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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 선거법과 비례전문당 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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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 선거법과 비례전문당 꼼수

[최창렬 칼럼] 극단 정치가 불러온 기형적 선거제도

미국 정치에서 상대를 경쟁자가 아닌 적으로 인식하는 적대의 정치가 사라진 지는 건국 후 100년 쯤 지난 뒤였다. 미국에서 연방주의자와 공화주의자는 상대를 파트너를 인정하지 않았고, 타협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정당 간 적대와 불신은 상대 진영을 정치에서 영원히 밀어낼 정도로 깊었다. 미국 정치의 이러한 분위기가 사라지는 데도 시간은 꽤 많이 걸렸다.

독립전쟁 이후 상대를 적으로 인식하는 풍토가 바뀌었으나 노예제를 둘러 싼 남과 북의 전쟁은 다시 정치를 살벌한 광야의 쟁투로 변화시켰다. 남북전쟁 세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면서 관용과 협의의 정치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국 정치의 극단적 대치 문화는 언제 협치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선거법 협상이 마무리 됐지만 지난 4월부터 이어진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대립과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갈등과 적대를 타협과 조정이 가능한 공적 의제로 전환시켜 공론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정치가 여야 사이의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일관한다면 정치는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한다.

선거법 개정안의 내용과 협상 과정은 한국 정치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극단적이며, 통제를 상실한 영역인가를 여과 없이 보여줬다. 연말 패스트트랙 법안들이 통과되는 절차 역시 정치 부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진영 정치와 극단 정치의 반영이며 한국 정치의 작동 방식이기도 하다.

2019년 한 해는 어느 해보다도 정치가 무너지고 시민 진영의 정치 양극화가 절정에 달한 해이기도 하다. 내년에 이러한 정치는 바뀔 수 있을까. 선거가 어떠한 의석 구도와 결과를 도출해 낼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무늬뿐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지금의 정당 지지율과 의석 기준으로 시뮬레이션 하는 일은 공허하고 부질없다. 유권자들의 집단지성의 선택은 항상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아직도 정치권이 민심을 조작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것으로 착각하는 19세기적 사고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선거법 개정 과정이기도 하다.

선거법 개정에 반대한다며 한국당은 필리버스터를 실시했고, 이에 민주당도 가담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등 검찰개혁 법안들에 대해서도 무제한 토론이라는 필리버스터가 재연될 전망이다. 본회의장 의석은 텅 비어 있었으며, 민주당과 한국당 어느 의원도 자신들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고, 국민에 대한 송구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해 연동형 비례제에 합의한 이후 무관심과 반대로 일관하던 한국당이 내놓은 안은 비례제 폐지였다. 연동형제를 도입하고자 하는 취지와 기본적으로 상충한다. 이제 '비례전문당'을 만들겠다고 한다. 한국당의 반의회주의적이고 반정치주의의 끝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한국당에 더 많은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이다. 그러나 민주당과 소수 야당들이 비판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한 치의 접점도 없는 정당들의 극한의 대결주의와 시민과 유리된 정치를 정상화시키기 위하여 시동을 걸었던 '연동형 비례대표제도'는 거대 정당들의 밥그릇 챙기기로 결론났다. 그나마 비례대표 후보자 30명에게 50%의 연동율을 적용해서 조금이나마 '민심 그대로'의 제도에 접근할 단초를 열었다고 애써 합리화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에 앞서 거대 정당들이 반성할 일이다.

한국당이 '비례전문당'을 만든다고 기정사실화 시키고 있지만 여론과 민심은 아랑곳없는 반헌법적 행태란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정당은 그 목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헌법 조항에 위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심의 흐름을 살피고 이에 부응하여 표를 얻겠다는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정치적 술수와 공작적 정치공학이 유권자에게 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시대착오가 지금의 정치를 결과했다. 이는 합리와 이성을 벗어난 무리한 구호로 세상과 소통하는 '태극기 세력'에 기대는 보수를 가장한 수구 세력과 민주화 성취의 성과에 도취하여 기득권화하고 있는 낡은 진보 진영의 극한 대결의 결과이기도 하다.

협상과 타협으로 공약수를 찾는 작업이 정치다. 그러나 갈등이 모든 쟁점 국면에서 극한으로 치달을 때 이는 '정치'에서 '전쟁'으로 치환된다. 한국 정치의 모습이다. 극단적 대치는 적대적 거대 양당제에 기인하든, 분단에 따른 색깔론과 산업화·민주화 과정에서 쌓인 이념적 양극화가 원인이든 현상으로서 엄존한다.

관용과 타협의 정치가 도래하는 데 한국도 미국처럼 1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미래의 '반정치'는 오롯이 국민이 짊어져야 할 짐이다. 지금의 정당체제에서 정당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면 이는 무의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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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다양한 방송 활동과 신문 칼럼을 통해 한국 정치를 날카롭게 비판해왔습니다. 한국 정치의 이론과 현실을 두루 섭렵한 검증된 시사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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