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의 조직적인 ‘고구려사 왜곡’에 대응해 한국 국사학계가 정부의 요청으로 중국측 주장의 허구와 문제점을 요약, 이를 비판하고 우리의 대응 자세 등을 분석한 보고서를 제출했던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中, 고대영토 대동강까지, 한민족 확장으로 현 영토형성”**
지난해 <동북공정>등 중국의 역사왜곡이 본격화하자, 고구려 연구재단 상임이사인 최광식 고려대 교수, 고구려 연구재단 연구실장인 임기환 경희대 교수, 여호규 한국외국어대 교수 등 한국고대사 전공 전문가 9명은 교육인적자원부의 요청으로 이 연구에 참여해 <중국의 고구려사 귀속문제 대처 방안>이라는 제목의 연구 보고서를 지난해 12월말 작성, 책자로 발간했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 전문가들은 “중국의 고대 영토는 북한 평양의 대동강까지이고 오늘날의 한중국경은 한민족이 북쪽으로 확장(오히려 중국의 영토를 침탈)하면서 형성된 것”이라는 중국 학계의 시각 등을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학계는 또 단군신화의 고조선까지 중국고대민족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하고 있고 발해 및 고려의 고구려 계승 문제를 부인하고 있다. 또한 단군신화 역시 중국의 한(漢)문화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근거없는 주장을 펴고 있기도 하다.
이에 따라 보고서를 작성한 연구진은 중국의 역사왜곡이 "정부기관이 나서서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 사건보다 더욱 심각한 것"으로 평가하고, 중국의 역사왜곡을 방치할 경우 "고구려사뿐만 아니라 발해사와 고조선사까지 왜곡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역사를 시간적으로 2천년밖에 되지 않으며 공간적으로 한강 이남으로 국한되게 하는 결과가 초래될 것"으로 우려했다.
이 보고서 주요 내용은 올해 3월 출판된 <한국고대사학회>의 “한국고대사연구 33집”(한국고대사학회 편, 서경문화사 펴냄)에 수록돼 있으며, 이 책에는 총 9편의 논문 가운데 주요 논문 7편이 실려 있다. 이 보고서는 중국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 학계 대응방안을 집대성하고 있어 정부가 중국측 주장을 반박할 때 주요 자료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연구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한 전문가는 10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이번 보고서는 교육부의 지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보완 및 보충을 거쳐 3월 한국고대사학회 연구집에 실렸다”며 “정부는 이 보고서를 기본참고자료로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음은 한국고대사연구 33집에 수록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의 실태와 대처방안'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 중국학계의 동북고민족 및 고조선 연구동향**
[중국학계 주장]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 현재 중국사회의 통합과 안정을 이루기 위해. ‘고위금용(古爲今用)’, 즉 현재가 과거를 이해하는 기준이란 관점에서 현대중국의 역사범위를 합리화하는 역사해석을 추진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의 ‘일사양용(一史兩用)’ 입장에서 고구려사를 한국사와 중국사 양쪽에 연결된다고 인정하던 입장을 비판, 고구려사 전체를 중국사로 파악하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 화이관에 입각한 ‘중화와 오랑캐’의 대립적 관점을 수정하고 북방고대종족 및 고조선 역사까지도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 가장 최근의 연구결과는 리더샨(李德山)의 <중국동북고민족발전사>로, 한국학계의 단군조선-고조선-예맥, 부여-고구려-발해로 연결되는 역사계승인식은 비학술적 연구 결과이며 비역사적 연구 결과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동북고민족은 중원내지의 민족구성의 일원으로서 중국민족이며 중국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또 당시 화하족(華夏, 한족)이 동북지역으로 진입, 혈연문화적으로 동이족과 통혼, 교류해 점차 연결됐다고 주장하며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이용해 동북지역 확장을 설명한다. 특히 단군신화를 화하, 한(漢)문화의 영향에 의한 신화라고 주장, 중국문화의 반영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파악하고 있다.
[문제점]
우선 단군관련 사실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곰숭배신앙으로 중국신화와의 상관성은 찾을 수 없다. 또한 한국 일본학계에서는 이미 기자는 실체가 없는 가상적 존재이며 따라서 기자동래설 자체가 허구라는 점은 확인됐다는 점에서 성립될 수 없는 역사적 사상누각이다.
특히 고고학적으로 중국의 청동기문화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지석묘와 비파형동검 문화로 대표되는 이 지역의 독자적 문화내용 관련, 중국학계는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중국 학계는 역사기록에 언급된 일부 지명, 정치체명 등 종족명칭으로 보기 어려운 존재까지 모두 고민족이란 개념으로 포괄하고 있는 문제점이 있다. 또 이 지역이 하나의 동일문화나 역사에 의해 포괄된 지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북고민족이란 표현은 마치 이전부터 이곳이 하나의 동일문화권이나 정치적 통일체가 존재, 이를 단일 개념으로 설정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
***◆ 고구려의 족속기원과 건국과정 **
[중국학계 주장]
고구려의 족원(族源)을 중국 전설상의 인물인 전욱 고양(高揚)족에서 찾아, 고구려가 중국 민족의 후예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기>에 나타난 삼황오제 중 황제의 자손인 전욱 고양(高揚)족 문화에 탄조난생자(呑鳥卵生子) 신화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또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주민 속성과 생활습속, 문화 등은 서로 다른 계통이라고 보아 고구려는 삼국사에 속하지도 한국사에 속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노합하~대릉하 유역의 홍산(紅山) 문화를 고양족의 산물로 설정한 다음 고구려 선인이 이곳에서 연원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문제점]
고구려의 적성총 문화와 홍산 문화는 3천년 가량의 연대 차이가 있는 문화로 이를 직접 연결시키기에는 문제가 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민 집단은 중국에서 이주한 것이 아니라 본래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 농경 생활을 영위하던 예맥족의 일원이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집단은 또 자신들의 본거지를 침략한 한의 군현을 물리치면서 정치적 독자성을 확보하고 국가체계를 완비해 나갔다.
***◆ 고구려와 중국의 조공, 책봉 관계**
[중국학계 주장]
고구려와 중국 중원왕조는 조공과 책봉을 하는 정치적인 예속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는 중국 지방에 할거한 지방정권으로서 현토군의 일개 현후급 국가로 출발한 뒤 현토군과 요동군에 소속된 지방국왕으로 승격한 것으로 파악했다.
고구려 왕이 중원 왕조에 조공을 하고 중원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은 사실을 강조하며 이는 고구려 왕이 중원 정권의 관리로 중원정권을 대신해 고구려 지역 백성을 다스렸다는 뜻이며 고구려는 ‘중국’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 그 관계를 스스로 끊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문제점]
조공과 책봉은 당시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적용된 외교형식이기 때문에 고구려만 이를 근거로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이는 책봉과 조공제도를 중앙정부와 지방관의 내부적 정치질서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며 조공과 책봉은 당시 중국과 고구려 사이에서 나타난 외교적 형식의 하나였을 뿐이다.
고구려는 자신의 세력권 안에 여러 국가나 세력집단을 포용하고 있었으며 독자적 천하관을 갖고 있었다. 만일 중국의 논리대로라면 백제나 신라, 왜 등도 중국 국내의 소수민족정권이 될 뿐이다.
***◆ 고구려 영역과 평양천도 문제**
[중국학계 주장]
오랜 기간 언어를 비롯 각기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살아온 각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사로 포함시키기 위해 중국학계는 ‘중국의 현재 영토 안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로 간주한다’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논리를 개발했다.
이에 따라 현재 중국 영토안에서 발생한 소수민족의 역사를 포함한 모든 역사적 사건은 중화민족의 역사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됐으며 고구려사에도 이 논리가 적용됐다. 고구려는 중국의 동북역사상에서 있었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것이다.
중국학계에서는 본래 고구려사를 단지 동북지역에서 존재했던 고대국가정도로만 인식하고 중국사로 인식하지 않았었다. 이런 견해가 그러나 1980년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 자리잡아가며, 고구려가 기본적으로 중국의 영토안에서 건립된 국가라는 인식에 따라 평양천도 이전의 고구려는 중국 역사로 수정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평양천도이후에도 중국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역사상 귀속문제는 어느 한 시기의 관점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를 검토, 그것이 주로 어떻게 귀속됐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정치적 중심지의 위치문제를 가지고 파악해야 하는데, 영토의 크기나 존속기간 등에서 현 중국 영토의 고구려사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또 위진남북조 시대 중국 왕조와 고구려와의 관계를 설명하며 고구려가 백제와 대동강을 경계로 삼았다고 해서 대동강을 영역으로 보고 있다. 즉 고대중국역사의 남쪽 경계선을 평양의 대동강까지로 잡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평양과 기자조선, 위만조선과의 연관성을 강조, 평양을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후 한대에 설치한 낙랑군의 관할구역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압록강을 경계로 하게 된 것은 명대에 이르러서였으므로 오늘날의 한중국경은 한민족이 북쪽으로 확장(오히려 중국의 영토를 침탈)하면서 형성된 것이라는 시각이다.
[문제점]
중국학계는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도 중국 역사임을 무리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자승자박에 걸린 꼴이 됐다. 즉 이는 중국학계가 고구려사를 파악하는 기본적인 논리인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어긋난다.
이 논리는 현재 영토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역사로 간주한다는 것인데 평양은 지금 북한 영토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중국은 평양도 과거 고대중국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사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피고 있는데 중국학계는 오늘날 고구려사를 해석하는ㄷ데 서로 각기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학계는 자신들의 역사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바탕인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논리적 근거를 스스로 폐기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이는 바로 현재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과거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현 중국영토 안에 존재했던 고구려사를 인식하는 시각마저도 사료의 자의적인 해석과 무리가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 고구려의 대 수.당 70년 전쟁의 인식**
[중국학계 주장]
70년 전쟁의 성격을 국제전이 아닌 내전이라 규정하고 수, 당의 고구려 원정의 당위성을 강변하고 있다. 즉 고구려 정벌은 중구의 고유영토를 회복해 전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이와 관련 중국은 수-당이 강성해지자 고구려 지배자들이 극도의 공황상태에 가까운 불안한 심리상태를 노출했는데 이는 고구려 지배자의 마음속에 반독립적 정권이 비법적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고구려는 중국 영역이지만 신라와 백제는 ‘종번(宗藩)’ 관계에 있었다고 함으로써 고구려/ 백제-신라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 인식 영역의 차별성을 강조하기도 했으며 수-당이 고구려에 대해서는 영토의식, 수복의식, 통일의식이 존재했던 반면, 백제나 신라에 대해서는 종번 관계만 가졌을 뿐 영토의식은 없었다고 파악했다.
[문제점]
중국학자들은 대부분 수.당이 고구려에 보낸 조서를 근거로 양자 관계를 파악, 고구려의 대 수.당 전쟁의 성격을 내전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조서라는 자료가 갖는 수사성을 감안할 때 그 행간의 의미 파악 노력조차 내친 채 행해진 이러한 연구성과는 즉흥적인 정책적 역사인식의 가장 좋은 본보기이다.
아울러 이 조서 및 당시 관련 제 사료에 드러난 수.당의 화이론적 세계 인식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모두 ‘이(夷)’로 파악하고 있는 바, 고구려만 유독 자기 대내 정책의 관철 대상으로, 또 그것과의 전쟁을 내전으로 단정지음은 지나친 연역적 논리 비약이다.
고구려의 대 수.당 전쟁은 관련 제국의 국가 혹은 왕조의 생존, 보존, 발전 전략의 관철이라는 실리주의 원칙 곧 국익 추구에서 비롯된 동아시아 국제전쟁이다. 또한 이 전쟁의 국제전쟁적 성격은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고, 영원한 국익만이 있을 뿐’ 이라는 국제정치적 명제에 따라 자국의 안전과 각자 국익을 추구하고 있었음을 통해서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 고구려 붕괴 후 그 유민 거취 문제**
[중국학계 주장]
고구려 멸망 후 그 주민의 상당수가 중국으로 들어가 한족으로 흡수되었으며 이 점이 바로 중국사의 일부임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문제점]
중국으로 상당수가 편입된 것은 사실이나 고구려 귀속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유민 유입의 많고 적음이나 귀속된 땅의 넓이가 아니라 그들이 자의적으로 자신의 거취를 선택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고, 또다른 하나는 각지로 흩어져 간 고구려 유민들이 가지고 있던 자의식이다.
유민들의 거취 결정시의 자의성 여부를 보면 중국으로 간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의적인 선택이었다. 이는 바로 당보다는 신라에 더 친연성을 느꼈다는 것을 말해주며 이 친연성이란 지리적인 근접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면과 문화적인 측면, 종족적인 측면에서 공유점이 있기 때문이다.
***◆ 발해의 고구려 역사 계승 문제**
[중국학계 주장]
발해를 고구려 계승의 자주국으로 보지 않고 당나라 지방정권의 말갈국으로 간주한다. 역사서인 <신당서>에서는 발해 건국자를 말갈족의 일부로 여기고 건국세력에서도 말갈이 다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국호를 당에서 받았고 발해 왕은 중국과 조공과 책봉관계에 있는 관계였으며 문화적으로도 한자를 사용하며 당 중심 문화를 향유하던 왕조라는 주장이다.
[문제점]
<신당서>와 달리 <구당서>에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고구려 별종이라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조공과 책봉은 왕조와 왕조간 이루어진 국제 외교행위였으며 발해는 연호와 왕이 죽고 난후 부여되는 시호(諡號)도 자주적으로 독자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발해가 한자를 사용한 것은 당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의지일 뿐이며 발해는 종족적으로도 예맥, 부여 계통의 고구려인들이었다. 아울러 문화적으로도 이들은 석실묘와 석곽묘를 사용하던 고구려 지배층의 고분 축조를 하였으며 고구려인들의 온돌도 사용하고 있었다.
***◆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적 계승 관계**
[중국학계 주장]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왕건이 세운 고려는 서로 족속이 달라서 계승관계가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고려는 신라의 고지에서 건국하였지 고구려의 옛땅에서 건국하지 않았으며 두 나라 민족 성분도 달라, 고려 민족성분은 고구려인 위주가 아니며 고려는 신라인, 백제인 ,일부 고구려인, 한인의 후예가 세운 나라라고 한다. 또한 왕씨는 낙랑의 성씨라고 주장한다.
[문제점]
고려가 구고려를 계승한 국가임은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한 데서 명확히 드러난다. 고구려는 왕왕 고려로 불려왔기 때문이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은 북진정책을 추진하고 서경을 중요하게 여긴 국가정책에도 잘 나타난다. 고려는 건국 직후부터 북진정책을 추진했고, 그 목표는 고구려의 고토 회복이었다.
아울러 왕건의 출신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집안 내력을 기록한 역사서 등을 통해 볼 때 왕건의 조상은 신라보다는 고구려 혹은 발해 쪽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를 도와 건국한 주체세력은 한반도 중부지방 출신들이 많으며 이들은 옛 고구려인들의 후손이었고 그들에게는 고구려적인 의식이 남아있었다.
역사 인식의 측면에서 보아도 중국인들은 <후한서> 이래로 고구려를 외국으로 간주 외이 열전에 수록했고 <송사> 등에서는 고려를 고구려 계승 국가로 기술했으며 고려를 방문한 송 나라 관리들도 그렇게 서술했다. 또한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김부식을 비롯한 이규보, 이승휴, 일연 등의 저작 등을 통해 고려인들은 자신의 국가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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