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미국, 프랑스 등 선진국의 대학과 학문 체계를 검토하고 한국 대학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정부가 서울대 폐지 방안 등을 공식철회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폐지'를 둘러싼 최근 논쟁의 주요 쟁점과 그 문제점을 짚는 토론이 활발하게 전개돼 눈길을 끌었다.
***"'대학 서열 체제',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로 극복해야"**
범국민교육연대와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는 10일 오후 국회 헌정기념관 강당에서 '주요국의 대학 체제와 한국 대학의 개혁 방안'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독일, 미국, 프랑스, 영국의 대학과 학문 체계의 특징을 점검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대 폐지'를 핵심으로 한 최근 교육계와 민주노동당 등의 대학 개혁 방안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정진상 경상대 사회과학원장은 "'서울대 폐지'가 공론의 장에 올랐지만 언론은 그것의 본래 취지를 전하기보다는 교육 경쟁력을 해칠 것처럼 왜곡하는 데만 열중하고, 서울대학교도 설득력 있는 대안을 내놓기보다는 기득권을 지키는 것에만 주력하고 있다"며 "'서울대 폐지'는 단순히 서울대 학부를 없애자는 주장이 아니라, 현재 한국 교육의 모순을 야기하는 주범이 대학 서열 체제이고 그 정점에 서울대가 서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서울대 폐지'의 본래 취지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정 원장은 "현재 대학 서열 체제는 ▲중등 교육을 황폐화시키고, ▲대학 교육과 학문 경쟁력을 약화시키며, ▲학벌주의를 재생산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사교육비를 확대해 서민 생계를 압박하고, ▲지역 불균형을 재생산하는데도 핵심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정 원장은 이어 '대학 서열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으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방안을 제시했다.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는 서울대학교를 포함한 기존의 국립대학들을 하나의 '통합 네트워크'로 구성하는 방안이다. 이 체제 안에서 서울대학교는 따로 학부생을 모집하지 않는 대신 학부 강의를 전국의 국립대 학생들에게 개방해야 한다.
지역의 국립대학들은 현재의 거점대학을 중심으로 학구별로 통합해 몇 개의 캠퍼스로 조직되고, 학구별 특성화를 유도한다. 법대, 사범대, 경영대, 의대(치대, 한의대, 수의대), 약대 등 전문직을 위한 학부 과정은 폐지되고 전문 대학원으로 대치된다.
정 원장은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는 대학의 공교육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원칙이 전제돼 있다"며 "일정한 수준이 되는 사립대학들을 준국립화시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에 편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대ㆍ비서울대 차별보다 대졸ㆍ고졸 차별이 더 심각해"**
정진상 원장의 안은 지금까지 나온 '서울대 폐지' 논의의 결정판인 데다, 사실상 민주노동당의 정책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정 원장의 발표에 대해서 토론자들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김세균 서울대 교수는 "대학 개혁의 목표는 '공공성 강화'가 기본 방향이 되어야 한다"며 "'서울대 폐지'를 둘러싸고 논의가 전개되면서 마치 최근의 교육 개혁 논의가 '서울대 폐지'에 대한 찬반 구도가 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서울대ㆍ비서울대 차별보다 오히려 대졸ㆍ고졸 차별이 더 심각할 수 있다"며 "교육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 안 하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 원장이 '학벌주의 타파'를 범국민적 운동을 제안했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며, "노동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고졸, 전문대학, 3류대학 출신들에게 이 문제는 그리 절박하지 않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김용일 한국해양대 교수도 "대학 서열 체제와 학벌주의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순환논법에 빠지고 있다"며 "자칫하면 '서울대 폐지' 논의 외에 여러 가지 중요한 교육 개혁의제들이 왜소한 것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사립학교 제도의 개혁'과 같은 교육(행정)의 민주화도 그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또 "현재 학벌은 실체로 존재하며 정 원장이 지적한 대학 서열 체제를 온존ㆍ강화시키는 주범"이라며 "특히 관료 권력, 수구ㆍ보수적 정당과 교원단체 등 지배 학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교육 권력 등에 대한 좀더 세밀하고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토론에 참가한 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계자는 이런 의제가 사회운동으로 전개될 가능성에 큰 의문을 표시했다. 그는 "당장 교사들이 '교사 평가제'나 '구조 조정'과 같은 문제가 아닌 정 원장이 제기한 문제를 얼마나 자기 문제로 인식해서 싸울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프랑스의 대학 제도는 '교육 민주화'의 산물"**
한편 정진상 원장의 발표에 앞서 프랑스, 독일, 미국, 영국의 대학과 학문 체계에 대한 소개와 토론도 이루어졌다.
최근 '무시험 대학 입학제'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프랑스 사례를 발표한 김경근 전북대 교수는 "잘 알려져 있듯이 프랑스는 원칙적으로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바깔로레아에 합격하면 점수에 관계없이, 또 별도의 선발 절차 없이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며 "하지만 이에 대해서 대학의 수준을 '하향 평준화'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프랑스가 엘리트를 양성하는 '그랑 제꼴'과 일반 대학의 2원적 구조로 이뤄졌다는 점도 이런 주장을 지지하는 근거로 말해진다"고 지적했다.
김경근 교수는 이어서 "하지만 이런 프랑스의 2원적 고등교육 구조는 프랑스 역사의 산물로 봐야 한다"며 "개방된 일반 대학이 지속적인 '교육 민주화' 요구의 결과가 반영된 것이라면 폐쇄적인 '그랑 제꼴'은 예부터 중앙집권적 체제였던 프랑스에서 국가 행정을 이끌 간부를 육성하는 취지에서 세워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그랑 제꼴'은 대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해당 분야에서 요구되는 실무를 중심으로 행해지는 전문 교육 기관"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프랑스에서도 이런 '그랑 제꼴'이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국가 엘리트를 육성하는 시스템인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프랑스 대학이 개방에 따른 '교육의 질적 하락' 우려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학사 관리'로 이런 우려를 상당부분 씻어냈다"며 "여러 가지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는 프랑스 과학 기술 연구의 상당 부분이 대학에서 이뤄지고 있고, 현재 세계 인문학을 주도하고 있는 것도 프랑스"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교육을 여전히 소수 엘리트의 특권 정도로 생각하는 우리에게 프랑스인들의 대학에 대한 개방적 인식은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한다"며 "프랑스처럼 '엄격한 학사 관리' 등을 할 수 있다면 특수 교육기관이 없는 한국은 오히려 더 좋은 조건에서 교육에 대한 문호를 개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밖에 이 자리에서는 공교육 중심의 독일 대학 교육, 공립대학의 차별적 평준화 정책을 펴고 있는 미국의 대입 제도 등이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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