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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화가 미국 덕이라는 주장, 사실일까?

[특별기획] 한미동맹을 묻는다(2) 자유·민주·인권을 압도한 반공

"미국이 수십 년간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동안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은 성장하고 발전했다. 미국의 대외 역할을 위해 미국 국민은 세금으로 기여했다."

11월 하순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나경원 자유한국당,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들이 전한 아툴 케샵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수석 부차관보의 발언이다. 이 말은 한국이 미국 덕분에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이룬 만큼,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으로 보답하라는 취지이다.

그러나 이는 일방적이고 굴절된 역사 인식이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공과는 균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 지부장과 1989-1993년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가 <한겨레>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한국의 분단에는 미국에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미동맹의 "갱신(Renewal)"을 강조하고 있는데, 정작 갱신을 원한다면 동맹에 대한 일방적 인식과 요구를 내려놓고 그레그의 말부터 되새겨야 할 것이다.

부마 민주항쟁과 미국 : 국방비 증액과 침묵의 교환


한국의 민주화는 '미국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도 많고 한국인도 꽤 있다. 미국이 군정기에 자유민주주의를 이식하고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부터 한국을 지원했다는 것이 이러한 역사 인식의 뿌리를 이룬다. 그러나 미국의 대한 정책의 핵심은 민주주의보다는 '반공'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이는 박정희 및 전두환의 입장과 대체로 조화를 이루면서 군부 독재의 강력한 토대가 되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부마 민주항쟁 및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의 태도이다. 최근 공개된 미국의 자료를 중심으로 이를 추적해보자.

박정희는 악명 높은 독재자였던 반면에 지미 카터는 '인권 외교'를 표방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1979년 6월 29일부터 7월 1일에 서울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은 두 지도자가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카터가 인권 개선 조치를 요구하자 박정희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만약 볼티모어에 소련군이 대거 주둔하고 있다면, 미국 정부는 현재 미국인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소련군이 땅굴을 파고 특수부대를 워싱턴 D.C로 보낸다면, 미국의 자유도 크게 위축되겠지요."

충돌의 지점은 여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미국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카터는 박정희에게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수준이었던 한국의 국방비를 최소한 6%까지 올리라고 요구했지만, 박정희는 개발도상국으로서 한국은 이미 충분히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또한 카터가 긴급조치 9호의 철회를 요구하자, 박정희는 "체제전복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며 거부했다.

당시 한미간에 최대 갈등 요인이었던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카터가 주한미군 동결을 선언하면서 일단락됐다. 그리고 남은 문제는 한국의 국방비와 인권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박정희 정권의 국방비 증액 약속과 카터 행정부의 한국 인권문제 침묵 사이의 교환으로 귀결되었다.

부마 민주항쟁이 시작된 지 하루 뒤인 1979년 10월 17일, 해롤드 브라운 미국 국방장관은 한미 연례 안보 회의(SCM) 참석차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브라운은 F-5 전투기 68대를 한미 공동으로 생산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브라운은 한국이 국방비를 대폭 올려야 한다고 거듭 요구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당초 입장에서 후퇴해 국방비를 "GDP 대비 6~7%로 인상하겠다"고 약속했고, 브라운은 이를 "수용했다." 대신 박정희는 "사적으로는 (인권문제에 대한) 미국의 충고를 받아들이겠지만, 공개적으로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도 하듯 브라운은 SCM이 끝나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정부의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한국에서 미국의 안보 역할을 이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미국은 한국의 국방비 증액이라는 선물을 받아들고는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사실상 침묵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 외교'를 표방한 카터의 입장은 어땠을까? 미국 자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란의 샤 정권의 종말과 뒤이은 이란 인질 사태로 인해 카터 대통령은 한국 문제에 신경 쓸 여유가 거의 없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미국: 인권보다는 안보가 우선


부마 민주항쟁 이후 10.26 사태와 12.12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한국 정치는 커다란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세력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면서 집권 야욕을 드러내자, 미국 내에서도 여러 가지 방안이 검토되었다. SCM 연기와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통해 전두환 세력을 압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또한 한국 장성이 전두환 세력을 진압하자고 존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과 윌리엄 글라이스틴 미국대사에게 제안했는데, 미국은 이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주 상황이 유혈 사태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 미국은 중대 결정을 내리고 만다. 백악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를 열어 "미국 정부가 (한국의) 개혁 및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기에 앞서 한국이 광주에서 권한부터 회복해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미국이 전두환의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을 승인·지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다 할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들이 부마 민주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무자비한 진압을 하고 있을 때, 인권 외교를 표방한 카터는 방관자적 자세를 보였다. 이는 카터 행정부에 큰 기대를 걸었던 한국의 시민·학생들에게 배신 어린 좌절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미국에겐 "안보적 고려가 인권을 압도했다." 카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동맹·우방·무역국들이 우리의 인권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그 나라들을 소련의 영향권이나 심지어 전복 세력에게 넘겨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후 미국은 전두환 정권을 승인하는 절차를 밟아나갔다. 1980년 8월 위컴은 "전두환이 합법적으로 선출되고 광범위한 정치적 기반을 입증하며 한미안보 관계를 훼손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군복을 벗고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은 이를 두고 비민주적 선거라고 비판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그리고 카터에 이어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은 전두환으로부터 김대중 석방 및 핵무기 개발 포기 확약을 받고는 그의 방미를 수락했다. 전두환 정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셈이다.

군사독재 시대에 미국이 한국 민주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을 찾자면, 아마도 죽음의 위기에 처한 김대중을 두 번 구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도 생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에 사의를 표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김대중은 한국의 군사독재 시기에 미국 대학이나 싱크탱크에서의 연설, 언론 인터뷰, 의회 관계자들과의 면담 등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들을 가졌다. 그리고 이들 기회를 통해 미국의 위선을 비판하고 진정한 반공의 길을 설파했다. 그가 역설한 진정한 반공의 길은 반공을 이유로 독재 정권을 유지·비호할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도 부러워할 만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지원과 한미동맹을 존중하면서도 가쓰라-태프트 밀약부터 한반도 분단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미국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 마땅히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대중이 이런 얘기를 미국에 전할 때, 한국의 국력은 미국에 비해 보잘 것 없었고 북한과 비슷하거나 막 추월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미국인들은 그의 얘기를 경청했고 때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날 한국은 그때에 비해 수십 배나 국력이 커졌다. 하지만 미국 앞에만 서면 더 작아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참고 문헌

1. <한겨레>, 2011년 5월 13일.

2. Memoranda of Conversation, President Jimmy Carter, South Korean President Park Chung Hee, et al, June 30, 1979, Secret, 1979-06-30.

3. HAROLD BROWN: Offsetting the Soviet Military Challenge(1977–1981), History of Defense Secretary, 2017.

The Washington Post, October 20,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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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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