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홍천군 서석면의 북측 고양산 아래 풍암 2리 ‘고양산 아람마을’은 높은 산을 배경으로 앞쪽으로 넓은 뜰이 펼쳐진 말 그대로 배산임수의 명당 마을이다. 특히 산들이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매우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이다.
그런데 이 마을은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94년 동학혁명 농민군 전투의 마지막 격전지로 풍암리 동학농민혁명군 마지막 대전투가 있었다. 마을에 ‘자작고개’라는 지명은 그 피의 항쟁을 대변하고 있다.
그 당시 전투에서 피가 자작자작 흘렀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 자리에는 현재 강원도 기념물 25호 동학농민운동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 아래로 마을이 펼쳐져있다.
126년 전, 이 마을은 서석면의 중심지로 장터와 공공시설들이 위치해 있었다. 현재는 자작고개 너머 지령리(풍암 1리)에 국도와 함께 공공기관 및 학교, 상가 등이 위치해 중심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로써 풍암 2리는 마을의 지위가 강등되어 버린 셈이다.
동학혁명 당시 시대적 배경을 보면, 조선왕조는 18세기 영조와 정조 통치 하에서 개혁과 문화 창달을 시도하여 부흥의 시대를 맞는 듯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서면서 안으로는 11세의 순조(純祖), 8세의 헌종(憲宗), 18세의 철종(哲宗), 12세의 고종 등 어리고 무능한 군주들이 즉위하여 외척들이나 권신들이 실권 장악하고, 사리사욕과 당파 이기주의로 권력투쟁이 날로 심하였다.
국가 기강이 무너져 매관매직(관직을 사고파는 일)이 빈번하였고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음)가 극심하였다. 밖으로는 서구열강과 제국주의의 통상개화 요구로 조선사회 자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위기 속에 있었다.
동학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이루어진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당시 서석면 풍암리 동학농민군 전적지에서는 2차 봉기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다.
1894년 3월 봉건체제 개혁을 위해 1차 봉기가 있었고,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2차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894년 10월 21일 차기석1)이 인솔하는 수 천명의 동학혁명군이 서석면 풍암리에서 출발, 내촌면 물걸리에 집결해 동창을 소각하고 홍천관아를 습격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2).
동학군은 맹영재3)가 거느린 관군과 장야촌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0월 22일 벌어진 풍암리 전투는 수천여명의 동학농민군을 맹영재가 이끈 홍천, 여주, 얀근, 지평, 춘천 등의 포군 1,000명이 공격한 전투였다.
조직적 훈련과 신식무기를 지닌 관군을 동학군은 대적할 수 없었다. 풍암리에서 마지막 결사 항쟁을 벌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풍암리 이웃마을인 생곡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는 ‘피리골’이라는 지명을 한자로 전환한 것이다. 지명의 유래를 보면 계곡으로 숨어든 동학군들이 서로 피리를 불며 연락을 취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동학 대접주 차기석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결국 홍천군 내면으로 퇴각했다. 이후 11월 중순 경 내면 명개리에서 최종 토벌될 때까지 그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결국 생포되어 강릉에서 풍암리 전투 한달 후인 11월22일 효수되었다. 풍암리 전투 패배후 강원도의 동학농민군은 이전과 같은 기세를 보이지 못하였다.
이것은 역사적 비극이었다. 일본군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국왕을 인질로 잡은 일본군 앞에서 관군과 동학군이 싸워 결국 일제침략의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능한 왕권을 심판하고 탐관오리들을 제거할 아래로부터의 동학혁명은 결국 기회를 잃고 말았다.
강원도는 동학 제2의 고향이자 동학혁명의 원천이었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의 뒤를 이어 그 전파임무를 부여받은 해월 최시형은 경상도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동학을 전파했으나 영해지방에서 1871년 교조신원운동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고 지하화 되었다.
관의 추격을 받던 해월을 받아 준 곳이 강원도였다. 강원도에서 숨어 지내며 동학경전을 발행하는 등 제2의 동학부흥을 실현해 나갔다. 강원도에서 재기에 성공해 전라도와 경기도 등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실제로 강원도가 없었다면 동학은 존재할 수 없었고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될 수 없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군은 서석을 넘지 못하고 산화했다. 풍암리 전투는 엄청난 마지막 피의 항쟁이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의 역사, 동학에 대한 중요성은 그 동안 묻혀 있었다.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적지라는 사실도 동학혁명 후 80여 년 간 알려져 있지 않고 있었다.
지방자치, 풀뿌리 민주주의가 부활되면서 일부 역사학자들의 관심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그간 묻혀있던 역사적 사실들은 거의 다 없어지고 말았다.
국가와 관에 의해 조성된 동학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동학군의 후손들에게 죄인처럼 숨기고 살아야 할 사실로 여기게 하였고, 그로 인해 후손들에 의해 보존될 수 있었던 자료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실제 풍암 2리에는 조상의 제삿날이 같은 집들이 흔히 발견된다. 이 마을에서는 지금도 동학 관련 이야기는 금기어다.
따라서 당시에 대한 객관적 관련 기록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주민들의 기억들이 구전되어 알려지고 재구성 되고 있는 수준이다.
풍암리 전투 실패로 농민군은 대부분 죽고 동네 주민들까지 몰살되었다. 당시 관군 보고서에는 ‘홍천 서석 일대는 사람의 자취가 영원히 끊어졌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풍암리 주민들은 동학농민군에게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진압군의 화풀이 대상으로 몰살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동학농민군의 희생 규모, 전투 상황, 유해의 참혹상, 지역주민 학살 장면 등 참혹한 실상을 보여주는 것은 몇몇 후손의 증언으로 구전되고 있을 뿐이다.
전국 각 지역에서 모인 동학농민군 대부분은 무명용사로 전사자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나 기록이 없었다. 따라서 사망자의 신원 또한 알 수 없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친일성향 학자들에 의해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정부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 그리고 전라도 지방에서 일어난 민란’이라고 철저하게 왜곡 축소되었었다.
2004년에 이르러서야 16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이 되고,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에 5.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제정했다.
근대 민주주의의 뿌리이자 애국애족 정신의 표상인 동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1894년 5월 11일 황토현 전승일을 동학 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제정한 것이다. 이날은 동학군이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둠으로써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던 날이다.
역사적으로 동학혁명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연 갑오개혁의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다. 외세인 청과 일본의 개입이 없었다면 풀뿌리 민주주의 역사는 126년 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당시 호남 지방 각 군현에 설치되었던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는 우리가 꿈꾸고 있는 마을자치의 모델이었다. 이 혁명이 성공했다면 유럽의 선진 자치 국가처럼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도 훨씬 앞당겨 발전했을 것이다.
동학혁명의 실패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고 일제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이후 동학정신은 3대 동학 교주 손병희 선생의 활약 등 일제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인 3.1운동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고, 일제 강점기 의병항쟁, 항일운동 등의 바탕이 되었으며, 광복 후에는 민주화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혁명의 이러한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서석면 풍암리는 ‘자작고개’ 옆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최근 그 아픔을 뒤로 하고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꾹꾹 눌러 참아온 울분을 이제 활기찬 마을 조성 사업으로 풀어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에는 ‘2020년 농식품부 주관 농업환경 보전 프로그램 선정을 축하드립니다’라는 현수막이 게시되어 있다.
마을 회관 안쪽에는 깡통열차가 놓여 있어 농촌체험관광을 준비하고 있고, 도자기 체험 공방, 목각 시계 장식품과 도마 및 와인 보관대 등 다양한 상품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제는 역사의 아픔을 마을의 자부심과 자랑으로 삼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시작해 더 잘사는 마을, 더 행복한 마을을 만들자는 각오를 하기 시작했다.
마을 지도자들과 주민들은 천천히 착실하게 발전 사업을 준비하며 한마음으로 적극 참여하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고양산 아람마을은 예로부터 볕이 잘 들고 바람이 분방하게 오가며 앞으로는 하천이, 뒤로는 산이 있어 사람이 살기 좋은 터전이었다. 쌀밥 먹고 장작불로 따뜻하게 사는 부촌으로 다른 마을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현재는 고령화와 공동화로 다른 농촌마을처럼 어려운 실정이지만, 동학정신을 계승하여 새로운 농촌, 희망의 농업을 만들어 내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소문나서 최근 귀농귀촌 의뢰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위기가 곧 기회라고 생각하며, 전국에서 살기 좋은 대표 마을이 되겠다는 의지로 마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108가구 221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90가구 150명 정도가 상주하고 있다. 주민들은 ‘열정을 가지고 결과보다 과정에서 행복을 꿈꾸는 고양산 아람마을’이란 비전을 설정하고 마을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특히 ‘풍우회’라 불리는 마을 자생단체는 스스로 회비를 거둬 운영하는 등 오랫동안 마을 발전을 위한 지지기반이 되어왔다.
이러한 유무형의 자원들을 바탕으로 새농어촌운동에 이어 2015년 일반 농산어촌 개발사업 마을 만들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지난해 농촌종합개발사업에 선정되어 올해부터 추진하게 된다. 이에 더하여 농업환경보전프로그램에도 선정되어 깨끗한 마을 만들기와 생태환경 조성을 함께 추진한다.
올해 시작되는 농촌축제사업도 마을의 정체성을 살리는 새로운 농림부 사업으로 선정되어 추진된다. 126년 전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여 풍암리가 마을 자치모델 집강소로 재탄생하길 기원해 본다.
1) 홍천의 차기석 포는 강원도 지역 전체를 통 털어 가장 강력한 포였다. 차기석 대접주는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척왜양창의운동에도 참가하였으며 사실상 강원도의 총수령으로 총천을 비롯하여 평창, 영월, 정선, 강릉 등지의 동학군을 지휘하는 등 강릉, 양양, 원주, 횡성, 홍천 5읍의 대접주였다.
2) 현재 역사학회에는 이 물걸리에서 시작된 봉기가 관군에 의해 소멸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3) 지평의 만보군은 1984년 9월 12일 팔봉을 기습해서 동학군의 서울위협을 제거했고 그 공적으로 지평현감이 되었고 경기도와 충청도 여러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을 견제하면서 그 지도자들을 체포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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