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다큐멘터리사상 최대의 쾌거, EBS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
비상업 저예산 독립영화들의 일반극장 상영이 좀체로 어려운 국내 현실에서 EBS TV가 새로운 모색의 방향을 제시하는 국제급 행사를 개최하고 있는 중이어서 영화계뿐 아니라 국내 방송계의 지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8월30일 개막한 제1회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은 현재 매일 21시간씩 9월5일까지 모두 1백30여편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며 국내 관객 및 시청자들에게 희대의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하루 24시간 편성 가운데 거의 전 시간을 할애해 영화제 방송을 하기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 방송사상으로도 처음있는 일이다.
크리스틴 초이, 왕샤오룽 등 이번 EBS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찾은 세계적인 작가들은 입을 모아 이번 행사가 유례없이 도발적이고 파격적이라며 이는 결국 다큐멘터리 기본정신과도 그 맥이 닿아있는 것이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는가?>로 국내팬들에게도 낯익은 재미 다큐멘터리스트 크리스틴 초이는 개막식 축사에서 단 한마디로 이번 영화제에 대한 자신의 기쁨을 표현했다. "EBS 만세!" 크리스틴 초이의 환영사는 국내외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이번 EBS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보는 시각을 대표하는 것이다. 좀처럼 상영기회를 얻기 힘들었던 다큐 작가들로서는 EBS의 이번 시도가 매우 의미있게 받아들여질 것이 분명하다.
다소 무모하리만큼 파격적인 편성을 선보인 EBS TV의 이번 실험은 국내 다큐멘터리계의 새로운 전기를 구축할 것으로 보이며 방송과 통신, 방송과 영화산업의 통합작업에 있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마련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한 국가의영화산업, 영상산업의 발전에 있어서 방송이 해야할 기능, 그 방향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적절한 사례로 꼽힐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영화제를 통해 선보이는 대다수의 작품들은 세계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았거나 혹은 현재 많은 사람들로부터 집중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는 작품들이다. 크리스틴 초이 감독은 이번 영화제 개막작으로 자신의 신작인 <주부의 얼음땡>을 가지고 왔으며 이란의 압바스 키에로스타미는 인도 미라 네어 감독은 <인도의 폭소클럽> 등을 보내왔다. 얼마 전 사망한 독일의 논쟁적 다큐멘터리스트 레니 리펜슈탈의 말년작 <신비로운 바다여행>같은 작품도 만날 수 있으며 독일 베르너 헤어조그이 <시간의 수레바퀴>도 방영된다.
거장들의 작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프가니스탄 작가 세디그 바르막의 <오사마>라든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라크계 예하네 나우자임 감독의 <알 자지라 뉴스룸>과 야노 로세비아니 감독의 <사담의 대학살>처럼 지금의 국제분쟁이 왜 일어났는지 또 어떻게 진행됐는지, 그 결과는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다큐멘터리들도 수두룩하다. 일개 방송사가 방송 온 에어용으로만 모은 프로그램들이라고는 결코 무시할 수 없을만큼 세계 최고의 작품들, 한창 논쟁을 모으고 있는 작품들을 끌어 모았다. 일부 시청자들은 하루종일 EBS TV를 녹화해 가며 다큐멘터리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을 정도다.(영화제 프로그램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www.ebsdoc.co.kr 참조)
EBS의 이번 다큐 축제는 철저하게 EBS의 새로운 선장으로 지난 해 취임한 고석만 사장의 아이디어와 추진력에 힘입은 바 크다. 고 사장은 지난 해 9월 ABU 총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24시간 다큐멘터리 방송제를 생각했다고 한다. 고석만 사장은 "이 기획이 알려졌을 때 내부에서는 반발도 있었고 기대도 있었다"며 "분명한 것은 모두들 지나치게 모험적인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석만 사장의 모험은 현재까지는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화제는 EBS TV에서 각각의 작품을 잇따라 방영하는 것을 기본으로 EBS 인터넷 사이트로도 동시에 구현함으로써 온-오프 영화제의 기본설계를 충족시키고 있으며 서울 강남의 코엑스홀에서는 다큐멘터리 제작, 비평과 관련한 각종의 세미나가 개최중이다. 이번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은 한마디로 세계 다큐멘터리가 총 집산된 영화제로 해외 기록영화계의 흐름이 반영돼 있다. 무엇보다 공영방송이 다큐멘터리의 보급과 대중화에 앞장섬으로써 국내 영상문화에 새로운 전환점을 개척해 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번 EBS영화제를 계기로 영화계에서는 다큐멘터리가 극영화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훨씬 재미와 의미가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더 나아가 저예산독립영화, 작가주의 예술영화 등 비상업영화권이 새로운 활로를 찾아가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제는 방송과 영화가 같이 나아가야 할 때"
EBS TV 고석만 사장 인터뷰**
다음은 이번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을 기획 집행한 고석만 사장과의 인터뷰. 고석만 사장은 1973년에서 1995년까지 MBC에서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 <3김 시대> 등 정치 드라마를 만들었던 드라마 PD 출신이다. MBC를 나온 이후에는 영화사 <드림써치> 고문, KTV방송국 사장을 지냈다. 고석만 사장은 유명무실한 케이블TV로 시청률 제로에 가까웠던 KTV를 공영방송 수준으로 개혁시키는 등 방송개혁에 있어 남다른 추진력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오동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됐나?
고석만: 편성을 통으로 터버리고 24시간 가까이 영화제 영화로만 방송을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처음엔 정말 엉뚱하게 보더라. 하지만 컨텐츠가 파괴력을 가지고 일반 시청자들과 호흡하고 또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파괴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임팩트가 필요했다. 그 고민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이 영화제다. 사실상 24시간 영화제는 아마도 우리가 처음일 것이다.
오: 왜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생각했는가?
고: 다큐멘터리를 포함해 비상업 예술영화는 우리같은 공중파TV가 지원을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제는 케이블TV만 하더라도, 물론 나름대로 전문성이 있긴 하지만, 보다 상업적인 영화들을 트는 매체가 돼버렸다. 그렇다고 지금의 공중파 가운데서 KBS MBC SBS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가 해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아방가르드 필름 운동이 진행됐던 상황을 봐라. 소수의 작은 극장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상영이 이루어진 끝에 이른바 프랑스 예술영화의 꽃이 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근데 우리에게는 특색있고 개성있는 전용소극장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있다고 해도 예술운동의 조류를 만들어 내고 잇지 못하거나. 그렇다면 우리 EBS가 대신 프랑스에서 예술영화들을 육성했던 그런 작은 극장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봤다. 우리는 지금 바로 그렇게 새로운 운동을 시작한 셈이다. 작은 기폭제가 됐으면 좋겠다.
오: 세계 방송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고: 그렇다. 그런데 그점을 편성면에서만 보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방송을 다 연 것은 물론이고 온 라인, 그러니까 인터넷 사이트도 동시에 열었다. 온 라인과 오프 라인이 동시에 이렇게 호흡을 이루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른바 방송과 통신이 융합되는 시점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몸소 실천해 내고 있는 셈이다.
오: 모델이 됐던 외국방송의 사례가 있나?
고: 이렇게 전면적으로 방송편성을 획기적으로 잡은 사례는 없을 것이다. 굳이 모델이 됐다면 미국의 교육방송인 PBS의 P.O.V(Point Of View) 프로그램이다. 독립 영화인들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들을 PBS가 일정 액수의 판권료를 내고 구입해서 방송해 주는 것이다. 유수의 외국 다큐멘터리 영화제도 참조가 됐다. 미국 시카고다큐멘터리영화제, 프랑스의 퐁피두인문사회다큐멘터리페스티벌, 캐나다의 토론토다큐멘터리페스티벌, 그리고 일본 야마카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등등 담당PD들이 이번 행사를 준비하느라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순례했다.
오: 영화제를 시작한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어떤 일때문이었나.
고: 지난 해 9월에 ABU(Asia Broadcasying Union) 총회에 갔을 때 많은 회원국들이 의외로 한국의 EBS가 뭔가 세계 영화계와 방송계를 위해서 일정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 영화제는 그런 기대감을 느끼던 와중에서 순간적으로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시작된 셈이다. 모험적이었지만, 그리고 여전히 모험적이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난 이번 영화제에 깊은 자부심을 느낀다.
오: 시청자들, 영화팬들의 반응이 어떤가?
고: 한편으로는 놀랍고 또 한편으로는 매우 반가워 하는 반응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번 영화제에 자신의 작품을 직접 출품하기도 한 영상원의 김소영 교수 얘기로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한 외국인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우리가 방영했던 D.A. 페니베이커의 1967년작 <뒤돌아보지마라>는 미국 극장가에서도 만나기 힘든 작품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하더라. 첫회 행사인 만큼 시청자들의 반응이 정확하게 모아지지 않겠지만 아마도 그와 같은 비슷한 반응들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오: 방송CEO로서 도발적인 아이디어, 막강한 추진력으로 정평이 높다.
고: 그렇게들 얘기하지만 그게 뭐 대단한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예의 주시하다 보니까 그걸 가끔 잘 읽어내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의 수능방송도 그런 예 가운데 하나다. 방송과 통신이 융합되는 시대라는 것을 생각했고, 97년 수능방송의 실패를 분석했다. 무엇보다 사교육비가 포화상태에 이른 지점이어서 누군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방송에 있어서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은 세태의 변화와 그 흐름을 잘 읽어내야 가능한 일이다.
오: 영화제는 비교적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행사다.
고: 하지만 이번 행사는 적정규모에서 치러진 행사다. 일반 영화제처럼 필름수급을 위해 통관절차를 거쳐야 하는 등 부대비용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송판권만 들여오는 일이었고 상영관을 특별히 마련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비교적 경제적으로 행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본다. 진정한 아이디어는 살림수준에 맞춰 나오는 것이다. 평소의 내 지론이다.
오: 평소에도 영화에 대한 애정이 큰 것으로 알고 있다.
고: 20여년간 드라마PD로 일하다가 그만두고 나왔을 때 잠깐이나마 영화사에 몸담은 적이 있다. 후배PD가 영화를 만드는데 역할을 했다. 영화는 내게 늘 소중했다. 이번 일을 하면서 오히려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다. 영화제 책임자들은 늘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더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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