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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번영화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그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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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번영화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그 '무엇'

'오동진의 영화 갤러리' <15> 53회 호주 멜번국제영화제 취재기

***세계영화계의 변화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무엇'
-제53회 호주 멜번국제영화제 취재기**

세계영화계는 지금 노력중이다. 할리우드의 패권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자본의 종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모두들 뒤늦게나마 문화적 정체성을 찾아 나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새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세계영화제를 다녀 보면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과 고민은 거의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서로들 자국의 시장점유율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동시에 자국만의 영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노력이 있는 한 시장점유율이 높든 낮든, 한해 평균 만들어지는 자국 영화편수가 몇편이 되든,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전을 갖고 활동하는 영화작가, 영화인들이 있다면 그 나라의 영화문화에는 미래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지난 7월25일부터 8월9일까지 2주여에 걸쳐 진행된 호주 멜번영화제는 세계영화문화의 그 같은 새로운 전망을 담아내고 있는 행사였다. 올 영화제는 특히 非할리우드 영화권, 특히 미국이 일으킨 추악한 전쟁으로 절멸위기를 맞고 있는 중동지역의 리얼리즘 영화들과 아시아권 영화들에 자신의 문호를 대폭 개방했다. 호주 자국 영화문화의 뛰어난 저력을 과시하는 작품들도 상당수 만날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호주 멜번국제영화제 취재기를 정리한다.(이 글은 MSN 영화칼럼에 실은 40매 분량의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영화제요?"**

멜번영화제 취재를 다녀온다고 했을 때 막 <시실리2Km>의 개봉을 준비중이던 제작자 김형준은 자신이 만든 영화를 보지도 않고 떠난다며 “그게 그렇게 중요한 영화제요?”라고 힐난아닌 힐난을 했다. "아니, 뭐 꼭 중요한 영화제만 취재를 해야 하느냐, 지금까지 한국에 멜번영화제가 소개된 적이 없는 만큼 남들이 안하는 거 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거 아니냐"고 변명을 해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왜 변명을 하려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건 솔직하게 말해 나 역시 처음엔 멜번영화제가 그리 크지도,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는 얘기일 수 있다.

마치 아부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그 생각은 멜번영화제를 취재하는 동안 180도 바뀌게 됐다. 멜번영화제는 앞으로 특히 아시아권 영화계에 있어 매우 중요한 국제영화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멜번영화제는, 올해가 53회라는 비교적 긴 연혁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계 영화권에서 결코 ‘빅 샷’축에 들지는 못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 이 사람들은 굳이 그러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4년전부터 이 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영화제 집행위원장 제임스 휴잇슨의 말을 빌더라도 멜번영화제가 추구하는 진정한 목적은 세계 영화계 내에서의 권력서열 상승이 아니라 '다른 문화권과의 소통과 대화'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건 제대로 길을 찾아도 아주 제대로 찾은 셈이다.

영화제 기간중 어느날인가 휴잇슨과 박찬욱 그리고 몇몇 친구들과 새벽 2시를 넘겨서면서까지 맥주 혹은 보드카를 마시면서 나눈 솔직한 대화 가운데는 예컨대, 칸영화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조직위원장 질 자콥에 대한 촌철살인의 평가도 있었다. 휴잇슨은 질 자콥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가 지금까지 저지른 가장 최악의 실수는 은퇴를 염두에 두고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해 좌중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우리 영화계가 그동안 얼마나 질 자콥에 매달려 왔는가. 살짝 낯이 붉혀졌다.

***"어디를 가도 지식인들은 비관적이다"**

역사는 때로 한명의 선각자가 만들어 나간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멜번영화제는 제임스 휴잇슨이라는 비교적 젊고 유능하며, 유쾌한 데다 떠벌리기 좋아하는, 진보적이며 솔직한 집행위원장에 의해 새롭게 변해가고 있다고 해도 절대 지나친 말이 아니다. 호주 영화산업과 영화문화, 아시아권 영화와 특히 한국영화를 두고 제임스 휴잇슨과 나눈 대화 가운데는 인상적인 것이 참 많았다. 그는 자국 영화산업의 비전에 대해 꽤나 비관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매우 활기가 넘치기도 해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어쩌면 그 모순 자체가 지금의 호주영화계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비관적인 전망을 애기할 때마다 미스터 오에게는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 안된다며 양손으로 앞에 앉아있는 내 귀를 틀어막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박찬욱은 이렇게 그를 달랬다.

“그럴 필요없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계 어디를 가든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문화, 자신들의 국가적 비전에 대해 비관적이다. 일본에 가면 일본감독들은 자기네 영화가 이제 끝났다고 말한다. 프랑스에 가면 프랑스 영화인들은 한국의 영화계가 부럽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 와보라. 오동진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한국영화계가 지금 상업영화들이 지나치게 범람해서 큰일났다고 요란을 떤다. 지식인들은 태생이 그런 것이다. 그들은, 모두는 아니어도, 대개는 비관론자다.”

우리 모두는 박찬욱의 이말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휴잇슨 위원장의 엄살 – 호주영화의 자국시장점유율이 4~8%에 불과하고 한해 평균 만들어지는 장편극영화의 수가 불과 20편을 왔다갔다하며 무엇보다 젊은 영화관객이 모두 할리우드 영화에만 몰려 가면서 호주영화라면 싸구려 영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 에도 불구하고 호주영화계, 그리고 멜번영화제는 요즘들어 특히 의미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 같은 모습은 요즘 이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호주産 영화들을 보면 알 수가 있다. 편수가 많든 적든, 점유율이 높든 낮든, 호주영화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어려운 항해를 드디어 시작했기 때문이다.

***<화씨 911>보다 충격적인 <앤썸>**

예를 들어 이번 멜번영화제에서 만난 호주산 다큐멘터리 <앤썸, Anthem>은 약간 과장하면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보다 정서적 충격이 더 강한, 우리가 과연 지금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반성케 해준 작품이었다. 영어가 워낙 짧은 관계로 디테일한 얘기들을 100% 캐치해 내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은 현재 호주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난민법' 문제를 다루고 있다.

호주는 현재 존 하워드 총리가 이끄는 보수 정권하에 있으며, 필립 러독 이민성 장관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로부터 정치적 박해를 피해 들어온 난민들을 가차없이 추방하고 있다. 호주 정부의 강경한 난민정책으로 보트 피플, 특히 그중에 있던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태까지 빚어지곤 했다. 영화 <앤썸>은 바로 그 난민법의 비인도적 행태를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며 무엇이 진정한 애국이고 무엇이 올바른 국가관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문제와 나 자신의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변증법적으로 서로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래서 모든 것이 얽히고 설켜 있는 문제임을 역설해 낸다.

이라크 전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호주와 같은 각 나라에서 벌어지는 내부의 모순을 뚫고 나가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다큐멘터리 <앤썸>을 보고있으면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보는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앤썸>은 호주영화가 지금 변화의 와중에서 극심한 자기 고통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Need to know?'**

올해 멜번국제영화제의 주제는 ‘Need to know?’. 영화제 포스터야말로 예상을 깨는 수준이었는데 호주원주민(애보리지널, Aboriginal)으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역시 원주민으로 보이는 여자를 살짝 포옹하고 있는 사진이다. 남자는 호주 최고의 무용단이라 불리는 방가라 무용단의 무용수로 알려졌다. 한때 극렬한 백호주의를 표방했고 특히 여전히 상당히 보수적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멜번에서 앵글로색슨이 아닌, 애보리지널을 모델로 내세운 포스터는 이방인인 내게 매우 이색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멜번영화제 더 나아가 호주는 지금 그동안의 껍질을 벗고 나 아닌 다른 사람, 나 아닌 다른 민족, 다른 종교의 사람, 다른 피부색깔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Need to know?”라고.

그 같은 노력을 반영하듯 호주에서는 최근 2~3년 사이에 좋은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2년 전에 만들어진 필립 노이스의 <토끼 울타리, Rabbit proof fense>같은 작품도 호주에서 최대로 화제를 모아 지난 해에는 국내에서도 개봉이 됐으나 단 이틀 상영되고 종영되는 불운을 맞았다. 문화도 일종의 습관이라고, 호주영화가 국내 시장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기까지는 그만큼 호주영화에 익숙해질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작품들이 소개되야 할 것이다. 시간이 걸린다는 얘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토끼 울타리>가 거의 단관개봉 수준으로 단 이틀 상영됐다는 얘기는 호주에 가서, 호주인들 앞에서는 차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설혹 주한호주대사관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외교문제까지 발생할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미 대사관에서는 그런 점들을 너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 영화사업자들의 천박한 상업논리에 대해 진작부터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멜번영화제에서의 짧은 체류기간동안 영화와 관계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내게 아주 중요한 경험이자 자산이 됐다. 집행위원장 제임스 휴잇슨을 비롯해서 호주 최고의 평론가라는 데이빗 스트레튼(그런데 이 사람, 호주영화가 방향감각을 상실한, 그래서 지금 호주영화계는 매우 슬픈 시대에 있다고 얘기했다. 박찬욱의 얘기대로라면, 하여간 지식인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그리고 우리 식으로 말해서 일종의 제작가협회인 SPAAmart의 던칸 톰슨 회장, 영화제 홍보를 맡고 있는 루이즈 헤셀타인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취재진을 따라 다니며 에스코트해 준 호주 관광청의 샤롯 로즈에게 숱한 도움을 준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고 싶다.

제임스 휴잇슨 집행위원장은 멜번영화제가 궁극적으로 호주 안에 있는 사람들과 호주 밖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으면 싶다고 말했다.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 휴잇슨의 바람처럼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든, 말이 통하든 안통하든, 서로를 통하게 하고 이해하게 만들며 같이 울고 같이 웃게 만드는 것 그래서 서로가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영화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올해 멜본영화제는 바로 그점을 실천해 내려고 노력했다. 멜번이 그렇게나 중요한 영화제냐고? 멜번영화제의 이번 주제 ‘need to know?’처럼 영화문화의 정체성 더 나아가 문화적 자주를 지켜나가는 길과 방법에 대해서는 늘 알아야 할 무엇인가가 있는 법이다.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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