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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기업을 만들어달라"

[화제의 신간] 정문술의 '아름다운 경영'

'벤처업계 대부'로 불리는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이 지난 2001년 1월 63세의 한창 나이에 돌연 회사를 직원들에게 물려주며 은퇴를 선언하자 한때 진의를 두고 재계에서는 온갖 억측이 나돌았다. 잘 나가는 회사를 자식한테 물려주는 것도 아니고 본인의 사정상 일선에 있기 어려운 건강상 등의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간의 억측은 곧 사그라들었다. 정 회장은 그후 일관되게 '무소유의 경영'이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창 때 단행한 은퇴에 담긴 철학**

기업인으로서 그의 이력은 더없이 화려했다. 83년 반도체 제조장비업체 '미래산업' 창업, 세계 최초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 개발 실패로 도산 위기 직면, 반도체검사장비 '테스트 핸들러' 국산화 성공으로 재기, 99년 전자제품 제조 기초장비 'SMD 마운터' 개발 성공, 2000년 국내 기업 최초의 미 나스닥 상장 등등.

그러나 그는 단순한 기업인을 넘어 '한국적 기업문화'를 개발하고 실천한 '경영철학자'로서 더 높이 평가받고 있다. 직원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면서도 그는 '착한 기업을 만들어 달라'는 범상치 않은 말을 남겼다.

또 은퇴 후에도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은 '바이오,전자,기계의 융합 기술'에 달렸다는 판단에 따라 이에 부응하는 학과를 신설해 달라며 한국과학기술대학원(KAIST)에 3백억원의 사재를 기부하는 등 사회환원의 모범을 보이고 국민은행 이사회 의장으로서 '투명경영' 지킴이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그것도 부족한지 그는 미래산업을 통해 실천으로 보여준 자신의 경영철학을 갖가지 일화를 곁들여 전해주는 자서전 <정문술의 아름다운 경영>(키와채 간)을 냈다. "아직 명예욕만큼은 버리지 못한 것 같다"면서 계면쩍어하는 그는 "크게 된 놈으로서 떠드는 게 아니라 크게 될 사람들을 위해 떠들고 싶어서"라며 자서전을 내게 된 동기를 밝혔다.

***'정문술 경영기업'의 하이라이트 '무소유 경영'**

정문술만이 생각해내고 실천할 수 있는 경영철학이 아니라면 그가 소개하는 일화들은 최소한 '크게 될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지침이 될 것 같다.

그가 말하는 '크게 될 사람'은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 앞으로 밑지고 뒤로 남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다. 이에 따라 그의 경영기법은 웬만한 기업인들이 볼 때 '거꾸로 가는 경영'으로 비치는 4가지로 정리된다. 친인척을 경영진에서 배제하고, 종업원과 동업적 관계를 구축하며, 자율을 부여하는 동시에, 윤리경영을 하라는 것 등이다.

그러나 그의 경영기법의 진수는 "때가 되면 물러난다"는 '무소유 경영'이다. 그는 "애달캐달 모은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준다고 해서 비난받는다는 건 부당하다"면서도 "문제는 자기 재산이 아닌 것을 자식들에게 나눠주려는 데 있다"고 일갈한다. 주식회사는 사장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다는 것이다. 하물며 2세에게 경영권을 넘길 권리가 창업자에게 없다는 것이다.

교회까지 세습하려는 목회자까지 나오는 판에 그의 이같은 철학과 실천행위는 '벤처 대부'에서 '벤처 현자'라는 칭송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내가 미래산업의 경영권을 종업원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하는 행위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인데 주변은 오히려 소란하다"고 불편해 한다. 그는 "모두들 나의 결정이 비상식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은 아닌가"라면서 "우리 사회에 그만큼 비상식이 보편화되어 있다는 세태의 반증이 아닐까"라고 의아해 한다.

은퇴 얼마후 사석에서 모 대기업 간부와 나눈 대화는 세습에 골몰하는 기업인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정사장님, 요즘 칭송들이 대단합니다. 큰 모범을 보이셨어요."
"순리대로 행동한 겁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래, 자제분들이 섭섭해 하지 않던가요?"
"제 것 아닌 걸 얻지 못했다고 섭섭해 한다면 자식이 아니라 도둑놈들이지요."

"원 말씀도 과격하게 하십니다. 자식들이 똑똑하다면야 그것도 괜찮은 일 아닙니까?"
"똑똑하다는 판단은 도대체 누가 합니까?"

"보고 자란 게 있을 테니 리더십이 아무래도 남들보단 낫겠지요. 어려서부터 차근차근 경영훈련을 시키는 경우도 있고..."
"자질이 그렇게 뛰어나다면 아비가 신경쓰지 않아도 어디서든지 좋은 리더가 되겠지요."

"로열 패밀리라는 낙인 때문에 기회를 박탈하는 것도 역차별 아닙니까."
"공정한 경쟁에는 아무도 욕하지 않습니다. 주주나 직원들을 바보 취급하니까 문제지요."

***아이들이 끊어준 '마지막 미련'**

그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재를 물려준다는 데 누가 뭐랄 것인가"라면서도 특히 '경영권'으로 관계사들의 자산까지 이리저리 돌려 사재로 만들고 상속까지 하는 기업인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그가 한창 나이에 은퇴를 하면서 인간적인 고뇌가 없었다면 감동이 덜 할 것이다. 그는 "경영권이란 아비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일 수도 있었다"면서 "그야말로 부와 명예와 권력이 한꺼번에 갖춰진 최고의 종합선물 아닌가"라고 말한다.

그는 "어려웠던 집안 사정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일찍부터 제 몫을 스스로 감당해 왔던 아이들, 그 어려웠던 시절을 씩씩하게 버텨 준 끔찍하고 애틋한 내 새끼들"이라며 자식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세계 최초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 개발에 도전했다가 실패해 도산 위기에 몰렸을 때는 가족동반 자살을 결심하고 결행직전까지 갔던 때를 생각하면 '종합선물'로도 아쉬울 판이었다.

그는 은퇴 발표 직전 두 아들을 음식점으로 불렀다. 그는 "어쩌면 나는 아이들로 인해서 약해지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면서 "번복할 용기를 얻기 위해서 아이들을 불러냈던 것인지 모른다"면서 '마직막 유혹'과의 힘겨운 싸움을 털어놓았다.

그는 그 싸움에서 이기게 도와준 것은 아이들이었다고 자랑한다. 그는 그 순간의 대화를 이렇게 전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회사를 잘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래산업은 아쉽게도 내 것이 아니다. 사사로이 물려줄 수가 없구나"
아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그랬던가 싶었다.
"애비가 너희를 위해 해놓은 게 너무 없구나. 미안하다."
잠깐의 침묵 뒤에 큰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결정 잘하셨습니다."
거의 동시에 둘째가 받았다.
"아버님, 훌륭하십니다."
"아버님께서는 저희에게 정신적인 유산을 남겨주셨습니다. 저희는 언제까지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뜨겁게 덥힌 청주를 거푸 석잔이나 들이켰다. 낮술에 취해 아이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나는 양손으로 아이들의 등을 힘차게 다독였다.
"나야말로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고맙다."

***정신분석학 교수의 조언, "시간이 지날 수록 은퇴 결행 힘들 것"**

그는 은퇴 시기를 2,3년 미룰 생각도 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을 전공한 모 대학 명예교수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제가 꼭 해놓고 가야 할 일이 아직 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삼년 정도 더해야 하나 어쩌나, 이래저래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정 사장님의 은퇴는 지금이나 2,3년 후에나 그 의미가 똑같을 것 같네요. 효과는 똑같겠지만 후자는 아마도 결행이 더욱 힘들겠지요."

2001년 1월3일 시무식 날 그는 "음식은 상한 다음에 남 주는 게 아니랍디다"라면서 법인카드 한 장을 반납하는 걸로 간단히 퇴임절차를 마쳤다. 사실 2년동안 부사장들을 중심으로 회사가 돌아가도록 '은퇴' 준비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은퇴준비'는 창업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의 경영철학 자체가 최고 경영자라든가 전문경영인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직원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그 놀이터를 지켜주고, 그들이 방해받지 않도록 외풍을 막아주고, 심부름이나 해주는 게 내 역할이라 여겼다"면서 "그게 소위 '관리직'의 고유업무라 여겼다"고 말한다.

은퇴 후 그는 '세습'이라는 '상식'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여전히 그가 '미래산업의 오너'이며 '수렴청정'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완고한 인식이 세간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도 온갖 인사청탁이 들어오고 관계가 불편해지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는 하소연이다.

***기부도 '벤처식'으로**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그는 또다른 벤처사업에 몰두했다. 그것은 '사회환원'을 위한 벤처사업이었다. "죽음이 목전에 닥쳐서야 떨리는 손으로 뭉칫돈을 내놓은 일은 정말 하기 싫다"는 그에게 '돈 쓸 궁리'도 벤처정신이 필요한 '사업'이었다.

"많지 않는 내 재산의 사회환원도 열정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무엇보다 '한창 때'하고 싶었다"는 그는 바이오테크 분야의 고급 인재를 키우는 사업에 3백억원을 기부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재산만 내놓는다고 이 사업이 성공하기는 어렵다는 판단 하에 그는 KAIST와 과학기술부에게 첨단학과 신설과 교수와 시설,기자재 유지관리에 필요한 예산 지원에 대한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 결과 KAIST에서는 '바이오시스템학과'를 신설하는 한편, 그의 기부금을 재원으로 바이오테크 연구동을 신축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으며, 과학기술부 장관은 기획예산처와 관련예산을 협희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사재조차 '내 것이 아니다'**

그는 2003년 KAIST 학사과정 학생들의 진학 희망하과 조사에서 '바이오시스템학과'가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에 "내 '안목'을 공인받았다"는 기쁨과 안도감을 만끽했다.

그러나 그는 기업을 하며 번 '사재'조차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비범함을 보여준다. 2003년 10월30일 KAIST가 '정문술 빌딩'으로 명명한 연구동 준공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고도 불참했다.

"마땅히 돌려줄 것을 돌려 준 곳에 가서 축사하고 꽃다발까지 받을 이유가 내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아이들의 어렸을 때의 일화가 함께 '사회환원'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밝혔다.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어머니의 화장대 앞에 편지를 써두었다고 한다.

"오늘 아침에 아빠 구두 닦은 값 오백 원, 지난달 산수 시험 100점 맞은 값 천 원, 어제 엄마 심부름한 값 오백 원, 합쳐서 이천원 주시기 바람."

이 맹랑한 아들녀석의 책상 위에 어머니는 답장을 쓴다.

"너를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키우며 고통받은 값 무료, 지금까지 너를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켜 준 값 무료, 지난 주에 네가 야구공을 깬 옆집 유리창 변상한 값 무료, 앞으로 독립할 때까지 뒷바라지 해주는 값 무료, 아들아 사랑한다."

아들과 어머니와의 관계는 곧 기업과 사회의 관계와 같다. 기업은 자신이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고, 세금을 냄으로써 사회를 부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업은 늘 사회를 향해 무엇인가를 더 내놓으라고 보채기만 한다. 맹랑하다. 백 개 받은 걸 잊고 한 개 준 값 내놓으란다. 기업에 필요한 인재와, 자본과, 기업행위에 필요한 모든 인프라는 사회가 길러 주고 사회가 조달해 주는 것 아닌가.

이 사회가 지금껏 나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 왔으므로, 떠나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이 보잘것 없는 사람이 기업하게 해주고, 돈을 벌게 해주고,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으므로, 언제가는 보은을 해야겠고, 효도도 해야겠다고 생각해 왔다.

그는 사재를 기부한 이후 손자가 갑자기 던준 화두에 당황한 일화도 소개한다. "할아버지 진짜 아깝지 않으세요?"

그는 순간 당황해 대답을 못했다고 한다. "아깝지 않다"고 하면 아이가 믿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위선자가 되고, "아깝기는 조금 아깝지'라고 하면 아이에게도 자신에게도 만족스럽지 않는 답이었다. 그는 다음 날 아침에 정답을 찾아냈다.

"내 것을 아닌 것을 내놓았다고 아까워하는 건 옳지 않다. 나는 전혀 아깝지가 않구나"

이제 그의 소망은 미래산업이 '착한 기업'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후임자들이 반드시 미래산업의 사세를 더욱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상황과 분수에 자족하며 언제나 정도를 걷는 기업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게 그토록 어려운가. 혹시 아무도 시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렵다고만 생각해 왔던 건 아닌가"라며 후임자들의 그의 소망을 이뤄주길 부탁한다.

***착한 사장 되기**

착하고 정의로운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먼저 그렇게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윗사람'들이 먼저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미래산업에서 일하는 동안 지시사항이나 캠페인을 만들지 않았다.

스스로를 '참아줄만한 사장' '믿을 수 있는 사장'으로 자신을 만들어내는 것이 사장의 주요업무였다는 것이다.

그는 '친인척을 병적으로 멀리한 것도 직원들로 하여금 사장과 회사를 진심으로 믿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믿을 수 있는 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돈 문제에도 철저해야 했다. 그가 사적으로 쓸 수 있는 유일한 공금은 대표이사의 월급 4백50만원 뿐이었다. 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을 때조차 반드시 자기 주머니를 뒤졌고, 사적인 용도로 차를 써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개인카드로 주유를 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기초 생활수칙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남는 장사임을 강조한다. 한국 기업들에게 세계 경쟁력이 모자란 이유는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이익을 도모할 줄 모르는 근시안들 때문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윤리경영과 사회환원이 오히려 기업의 핵심 경쟁력이라는 경영이론을 요즘 뜨는 것을 보면 그는 이를 '한국적 기업문화'로 구체화시킨 선구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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