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부슬부슬 내려요.
구수한 흙내음이 물씬 풍기네요.
부슬비를 맞으며 은빛 노을 진 골짜기 따라 산길을 걸었습니다.
이 싱그러운 공기, 혼자 즐기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서울 사는 친구들에게 한 아름씩 싸다가 선물로 주고 싶어요.
흡사 속살을 밟고 가듯 대지가 부드럽습니다.
서쪽 산 젖봉 사이는 아직 흰 눈얼음이 붙어 있지만
아래로는 졸졸 체액 같은 물기를 흘리며 촉촉이 골을 적시는군요.
아마도 산골 흰 눈은 이번 봄비에 씻겨서 자취 없이 사라질 겁니다.
산골 음지는 겨울이지만 더 이상 영하의 날씨는 안 오겠지요.
봄은 봄인데 보이는 산천초목은 아직 겨울이군요.
잎은 다 떨어진 나무이고 가랑잎은 땅에 구릅니다.
그런데도 저 개울 너머 뽕나무 마른가지는 유난히 해맑아 가보았더니
뽕나무 가지는 벌써 물이 올라 있었습니다.
봄을 준비해 온 것이 어디 뽕나무뿐일까.
다른 나뭇가지들도 만지는 것마다 토실하게 물올라 있었습니다.
모든 나무들이 시침을 뚝 떼고 있었습니다.
속에서는 대지에 입술을 대고 쪼옥 쪽 물기를 빨아올리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죽은 척 보이지 않았지만 나무들은 겨우내 살아 있어 대지에 입술 대고
젖을 빨듯 물기를 빨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왕성하게 속 살림을 하고 있었으니
조만간에 이 당산에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다 잎 돋고 꽃 필 겁니다.
그제는 딸이 서울에서 학교를 마치고 자취방을 빼는 날이었답니다.
3층 계단을 올라 이사짐 꾸러미를 등에 지고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냉장고 같은 큰 짐을 지고 혼자서 3층 계단을 내려 왔습니다.
한발 한발이 모두 헛걸음일 수 없더군요.
계단 하나도 그토록 위중한 밑바닥인 줄 예전에는 잘 몰랐습니다.
내 발의 한걸음마다 감사했습니다.
아직도 내게 이 정도 힘이 숨어 있다니 스스로 대견합니다.
땀이 이마에 맺혔습니다.
병치레를 한 몸이라 자신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흘리는 땀은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신호입니다.
저 들밭에 무수한 초목도 어느 것이나 다 살아서 봄을 맞이하는 것이 아닙디다.
절반가량은 늙고 병들다 죽어 땅 밑에 깔리고 절반 정도는 살아서 물 오른 가지를 만듭니다.
우리도 그와 같아서 살아 있기에 희망을 만듭니다.
저 나무에게는 한 가지 한 가지가 희망이듯 내게는 한 발 한 발이 희망입니다.
저 나무들이 살아 있어서 대지에 젖줄을 대듯
나도 살아 있기에 희망에 젖줄을 댑니다.
희망은 부슬비처럼 허공에 흩어지나 봐
희망은 대지를 적시고 자취 없이 사라지네
잠기고 잠겨서 땅 속 깊이 슬픔으로 없어져
어둠이 되고서야 비로서 뿌리에 다다르네
희망은 그런 건가 봐
인생이란 중량이 냉장고 등짐 만큼이나 무거워
발걸음 한 발 한 발이 이처럼 위중한 줄 알고서야
비로서 희망에 다다르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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