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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심수관 "한국과 일본의 가교로 등대 같은 역할을"

[김유경의 문화산책] <43> 조선도공 14대 심수관과의 만남 ⑤

15대 심수관 '한국과 일본의 가교로서 부동의 등대 같은 역할하겠다'

조선 도공의 후손으로 일본 가고시마 미야마에서 사쓰마 도자기를 제작해온 심수관가의 15대 심수관(大迫一輝; 오사코 가즈테루)씨가 18일 서울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열린 부친 14대 심수관 추모회에 왔다.

한일협력위원회가 주관한 이날 행사에 과거 14대 심수관(1926-2019)과 교분을 나눴던 100여명의 인사들이 참석했다. 15대 심수관은 추모사에서 '한·일 두 개의 국적을 가진 시민'으로 14대에서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현실과 의식의 흐름을 담담하게 전했다.

1598년 이후 조선인 혈통을 이어가며 도자기 제조를 지속해왔고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도자기의 명가로 위상을 굳힌 심수관의 사쓰마 도자기는 한국이나 일본 모두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정치적·사회적 의미가 깊은 위상을 지녔다. 15대가 이끌어 가는 심수관가는 조선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해진 과정을 말해주는 재일 한국인의 뿌리깊은 상징이기도 하다.


▲14대 심수관 추모회에서 인사하는 15대 심수관(맨 오른쪽)과 부인, 누이, 아들 일행 가족들 ⓒ김유경

15대의 추모사에는 그동안 몰랐던 14대 심수관의 행적도 알려지며 특히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심수관가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했는지에 대한 사실적 증언이 있었다. 이들 가문의 400여년 역사는 그대로 한국사의 한부분이기도 하다. 이날 추모사 중 일부분을 한유택 등 두 분의 통역으로 소개한다.

안녕하십니까. 15대 심수관입니다.

아버지 14대 심수관의 감수성 많은 청년시절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절정에 있었던 때로, 아버지는 조선인이라 하여 던지는 돌에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일본에서 350년을 살아왔음에도 '조선인'이라 부르고 차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외적으로는 2차 대전 중이라 미국과 싸우고, 안으로는 일본인의 차별과도 싸워야 했던 때, 아버지는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마음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출전해서 전사하여 야스쿠니 신사에 묻힌다면 남은 가족은 편안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그 쓰라린 경험을 사회에 대한 증오심으로 쏟아내지 않고 '미래를 만드는 어린이를 위한 사회교육'에 전념했습니다.

'미래는 어린이와 함께 한다'는 말은 아버지 14대가 가장 좋아한 것이었습니다. 전국학부형연합회(PTA) 부회장으로 아버지는 각지에서 한일교류를 권하여 한국의 역사와 언어를 말하고 한국 여행한 추억을 이야기 하고 어린이들이 양국의 음악과 아름다움을 알게 하여 우정을 쌓도록 노력했습니다. 일본의 산골마을 어린이들을 위한 교원 증원활동은 지금도 그 평판이 전합니다.

'중국이란 어머니의 가슴에서 한국이란 유방이 나오고 그로 인해 길러진 것이 일본'이라는 아버지의 말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많은 공감을 얻은 것은 '한일 상호이해'에서 더 나아가'한일 상호포용'이란 것이었습니다.

한일수교 정상화가 되던 1965년 아버지가 처음 한국에 와서 서울대에서 강의할 때 '여러분이 일본강점 36년을 말한다면 나는 아예 일본에 잡혀가 살았던 370년을 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냐는 것이었습니다.

1972년 일본과 중국과의 수교 직후 아버지는 "일본이 나서서 하얼빈의 안중근의사 유골의 한국반환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가고시마에서 도쿄까지 날아가 니카이도(二階堂) 부총리를 방문, '일본의 국사에 관해 의논하러 왔다'고 하니 부총리는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와 응대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골 한국반환운동은 중국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아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한국의 노태우대통령으로부터 후쿠오카 명예총영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때 주일한국대사가 이원경선생이었습니다.

1998년 사쓰마 400년제 때에는 한일협력위원회 이대순 위원장 등의 도움을 받아 그동안의 조상님들 혼이 고국 땅을 방문하여 한국인과 만나는 것처럼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400년간 일본에서 흙이 되어 묻힌 많은 조선도공들의 혼을 위로하는 400년제이기도 했습니다. 그 여파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일본수상 간에 '21세기 한일 파트너쉽'이 선언됐습니다.

이때 저는 남원으로부터 불을 채취해 가고시마 미야마로 운반해오는 일을 지휘했습니다.태토와 유약은 처음에 조선에서 가져온 것을 썼지만 불만큼은 그러지 못했던 사쓰마 도자기 초기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불도 한국서 가져와 굽고 싶다는 일본 미야마의 젊은 도공들 염원에 따라 남원에서 불을 채취해 온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우리 한국인은 일본에 도예기술을 전했습니다. 일본인은 그것을 산업 수준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한국이 일본에게 배울 점이 그것입니다." 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김대중 정부가 주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2004년 가고시마에서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담 후 미야마의 저희 집 수관도원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때 노대통령 내외께서는 차에서 내려와 우리 동네의 산을 향해 머리 숙여 인사하는 예를 표하셨습니다. 그 산에는 조선에서 온 조상님들이 420년 간 지켜져 내려오는 단군사당 옥산신사가 있고 그 주변에는 400년 세월동안 생겨난 무수한 도공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산을 향해 노무현 대통령님이 묵념으로 예를 표하실 때, 모든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간 듯한 정말로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흐르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또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눌려있던 존재이던 우리를 한국과 일본의 가교로 만들어 준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끊임없이 노력해온 아버지를 그동안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한국과 일본의 모든 분들에게 고맙습니다.

▲2004년 수관도원을 방문한 노무현대통령(앞줄 오른쪽)을 맞는 14대 심수관. 이날 옥산신사와 도공들의 무덤이 있는 산을 향해 예를 표하던 노대통령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울었다고 했다. 이 광경을 잊지 못한다는 15대 심수관은 '우리가 한·일의 가교로 떠오르던 순간이자 조선도공 조상들의 혼이 일시에 고국에 돌아간 것 같았다'고 했다. ⓒ노무현사료관자료
▲가마 앞에서 불때기 작업을 하는 15대를 바라보는 생전의 14대 심수관(왼쪽) ⓒ수관도원

아버지는 저에게 '너는 등대가 되어 부동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등대라는 부동의 존재가 있으면 자유롭게 움직이던 배는 좌초되었다가도 등대의 빛을 보고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 가야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그 등대 역할을 충분히 해야만 한다.' 하셨습니다. 자유스럽지 않아서 얻은 자유, 움직여지지 않는 것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현실, 이것이 사회관계이고 한일관계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부동의 등대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러시아 에르미타즈 박물관 소장 12대 심수관이 제작한 대화병을 찾아보는 15대 심수관(왼쪽) ⓒ수관도원
▲15대 심수관이 제작한 대향로 ⓒ수관도원

아버지가 남기신 또 하나의 경구는 '진정한 남자는 혼자라도 외로워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뿌리를 갖고 일본의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가면서, 변화하며 흘러가는 한일관계에서 움직이지 않는 등대가 될 것을 생각합니다. 부친의 소원이던 한일 양국민의 우정과 상호 포용을 다시 한번 여러분께 부탁하고, 오늘 와주신 여러분께 더욱 더 감사를 표합니다.

유족대표 15대 심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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