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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극우의 외침, "다시 가자! 조선으로,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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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극우의 외침, "다시 가자! 조선으로, 세계로"

[후소샤 역사교과서 11개 문제항목 원문] "일본은 아시아해방군"

일본 수도인 도쿄도의 교육위원회가 일본 극우단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이른바 '후소샤 역사교과서'를 공립학교 교과서로 정식으로 채택해 큰 파문이 일고 있다. '제2차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의 발발이다.

이번에 채택된 교과서는 지난 2001년의 '제1차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 당시의 역사교과서를 한층 개악한 내용을 담고 있어 파문을 증폭시키고 있다. 내년도 개정판은 왜곡과 은폐투성이인 기존 역사교과서의 내용에다가 난징학살과 조선인 및 위안부 강제 연행 등 관련, 모호하게나마 일본 책임 인정 표현 부분을 아예 삭제하고 있다.

현재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극우들은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일본 전역의 교육위원회가 후소샤 역사교과서를 채택하도록 집요한 로비를 펼치고 있으며, 이번 도쿄도 교육위원회가 이 교과서를 채택한 배경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본지는 이번 사태의 중차대성을 국민 전체가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 지난 2001년 후소샤판 역사교과서에서 우리나라와 관련해 문제가 되고 있는 주요내용을 원문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원문은 2001년 당시 우리나라 학자와 시민단체, 외교부 등이 중심이 돼 만들어졌던 '일본역사교과서왜곡대책반'이 번역한 <후소샤 일본중학교 역사교과서> 에 기초한 것이다.

다음은 후소샤 역사교과서의 대표적 왜곡 사례로 꼽히는 11개 항목의 전문이다. 편집자주

***임나일본부설 조작(37~39쪽)**

급속하게 강대해진 고구려는 313년에 이 무렵 중국영토였던 낙랑군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제민족의 질서는 느슨해졌는데, 야마토조정도 이에 대응하여 반도에의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고구려는 반도 남부의 신라와 백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백제는 야마토조정에 구원을 앙청(仰請)하였다. 본래 일본열도의 사람들은 철자원을 구하려고 조선반도 남부와 교류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4세기 후반 야마토조정은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하였다. 야마토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任那; 加揶)라는 지역에 거점을 둔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남하정책을 취했다. 바다를 건넌 야마토조정의 군세는 백제를 도와 고구려와 격렬하게 싸웠다.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왕(好太王) 비문에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의 사건으로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지금의 서울)을 빼앗고 반도 남부를 석권하였다. 그러나 백제와 임나를 지반으로 한 일본군의 저항에 부딪쳐 정복은 이루지 못하였다.

5세기 중엽 중국에서는 남쪽에 송, 북쪽에 북위가 건국하여 이른바 남북조시대를 맞이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강국에 그 주변의 나라들이 공물을 바쳐(조공) 신하의 나라가 될 것을 맹세하는 외교가 행해지고 있었다. 야마토조정과 백제는 중국의 남조에 조공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북위에 조공하여 동맹관계에 있었다. 야마토조정과 백제가 굳이 송의 조공국이 된 것은 송의 힘을 빌어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의 고대에는 조공 등을 한 시기가 있지만, 조선과 베트남 등과 비교하면 독립된 입장을 관철하였다.

***3국의 일본조공설 조작(40쪽)**

6세기가 되면 반도의 정치정세에 변화가 생겼다. 그렇게도 무위를 자랑하던 고구려가 쇠퇴하기 시작하고, 지원국이던 북위도 조락하게 되었다. 그 대신에 신라와 백제의 국력은 증대하였다. 임나는 양국으로부터 압박을 받았다. 고구려가 강대하던 시대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정세의 변화였다. 임나는 신라로부터는 침략을 받았고 백제로부터는 영토의 일부의 할양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백제와 야마토조정의 연대만은 계속되었다. 신라-고구려가 연합하여 백제를 위협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538년(일설에는 552년)에 백제의 성명왕은 불상과 경전을 일본에 헌상하였다. 백제로부터는 도움을 청하는 사자가 열도에 잇달아왔다. 그러나 562년 임나는 멸망하여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그런데 570년 이후가 되면 동아시아 일대에 그때까지의 제국의 동향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새로운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것이 새로운 위협이 되어 삼국은 일본에 더욱 접근해왔다. 임나에서 철퇴하여 반도정책에 실패하였던 야마토조정이었지만, 이리하여 다시금 자신감을 회복하였다고 생각된다.

***강화도 침공 왜곡(198~200쪽)**

중국이나 조선, 베트남 등은 구미와는 전혀 다른 옛날부터 내려오는 국가 개념을 따르고 있었다. 고래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이나 베트남은 그 내부에 들어가서 중국 역대왕조에 복속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중화질서 밖에 있었던 일본은 이 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1868년 일본은 조선에 사절을 보내어 신정부의 수립을 알리고, 새로운 국교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문면에 천황의 '皇'이라는 중국황제와 동렬의 칭호가 사용되고 있음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국서의 수취를 거절하였다.

그후 일본군함이 조선 강화도에서 측량을 하는 등 시위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조선군대와 교전한 사건(강화도 사건, 1875년)을 계기로 일본은 다시 조선에게 국교 수립을 강효했다. 이는 조선측에 불평등한 조약이었으나 오랫동안의 현안이었던 조선과의 국교가 수립되었다. 그결과 1876년 일조 수호조규가 맺어진다.

***정한론(202~203쪽)**

국내에서는 1873년 일본의 개국 권고를 거절하여 온 조선의 태도를 무례하다고 하여 사족(사무라이)들 사이에서는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을 개국시키자는 정한론이 들끓었다.

폐번으로 실직한 사족들은 정부가 대신 지급하는 가록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징병제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싸우는 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졌던 많은 사족들의 불만이 높아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한의 싸움으로 자기들의 존재의 의의를 나타내려고 하였던 일면이 있었다.

그들이 기대하였던 것이 사절단의 유수(留守)를 담당하고있었던 정부의 참의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사이고는 정부개혁을 진행시키면서도 사족들의 정신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사회적 역할과 명예를 지켜주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이고는 자기가 사절로서 조선에 갈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등 다른 참의도 동의하였다. 사이고는 일본이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자기가 희생당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였다. 자기가 조선에 가서 살해당하면 그것을 명목으로 일본이 출병하고 조선의 문호를 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귀국한 이와구카라와 오쿠보는 '부국 우선'의 생각과 '정한'이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는 전쟁이 될 위험이 있으므로 조정과 정부 내부에 공작하여 사이고의 사절 파견을 연기하였다. 이에 분개한 사이고, 에토, 이타가키들은 참의를 사직하였다.

***조선침공 정당론(216~218쪽)**

동아시아의 지도를 보자.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조금 떨어져서 바다에 떠있는 섬나라이다. 이 일본을 향하여 대륙에서 하나의 팔처럼 조선반도가 돌출되어 있다. 당시 조선반도가 일본에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면 일본을 공격하는 기지가 되고, 배후지를 갖지 못하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방위가 곤란해진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조선의 종주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청조였으나 그 이상으로 두려운 대국은 부동항을 구하여 동아시아로 눈을 향하고 있었던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91년에 시베리아 철도 건설에 착수하여 그 위협은 임박하였다. 일본 정부 중에는 러시아의 힘이 조선에 미치기 전에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는 조약을 각국에 맺게 하고, 중립 보장을 위해 일본의 군비를 증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한편 청나라는 동아시아 정세를 다른 입장에서 보았다. 청은 최후의 유력한 조공국인 조선만은 잃지 않으려고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삼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개국후 그 근대화를 도와주려고 군제의 개혁을 원조하였다. 조선이 외국 지배에 굴복하지 않는 자위력을 갖춘 근대국가가 되는 것이 일본의 안전에도 중요하였다. 그러나 1882년 군제개혁에서 소외된 일부 조선군인의 폭동이 있었다(임오사변). 청나라는 이를 계기로 수천의 군대를 파견하여 바로 폭동을 진압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884년 일본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던 김옥균 등의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이 때에도 청나라 군대는 친일파를 철저히 탄압하였다(갑신사변).

1894년 조선 남부에 동학난이라고 불리우는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동학당은 서양 크리스트교(서학)에 반대하는 종교(동학)을 신앙하는 집단이다. 그들은 외국인과 부패한 관료의 추방을 목표로, 한때는 수도인 한성에 육박하는 기세를 보였다. 약간의 병력밖에 갖지 못한 조선은 청에게 진압을 위한 출병을 요구했으며, 일본도 갑신사변후 청나라와의 합의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여 일청양군이 충돌하여 일청전쟁이 시작되었다.

***러일전쟁=피압박민족 해방론(222~223쪽)**

러시아는 일본의 10배의 국가예산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만주의 병력을 증강하고 조선 북부에 군사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대로 두면 러시아의 극동군사력은 일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강되는 것은 명확하였다. 정부는 더 늦기 전에 러시아와의 전쟁을 시작할 결의를 굳혔다. 1904년 2월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얻어 러시아와의 싸움을 시작하였다(일러전쟁).

일본해 해전에서 승리하였을 때 일본은 이미 외국으로부터의 차입금과 국채로 메운 국가예산의 8젼분에 해당하는 군사비를 소모하였다. 장기전이 되면 러시아와의 국력차가 나타나 형세가 역전될 것은 명백하였다. 미국대통령 루즈벨트는 일본에 가장 유리한 시기를 선택해 일러간 강화를 중재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한국(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쳤다)의 지배권을 러시아로부터 인정받았고, 관동주의 조차권을 획득하고 러시아가 건설한 남만주 철도의 권익을 이어받아 남사할린의 영유를 확인받았다.

일러전쟁은 일본이 생사를 건 장대한 국민전쟁이었다. 일본은 이에 승리하여 자국의 안전보장을 확립하였다. 근대국가로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유색인종의 나라 일본이 세계최대의 육군대국이었던 백인제국 러시아에 이겼다는 것은 세계의 억압받는 민족들에게 독립에 대한 한없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황색인종이 장래 백색인종을 위협할 것을 경계하는 황화론을 구미에 널리 퍼지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일제의 한국강점 합리화(238~241쪽)**

일러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에 용기를 얻은 황색인종의 나라에서는 내셔널리즘이 일어났지만 터어키와 인도같은 먼 나라에서는 단순히 일본에의 존경과 공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국과 한국 같은 가까운 나라에서는 자국에 세력을 확대하려 하는 일본에 대한 저항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게다가 일본에는 대국으로서 다른 모든 대국과 힘의 균형 정책을 유지해야 할 새로운 필요가 생겼다.

러일전쟁후 일본은 한국에 통감부를 두고 지배를 강화하였다. 일본정부는 한국을 병합하는 것이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어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영국, 미국, 러시아의 삼국은 조선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서로 경계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1910년 일본은 한국내의 반대를 무력으로 배경으로 억누르고 병합을 단행하였다(한국병합).

한국 국내에서는 일부 병합을 받아들이자는 소리도 있었으나 민족의 독립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있었으며, 그후에도 독립회복의 운동이 끈질기게 일어났다.

한국병합후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철도, 관개시설을 정비하는 등 개발을 행하고 토지조사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 토지조사 사업에 의해 그때까지의 경작지로부터 쫓겨난 농민도 적지 않았고, 또한 일본어 교육 등 동화정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조선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이 강해졌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7천명 학살 왜곡(256쪽)**

1923년 9월1일 관동지방에 대규모의 지진이 일어나 도쿄, 요코하마 등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약 70만호가 피해를 받았으며, 사망자, 행방불명자가 10만을 넘었다(관동대지진). 이런 혼란 중에 조선인 및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불온한 책동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주민 자경단 등이 사회주의자 및 조선인,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동아전쟁=아시아 피압박민족 해방론(276~277쪽)**

1941년 12월8일 오전 7시 사람들은 일본군이 미-영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임시뉴스로 알았다. 일본은 말레이시아, 필리핀, 자바, 버마 드에서미, 네덜란드, 영국군을 깨고 결국 100일 정도에 대승리를 거둬 서전을 제압했다.

이것은 수백년에 걸친 백인의 식민지지배에 고통받던 현지사람들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승리였다. 일본의 서전 승리는 동남아시아 사람들, 나아가서는 아프리카인들에게도 독립에의 꿈과 용기를 북돋았다.

일본정부는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고 명명했다(전후 미국은 이것을 태평양전쟁이라고 불렀다). 일본의 전쟁목적은 자존자위와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일이라고 선언했다. 일본에 이어 독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 독, 이에 대항해서 미,영,네덜란드, 소, 중이 연합하여 싸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하였다.

전쟁초기에 일본군이 연합군을 격파한 것은 장기간 구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아시아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일본군의 포로가 된 영국군 인도병사 중에서 인도국민군이 결성되어 일본군과 협력하에 인도를 향해 진격했다. 인도네시아와 미얀마에서도 일본의 원조로 군대조직이 만들어졌다.

일본의 지도자둥에는 전쟁수행을 위해 점령지역을 일본의 군정하에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강했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이 일본에 보내는 기대에 답하기 위해 일본은 1943년 미얀마, 필리핀을 독립시키고 또 자유 인도 임시정부를 승인했다.

더욱이 일본은 이러한 아시아 각 지역에 전쟁에의 협력을 요청하고 단결을 과시하기 위해 1943년 11월 이 지역의 대표를 동경에 초청하여 대동아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에서는 각국의 자주독립, 각국의 협력에 의한 경제발전, 인종차별 철폐를 제창한 대동아공동선언이 발표되어 일본의 전쟁이념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연합국의 대서양 헌장에 대항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일본의 학살 합리화(288~289쪽)**

여태까지의 역사에서 전쟁을 통해 비무장한 사람들에 대한 살해와 학대를 전혀하지 않은 나라는 없고,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군도 전쟁중에 진공한 지역에서 포로가 된 적국의 병사와 민간에 대해서 부당한 살해와 학대를 했다.

한편 많은 일본병사와 민간인도 희생되었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군은 만주에 침입하여 일본의 일반시민을 살해,약탈, 폭행을 거듭하였으며, 포로를 포함해 60만명의 일본인을 시베리아로 강제연행하여 가혹한 노동을 시켰으며 약 1할을 죽게 만들었다. 또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원폭투하로도 방대한 수의 희생자가 나왔다.

나치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중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한편 일본은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일본인 중에는 유대인을 도운 사람들도 있었다. 육군소장 히구치 기이치로는 시베리아를 통해 도망쳐온 유대난민의 만주국 입국을 인정하고 구원했다. 또 리투아니아 주재영사였던 스기하라 지우네는 6천명의 유대인에게 비자를 발급하여 일본을 경유하여 도망갈 길을 열어주었다.

***일본전범 재판 부당론(294~295쪽)**

점령군은 일본의 육해군을 해체하고 1946년 5월부터 2년반에 걸쳐서 극동군사재판소를 개정하고 전쟁중의 지도적인 군인과 정치가를 '평화에 대한 죄' 등을 범한 전쟁범재자(전범)로 재판에 회부했다(동경재판)> 그들은 전부가 유죄라고 선언되어 도조 히데키 이하 7인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재판은 일본이 9개국 조항과 부전(不戰)조약에 위반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이들 조약에 그것을 위반한 국가의 지도자를 이런 형태로 재판에 회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평화에 대한 죄'는 자위전쟁이 아닌 전쟁을 개시하는 것을 죄로 삼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죄로 국가지도자를 벌하는 것은 그때까지의 국제법의 어떤 역사에서도 없었다. 나아가 재판관은 전원 전승국에서 선임되고 재판의 실제 심리에도 검찰측이 내세운 증거의 많은 부분은 그대로 채용되는 것에 반해서, 변호인측이 신청한 증거조사는 각하되는 경우가 많았다.

GHQ(연합군총사령부)는 신문,잡지,라이도,영화를 통하여 일본의 전쟁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를 선전했다. 이러한 선전은 동경재판과 함께 일본인의 자국의 전쟁에 대한 죄악감을 키워, 전후 일본인의 역사인식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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