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중립성' 대신 '정치적 올바름' 선택한 무어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 국내 시사회를 보고**
예상과는 달리 <화씨 9/11>에는 9.11 테러사태의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2000년 '고어 vs. 부시'의 플로리다 대선 개표 과정으로 시작되는 이 희대의 다큐멘터리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은 정작 테러의 비극적인 순간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도록 암전으로 처리하고 있다. 대신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에 부딪힐 때 들리는 충돌음,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스크린을 채운다.
스크린이 다시 밝아지면 이번엔 거꾸로 소리가 없어진다. 대신 이번엔 우연하게 이 대형 참사를 목격하게 된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느리게 잡아 나간다. 묵음으로 이어지는 연속 컷들. 흐느끼는 여인들과 두손을 마주잡고 기도를 올리는 두 남녀, 충격에 말을 잃은 노인,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의 표정들. 9.11 테러의 순간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2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사람들의 영혼에 얼마만큼의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지를 마이클 무어는 역설적으로 극명하게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스트들, 보수적인 정치이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마이클 무어는 센셰이셔널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일개 정치선동꾼 정도로 보일 것이다. 일부 진보적인 인사들 혹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마이클 무어하면 입바른 소리를 해대긴 하지만 다소 시끄럽고 요란한, 미디어 노출을 좋아하는 사람쯤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부담스러운 인물이라는 것이다. 특히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스트들 가운데서는 무어의 작품이 다큐멘터리의 기본 정신인 객관성과 중립성, 대상과의 거리 두기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물론 마이클 무어의 작품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작품이 결코 아니다. 마이클 무어 스스로 늘 떠들고 다니듯(그는 실제로 좀 많이 떠드는 경향이 있는데) 그가 요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이유는 단 하나, 부시의 재선을 막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다음 표적은 또, 영국 총리인 블레어라고 할 정도니까. 따라서 정치적 중립성은 애초부터 그의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는 품목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이클 무어는 매우 재간이 넘치는 다큐멘터리스트이자 저널리스트라는 점이다. 다큐멘터리 작가보다는 저널리스트에 더 가깝다는 점이 그의 영화를 특징짓는 요소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비교적 광범위한 주제, 그러니까 마르크스적 계급구조의 문제가 현재의 부시정부하에서 얼마만큼 노골화돼 있으며 미국의 대 이라크전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이 극단적인 부르주아 정권이 자신들의 계급적인 이익을 확장하려는 야욕에 지나지 않음을 추적하고 있다.
더 나아가 미국과 이라크의 피억압 계층, 곧 '없는 자'들이 이 '있는 자'들을 위한 전쟁에서 단순한 총알받이로 희생되고 있음을 증명해 내려고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저널리스트로서 종횡무진 현장을 누비고 다닌다.
저널리스트로서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주장이 100% 확실한 증거와 데이터에 의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 주장이 주류사회의 변방에서 메아리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그래서 보다 명료한 정치적 힘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사실들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 무어의 힘은 바로 그 지점에서 나온다. 그가 제시하는 수많은 백 데이터(back data)는 그럴 수 있을 지 없을 지는 모르지만, 또 설령 결과적으로 그럴 수 없을지언정 세상을 구해내기를 열망하는 한 저널리스트의 피나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의 다큐멘터리가 요란한 말의 성찬과 현란한 취재과정, 시니컬한 나레이션으로 점철됨에도 불구하고 기묘하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적시는 이유, 끝끝내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유는 저널리스트가 지녀야 할 진정성, 진실에 대한 올곧은 태도를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의 다큐멘터리는 이상한 형식의 감동의 연대기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뛰어 다니고 또 뛰어다니고 또 뛰어다니는 열정을 숨김없이 나타낸다. 9.11 테러가 일어나는 순간 지방의 한 초등학교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무능력한 부시의 표정을 잡아 내는가 하면 어느 순간에는 부시 가문과 오사마 빈 라덴 가문과의 사업적 관계를 추적하다가 전쟁의 현장에서 몸이 찢겨져 나가는 이라크 아이들과 미군 병사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이번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통곡과 절규 역시 빼놓지 않고 있으며 부통령 딕 체니가 CEO로 재직했던 군산복합체 핼리 버튼의 사업설명회를 교차편집하면서 이번 전쟁이 궁극적으로 지금의 미국 행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무기장사와 석유장사들의 돈놀이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악동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해 내는데 의사당 앞 거리에서 상원의원들을 졸졸 좇아 다니며 당신들의 아들부터 입대시켜서 이라크 전쟁으로 내보내는데 서명하라고 졸라댄다.
마이클 무어의 마지막 나레이션은 늘 뚱한 표정으로 돌아 다니는 이 배불뚝이 작가가 세상에 대해 얼마만큼의 뛰어난 지적 인식을 지니고 있는지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나레이션을 통해 마이클 무어는 이렇게 얘기한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썼다. 가상이든 현실이든 전쟁이란 것에 승리는 없다. 전쟁은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계급사회의 기반은 빈곤과 무관심이다. 전쟁의 명분은 달라도 목적은 언제나 같다. 그 목적이란 외국과 싸워 승리하는 게 아니라 한 사회의 지배자가 피지배자에 대해 계속 지배계급으로 남기 위하여 사회의 빈곤을 유지하는 것이다."
항간의 오해처럼 마이클 무어의 세계적 화제작 <화씨 9/11>은 미국을 반대하고 부시를 반대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보다는 있는 자들의 거짓과 위선, 폭력에 반대함으로써 진실을 알리려는 다큐멘터리다. 무어는 이를 위해 다큐멘터리가 지녀야 할 '정치적 중립성'을 포기하는 대신 '정치적 올바름'을 선택했다.
그래도 어쨌든 다큐멘터리라면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그건 정말 웃기는 다큐멘터리계의 신화이자 도그마에 불과한 이야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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