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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맨'의 귀한 영화사진들로 보는 충무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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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맨'의 귀한 영화사진들로 보는 충무로의 역사

[김유경 문화산책] <41> 충무로와 스틸맨의 영화사진들①

현대매체로서 영화만큼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올해로 한국 영화가 100주년을 맞았다. 1919년 10월27일 단성사에서 연극공연에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상 장면이 포함된 ‘의리적 구토(仇討;원수와 싸운다는 뜻)’상영이 첫 번째 한국 영화로 공식 인용된다. 배우 김도산이 감독, 주연한 일본극의 번안으로 계모와 재산을 놓고 벌이는 다툼이 줄거리인데 장충단, 살곶이 다리 등 조선 현지를 처음 보여줘 관객이 ‘취한 듯’ 빠져들어 보았다(1931년 단성사에서 공연된 ‘의리적 구투(仇鬪)’는 완전히 다른 내용의 순연극으로 ‘의리적 구토’와 자주 혼동된다).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최은희. 1961년 신상옥 감독 작품

100주년 기념행사가 여기저기서 열리는 중 서울에서 영화의 거리로 꼽히는 충무로에서 영화 스틸맨들과 만나고 오래된 영화관 단성사의 옛 이야기도 듣고 아리랑고개를 산책하기 좋았다.

▲ 2019년 9월 ‘은막의 스타’ 스틸사진 전시장에 나온 한국영화의 원로 스틸맨들. 왼쪽부터 윤동실 노기흘 홍기영 우명률. ⓒ마동욱

1960년 한 중학생이 5,6세 때부터 엄마 따라다니며 안 본 영화가 없을 만치 되었다. 중1,2학년 때 이미 국내외 배우이름 200명을 외우고 있어 반에서 그녀를 능가할 영화 딜레턴트가 달리 없었다. 배우랑 똑같은 옷을 맞춰 입고 머리도 따라서 빗어보곤 하던 것은 예사였다. 얼마나 많은 화제가 여기서 생겨나는지는 모두들 아는 대로이다. 영화가 대중적으로 영향이 컸다는 예지만, 100주년의 공식 기념행사에서 빗겨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영화 마니아의 이야기들은 일상에서 언제든 열정과 공감의 화제가 된다.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영화포스터 전시회는 정관용씨가 평생 온갖 수단방법을 다 써가며 모아들인 2만장의 포스터 중 선별해 전시한 것이다. 영화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자산으로 순전히 개인차원에서 수집된 것이다.

충무로 반도갤러리에서는 영화 스틸사진 ‘은막의 스타’ 사진전이 9월19일부터 10월1일까지 열렸다. 한국영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1960-70년대 주요 배우들과 영화장면을 50점의 흑백사진으로 전시한 것인데, 이 사진들을 만들어낸 ‘스틸맨’들의 활동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다. 동영상과는 별도로 영화의 중요 장면 사진을 찍던 스탶을 스틸맨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촬영한 사진은 홍보용으로 인쇄되어 극장전면 진열장에 나붙고 영화제작자나 각 지방극장 배급업자와의 협상에 주요 자료로 제시되고 포스터로 만들어졌다. 백영호 홍영기 노기흘 양기주 서흥익 최성화 박희재 이태직 김진환 등 십 수명의 인력들이 지금 생존한 그 시절의 스틸맨들이다. 이들이 찍은 35밀리 컷 필름 수 백만 장은 버려지다시피 했던 것을, 스틸맨 우명률씨가 주워 모으다시피 간직하고 있던 수 만 장 가운데 눈빛출판사에서 선별해 흑백사진으로 내놓은 것이다.

▲ ‘벙어리 삼룡이’의 김진규·최은희. 1964년 신상옥 감독 작품

▲ ‘빨간 마후라’의 남궁원, 최무룡, 박암, 신영균, 이대엽. 1964년 신상옥 감독 작품

이들이 찍은 사진 한 컷이 주는 울림은 깊다. 그 시대의 아름다움과 윤리, 스토리 전개에 대한 암시, 생활사 까지 다 드러나 보이고 사진전문가의 터치와 구도를 보는 재미와 배우들의 현장 에피소드를 곁에서 지켜본 데서 나오는 비사들도 있다.

이만희감독 영화 ‘만추’는 그 필름조차 보존돼있지 않고 포스터와 스틸사진 몇 장이 남은 흔적의 전부인데, 북한의 김정일 영화컬렉션에 ‘만추’의 필름이 소장되어 있다는 신상옥감독의 증언이 있었다고 한다. “북과 교류가 되면 내가 가서 동무, 그 필름 좀 보여주시구래 해야겠어.”라고 전시장에 온 사람들의 대화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나운규의 ‘아리랑’도, ‘임자없는 나룻배’도 필름이 없다. 1960년대에 야외용으로 많이 쓰던 밀짚모자에는 필름을 가늘게 오린 모자테를 둘렀는데, 모자 제작하는 업체들은 그 필름을 리어카를 가지고 내다버린 물건 수집하던 엿장수들로부터 사서 썼다고 한다. 지금 없는 수많은 영화필름들은 이때 아마 밀짚모자 테로 다 잘려나갔는지 모른다. 영화필름이 그 정도니까 스틸사진 필름의 보관은 체계적 보존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가 순전히 개인적 열정으로 건져진 것들이다.

1960년대는 6.25 이후 안정된 분위기에 현대적 오락거리가 달리 없었고 텔레비전은 아직 보급되기 전이라 영화는 독보적인 유흥거리였다. 이 시기에 한국영화는 급성장, 일년에 제작되는 편수가 수백 편이었다.

“스틸맨은 영화사마다 전속 1명과 조수까지 두셋이 같이 작업하는데 조수생활 20년쯤 해야 정식 스틸맨이 되는 거였어요. 시나리오를 먼저 받아보고 어떤 게 명장면이 될지를 미리 숙지해논 뒤에 전체 장면을 찍을지, 배우 1인을 클로즈 업 시킬지, 어떤 각도로 찍을지 등을 고민해 순간을 포착하는 거였죠. 영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아내는 회화라고 할 수 있어요. 장면이 결정되면 구도는 저절로 따라붙는 것이지요.”

어려운 시절이라 35밀리 필름을 아껴가며 로라이 플렉스나 마니아33 카메라로 찍었다. 한 영화에 70 - 80장 정도의 엄선된 장면사진으로 앨범처럼 만든 ‘스틸북’이란 한국에만 있는 사진집을 만들어 내서 그걸로 선전도 하고 돈 한푼 없이 시작한 영화의 자금을 이끌어낼 사업협상도 하고 아주 유용한 자료로 쓰였다. 이 시절의 스틸 사진은 전부해서 수백만 장 만들어졌으리라고 한다. 1950년대부터 활동하던 백영호씨가 최고 원로 스틸맨으로 ‘상록수’영화의 스틸사진을 찍었다. 1961년의 ‘마부’는 양기주씨가 찍었다.

▲ 김승호 주연의 영화 ‘마부’. 1961년 강대진 감독 작품. 양기주 스틸사진

“그때 한국영화는 1주일 정도면 다 찍는데 장비로나 규모로나 헐리웃 영화는 도저히 따라할 수가 없었지요. 일본영화는 그래도 비교대상이 돼서 많이 참고한 게 사실이에요. 한국영화는 신상옥 프로덕션의 장비가 제일 좋은데다 프로정신이 남달라 필름을 많이 써가며 좋은 영화를 남겼습니다. 최은희씨가 거기 독점적으로 출연해 고전적인 한국여인상의 캐릭터로 사랑받았죠. 김지미씨는 미인배우의 전형이죠. 내면을 토로해내는 힘이 대단했어요. 배우들은 미리 역할 연습을 해와서 카메라 앞에 서는 거에요. 코메디가 거저 나오는게 아니죠. 김희갑씨는 신사이고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어요. 주연보다 조연이 더 재미있는 경우도 많았고.” 우명률씨가 그 시대 필름과 대본들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 김희갑과 도금봉. 영화제명 확인 안됨. 영화적 기능에 맞게 처리한 구도가 돋보이는 사진.
▲ ‘청산에 우는 새야’의 최무룡·문희. 추석을 맞아 선물을 양손에 들고 귀향하는 도시 부부의 모습이 눈에 훤히 들어온다. 1971년 최훈 감독 작품
▲ ‘화가 이중섭’으로 출연한 박근형. 1974년 곽정환 감독 작품

충무로라는 지명 또한 한국 영화사 100년에 포함될 자산 같다. 원래는 이순신장군의 출생지 건천동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지만 1955년 이후 영화제작사들이 충무로 일대에 모여 들고 스타의 꿈을 가진 청년들이 주변을 맴돌았다. 2000년 대 들어 영화사는 모두 강남 등지로 가거나 대기업에 흡수되어 지금 충무로에 적을 둔 영화사는 단 한군데도 없다. 영화관은 영화 한편이 여러 극장에서 동시 개봉되는 체제가 되면서 수많은 멀티영화관의 등장하며 시내에 위치한 개봉관으로서의 비중은 줄었다.

▲ 충무로 마른내길 가까이 묘동 버스정거장 부근 보도블럭에 새겨진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과 거북선.ⓒ 김유경

그래도 충무로라는 말은 영화란 말의 다른 이름으로 통칭되기도 한다. 한국 영화 100주년 기념 인터뷰에 나온 배우 김지미씨의 일생을 언론은 ‘충무로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충무로를 지나보아도 배우나 배우지망생처럼 보이는 이들의 움직임은 잘 포착되진 않지만, “지방으로 촬영을 가는 일행의 버스는 지금도 새벽 5시 충무로에서 떠납니다”고 스틸맨들이 말한다. 그보다는 카메라 가게를 비롯해 인쇄관련 온갖 공정이 가능한 수백 개소의 업체, 영화관들이 가깝게 포진한 거리 구성이 영화를 형성하는 배경을 어슴푸레 짐작케 한다.

극동빌딩 자리가 조선시대 활자를 만들어 내던 주자소였다는 표석이 있다. 이곳이 오늘날 ‘인쇄골’이란 애칭으로 자리 잡은 것을 보면 대량인쇄가 가능한 활판인쇄가 이곳에서 당연한 발전 과정을 맞아 인쇄골로 변했구나 이해가 된다. 상징적인 풍경이 있었다. 1970년대 중구 장교동의 99간 한옥 한규설대감집이 계속 유지되지 못하고 분할되니 솟을대문 양쪽으로 줄줄이 늘어섰던 행랑채 한 칸씩 마다 소규모 인쇄소가 들어서 명함이나 선전지 같은 것을 만들어주던 업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사진이 얼마나 정교한 기술체계를 거쳐 만들어지는지가 충무로에 오면 실감나게 이해된다. 중요한 사진 인화는 충무로에서 중점적으로 이뤄진다. 달력부터 광고지까지 온갖 출력을 해내는 업체들이 길마다 즐비하고 수많은 카메라 가게들은 엄청난 고가의 장비를 다루거나 수십 년 전 흑백필름까지도 사진으로 만들어 주는 곳까지 다양하다. 표구와 사진틀 업체까지 전 과정의 공정이 이곳에서 완성을 본다. 창작과 도전의 힘이 곳곳의 분주한 업소마다에서 느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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