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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들, 신의장 부친 고문행위 잇따라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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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들, 신의장 부친 고문행위 잇따라 증언

조문기 선생 "헌병 오장의 죄악상, 아주 소름 끼쳐"

신기남 열린우리당 당의장의 부친 신상묵씨로부터 일제강점기때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이 잇따라 당의장직 즉각사퇴를 거부하던 신의장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신의장은 이에 따라 금명간 당의장에서 사퇴할 것으로 알려졌다.

***신상묵 "나도 나름대로 나라를 사랑해서 이런 일 한다"**

경기 고양시에 살고 있는 차익환씨(79)와 부산에 살고 있는 김장룡씨(78)는 신의장의 부친 신상묵씨의 일본군 헌병 복무 사실이 알려진 직후인 17일 언론들과 만나 자신들이 신상묵씨로부터 받은 고문 사실을 폭로했다.

1944년 4월 경남 진해의 일본군 제51해군 항공창에 취업해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비밀결사를 만든 뒤 노동자들의 태업을 유도하는 등 항일활동을 벌이며 이 사실을 건국연맹에 보고하던 중 그해 7월 체포됐던 차익환씨는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 신의장 부친 신상묵씨의 사진을 보고 "그래 바로 이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차씨는 "일본군 헌병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 신상묵씨가 창씨개명한 일본이름)가 일본육군 헌병대 취조실에서 나를 취조하면서 거꾸로 매달고 코에 물을 부었으며 각목으로 마구 때렸다"고 증언했다. 그는 "당시 다른 한국인 헌병대원 한명과 함께 취조와 고문을 한 시게미쓰는 오장의 윗 계급인 군조(軍曺, 중사)였고 명찰을 달고 있었으며, 55여일동안 매일 고문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게미쓰는 고문을 하면서도 은근한 회유를 시도했고, 있지도 않은 조직도를 내밀며 사실대로 시인하라고 협박했다"고 덧붙였다.

차씨는 그해 12월 군법회의에서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중 해방이 되면서 풀려났다.

또다른 증인은 부산 진구 범천2동에서 순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장룡씨로, 김씨 역시 신상묵씨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날 취조하던 일본 육군 오장(伍長) 시게미쓰가 맞다"고 말했다. 부산제2공립상업학교(현 부산상고)를 졸업한 김씨는 차익환씨와 같은 시기에 일본군 제51군해군 항공창에 취업해 차씨와 함께 비밀결사를 만들어 활동하던 중 차씨와 함께 일본 헌병에 체포됐다.

김씨에 따르면, 시게미쓰가 취조중 "나도 한국인이다. 대구사범학교를 나왔다"고 말해 "한국사람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졌더니 "나도 나름대로 나라를 사랑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거다. 그런데 너희들같이 좋은 학교(부산 제2공립상업학교) 나온 젊은이들이 왜 이런 반역·반일 운동을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이어 시게미쓰의 부하 2~3명이 김씨를 바깥으로 끌고 나가 우물에 거꾸로 매달아 빠뜨렸다가 빼는 등 물고문을 하는가 하면, 잠도 재우지 않고 옷을 벗겨 뾰족한 돌밭 위에 종일 꿇어앉아 있게 하는가 하면, "제대로 대답 안 하면 죽는다. 바른말 하라"며 밤새도록 목도로 두들겨 패기도 했다.

고문이 끝난 뒤에는 다시 취조실로 끌려가 시게미쓰로부터 "운동의 주모자를 대라"는 요구를 받았고, 이에 불응하면 다시 물고문을 받는 고난이 한달이상 계속됐다.

김씨는 같은 해 12월 27일 군법회의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경북 김천 소년형무소에 복역하던 중 해방이 되면서 풀려났다. 김씨는 광복후 동료 차익환씨와 함께 몇 달 동안 부산 등지에서 시게미쓰를 찾기도 했다.

***조문기 선생 "헌병 오장의 죄악상, 아주 소름끼쳐"**

독립운동가로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조문기 선생도 17일 저녁 CBS라디오 '시사자키'와의 인터뷰에서 "일제강점기때 군과 경찰은 달랐다"며 부친의 친일행각을 감싼 신기남 열린우리당 당의장의 주장에 대해 일갈을 가했다.

조 선생은 '헌병 오장이 당시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했냐'는 질문에 대해 "지금 오장이면 장교도 아니고 중간 위치에 있는 하사관으로, 그것이 무엇이 대단하냐 하겠지만 그것은 그 시대를 모르니까 하는 이야기"라며 "알고 보면 끔찍스럽다. 한국 사람으로서 일본군 헌병 오장이었다고 하면 그 사람들의 죄악상이라는 것이 아주 소름끼친다. 아주 눈에 불을 켜고 출세하려고 충성을 있는대로, 가장 열렬하게 충성하던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었다"고 증언했다.

조 선생은 이어 '그 시절 헌병의 위상이 경찰과 비교해서 어땠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헌병이) 더 힘이 있었다. 더 강력했고, 헌병이 최고의 권력기관이고, 그 밑에 있는 권력기관이 일반 사법부였다. 내가 직접 오장 헌병에게 붙잡혀가서 고문을 당하거나 그런 것은 없었지만, 그 사람들이 제일 악랄했었고, 정신적으로 가장 철저하게 친일하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금 하사관쯤으로 생각하면 큰 일이다.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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