음으로 ‘대응폭력적 테리러즘’ 대상 돼”**
3부 <참혹한 시간 - ‘김선일’이 한국사회에 던진 물음들>에서는 올 해 한국사회에 커다란 물음을 던진 김선일 사망 사건에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당대비평> 편집위원인 문부식이 서문인 <김선일 : 손상된 신체의 기억은 어떻게 봉합되었는가..어떤 소멸에 관한 단상>에서 “테러행위에 단호히 대처해나갈 결심을 밝힌 국가는 망설임도 없이 무고한 민간인의 목숨을 테러리스트 집단에게 던져준 것”이라며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이 발언은 엄밀히 말해 테러리스트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를 향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파병국가(전범국가)를 테러리즘 피해국가로 둔갑시키는 언어적 폭력이며, 이 전도된 언설을 통해 ‘전쟁/군사적 폭력 피해자’의 성격을 우선적으로 갖는 김선일의 죽음을 ‘테러 피해자’의 성격으로 제한시켜 책임의 한계를 축소 규정지으려는 불순한 기도”라는 분석이다.
이같은 평가에는 <파병은 국내문제다 : 파병 촌극 감상기>라는 글을 쓴 진중권도 동감하고 있다. “파병은 미국과 한국 사이의 외교 문제가 아니라 실은 국내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는 그는 “미국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심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파병반대를 천명했다가 이러저러 이유로 입장을 바꾼 정치인들은 “노란 카멜레온들”일 뿐이고 노무현 퇴진이란 구호를 넣을까 말까 실랑이를 벌인 시민단체 및 노사모는 “청와대 경호실”일 뿐이다.
***“美 사회, 자신들 전체가 안고 있는 부조리함으로 이라크전 책임 거론 못해”**
특히 문학평론가인 도정일 경희대 인문학연구원장은 ‘김선일’ 사건을 보기 위해 이라크전의 근원지인 미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라크 침공이 단행되기까지의 명분 축적 과정에 충분히 비판적으로 개입하지 못한 <뉴욕타임스>가 자체의 ‘실수’를 반성하고 나서면서도 책임문제를 거론하지 못하고 있는 미국 현실은 미국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부조리함의 결과라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 전체가 전범국이 되고 국민 다수가 결과적 종범으로 지목돼야 하는 상황에서 국민 자신이, 언론이 감히 책임의 문제를 따질 수 있겠는가”라며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다.
도정일 교수는 이어 파병론이 내세우고 있는 파병 논리들인 ▲실리론과 국익론 ▲‘동맹의 도리’ ▲생존 전략 ▲경제적 이득 등을 ▲‘오류 추종의 오류’, ‘세계 인식의 오류’ ▲‘우상 집착의 오류’ ▲비이성적, 비합리적 ▲‘부당한 공포의 방정식’ ▲미국의 ‘성공’을 확실한 것으로 미리 전제하는 위험한 도약, ‘지성의 몰역사적 무의식’ ▲‘역사에 대한 심오한 무지’ 등으로 명쾌하게 설파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네 가지 생각해볼 거리를 제시한다. ▲정부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다수 국민과 언론이 그 결정을 지지했을 때 나라 전체가 총체적 난국으로 침몰한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철저히 실패하고 있고 그 실패를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나올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악몽은 무엇보다도 이라크 침공이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틀린 동기와 목적에서 출발한, 틀린 기획이었다는 데서 연유한다. ▲세계 유일 초강국의 권력 핵심이 중세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망상으로부터 영감을 끌어내고 행동지침을 안내받을 때 그 권력과 여타 세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그 권력에 대응해야 하는가.
이 책의 마지막 4부 <전쟁, 테러리즘, 거래되는 인간의 고통>에서는 테러와 관련돼 일반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내용들을 모아 책의 주제를 좀더 넓게 확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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