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국내 영화계에 빙하기가 닥친다
---<투모로우>에서 <해리 포터>까지 할리우드 국내 여름시장 석권할 듯**
수일만에 지구의 북반부에 빙하기가 닥치고 인류의 절반 가까이가 목숨을 잃는다는 내용의 재난영화 <투모로우>에서, 기상학자 잭 홀 박사는 뉴욕에서 얼어 죽을 위기에 처한 아들을 향해 전화선 너머로 이렇게 얘기한다. 눈물을 글썽이며, 절박한 목소리로, 그것도 두번이나 반복해서. "I'll come for you, I'll come for you." 아들은 그가 도착하기 전에 죽을 지도 모른다. 잭 홀 역시 죽을지도 모른다. 뉴욕은 이미 빙하기로 접어들기 시작했으며 잭 홀이 있는 곳은 뉴욕보다는 조금 나은 워싱턴 D.C다. 하지만 잭 홀은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뚫고, 빙하를 뚫고 뉴욕으로 향한다.
<투모로우>가 인기를 모으는 이유는 1억8천만달러의 돈과 2년의 시간을 들였다는 기막히게 정교한 CG기술때문만이 아니다. 지구의 종말에 대한 위기감을 다시 한번 불러 일으킨 할리우드적 상상력때문만도 아니다. <투모로우>가 진정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유는 아버지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들을 구하러 떠난다는 바로 그 신파 영웅주의의 정서때문이다. 늘 그렇지만 부성애 혹은 모성애를 다루는 얘기치고 홀대당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투모로우>의 인기는 관객에 앞서 일단 언론과 허울좋은 지식인 사회에서 화제를 모으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이 영화의 배급사인 20세기 폭스사는 마케팅의 최초 공략 대상으로 세계 주요 언론매체를 겨냥했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주요 텔레비전 뉴스는 프라임 타임대까지 내주면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하긴 그도 그럴만 했다. 6월5일이 환경의 날이었던 데다 <투모로우>가 다루는 얘기가 바로 심각해질 대로 심각해져 있는 지구 온난화 문제이고 더 나아가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차원에서 만들어진 교토의정서가 미국 부시정부의 일방적 조처로 파기됐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미국 주도의 환경문제가 결국 전 지구에 재앙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예단 아닌 예단을 던져주고 있는 셈이다. 부시 정부의 출현은 어쩌면 세상의 멸망을 예언한 요한계시록의 '세븐 사인(Seven's Sign)'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기자들의 입맛에 이보다 더 맛있는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일에 있었던 <투모로우>의 특별시사회에서 곽결호 환경부장관의 축사는 다소 오버했다는 인상이다. 곽 장관은 "피라미드 판매방식을 동원해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투모로우>를 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뒤이어 인사말을 한 20세기 폭스사의 이주성 사장조차 곽결호 장관의 말에 대해 "흥행에서도 성공하라는 말씀으로 알고 너무 감사하다"고 답했을 정도다.
<고질라>와 <인디펜던트 데이> 따위를 만들어 왔던 '무뇌아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가 정신을 차리고 마치 자신이 마이클 무어인 양 현 미국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작품을 만들었다는 게 더 주목할 부분이다. 물론 이것 역시 오히려 할리우드가 만들어 낸 극단적 상업주의가 빚은 결과라는 비판도 있다.
"할리우드는 늘 세계시장에서 무엇이 먹히는지, 어떤 얘기가 돈이 되는지를 간파해 낸다. 할리우드의 요즘 상품은 아이러니하게도 반미주의다. 따라서 <투모로우>가 보여주는 반미는 진정한 반미 혹은 반부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국내 메이저 스튜디오인 시네마서비스에서 오랫동안 국제업무를 맡아왔던 문혜주 이사의 말이 오히려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이 얘기가 맞는다면 국내 언론은 현재 할리우드 메이저의 마케팅 전략에 놀아나고 있는 꼴이 된다.
돌이켜 보면 근데 그건 20세기 폭스 탓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더 큰 문제다. 매년 여름철마다 국내 극장가는 할리우드 메이저의 블록버스터 작품들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춰 왔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다. 춤을 추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대안과 해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난 1,2년동안 한국영화는 그 해법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선보여 왔다. 지난 한해만 해도 <살인의 추억>으로 시작해 <장화, 홍련> <4인용 식탁> <싱글즈>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성공적인 수작을 통해 여름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맞서는 데 성공했다. 수치면에서도 앞질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40%를 약간 상회하는 시장점유율을 기록했을 때 한국 여름영화는 50% 안팎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올 여름은 사뭇 그 양상이 달라 보인다. <트로이>가 점화시키고 <투모로우>로 크게 번지고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흥행 불꽃은 올 여름 한국 극장가를 완전히 석권할 것으로 예상된다. 컬럼비아 픽쳐스의 <스파이더 맨2>가 뒤이어 기다리고 있고 워너 브라더스의 <해리 포터, 아즈카반의 죄수>가 있으며 다시 폭스의 <아이 로봇> 등이 뒤따라갈 예정이다.
반면에 국내 영화는 여름철 접경부터 죽을 쑤고 있다. 비교적 수작임에도 불구하고 일반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한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을 비롯해 중반기 한국영화 흥행을 견인할 곽재용 감독의 <내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는 현재 온 라인상에서 네티즌들로부터 융단 폭격을 받고 있고 메이저 진입을 시도하고 있는 롯데시네마의 야심작 <나두야 간다>는 평단으로부터 짜증섞인 반응만을 얻고 있을 뿐이다. 2004년의 한국영화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천만 관객 흥행이라는 다소 비정상적인 고공행진을 반짝 선보였을 뿐 안이한 기획에다 지나치게 상업적인 계산만을 앞세우는 바람에 관객들의 외면을 받게 되는 상황을 자초하고 있다. 한국영화가 요즘 정말 잘나가고 있다는 얘기는 그래서, 더 이상은 해선 안될 미사여구다. 그건 정말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영화라고 하는 것이 한편 한편을 만들 때 얼마나 신중하고 또 진지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가는 작금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입증시키고 있다. 한국영화는 1년만에 여름시장을 할리우드에 내줄 처지에 놓이게 됐다. 시장만 내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큰 영화는 큰 영화대로 실패하고 작은 영화, 비상업 영화, 독립영화, 예술영화는 그것들대로 더 이상 숨쉴 공간을 확보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이건 공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는 개봉 첫날 전국 12만의 관객을 모았다. <투모로우>는 전국 9만을 모았다. 첫날 수치만으로 여전히 한국영화가 강세라고 얘기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개봉 1주가 지나면서 두 영화의 흥행은 역전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역설적이긴 해도 한국영화는 올 여름 시장에서 단단히 쓴 맛을 봐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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