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은 간의 날이다.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산 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뜯어 먹혔던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밤사이 다시 원상태로 자라날 만큼 간은 재생력이 뛰어난 장기이다. 그럼에도 간은 어지간히 고장 나지 않고서는 증상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침묵의 장기'라고도 불린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등 흥행 작품들을 연출하며 한국 영화계의 전설이 되었던 신상옥 감독은 그 스스로 영화 같은 삶을 살았지만 C형 간염이 간경변, 간경화로 진행되어 결국 2006년 사망하였다. C형 간염은 한 번 감염되면 70~80%가 만성 간염으로 진행하고 이 중에서 30-40% 정도가 간경변증, 간암으로 진행한다.
C형 간염은 감염 초기에는 증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 자연 치유되는 경우도 거의 없어 C형 감염 환자는 감염된 후 20-30년이 지나서 만성간염이나 간경변증, 간암 등으로 뒤늦게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설상가상으로 C형 바이러스는 변이율이 높아 백신 개발도 어렵다. 전 세계적으로 1억3000만~1억7000만 명이 C형 간염에 전염되었다고 하며 세계보건기구에서도 C형 간염 바이러스로 2015년 약 40만 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기존에는 C형 간염 환자 치료에 인터페론과 리바비린을 사용했다. 하지만 탈모, 독감 증세, 골수 억제로 인한 백혈구 감소증, 우울증 등 부작용이 심하고 효과도 그리 좋지 않아 새로운 치료제에 대한 갈증이 높은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에 2010년 파마셋이라는 회사가 소발디를 개발 중이라는 소식을 내놓았다. 길리어드는 2011년 이 회사를 약 110억 달러에 인수하여 소발디 임상시험을 진행하면서 결국 인류를 C형 간염으로부터 구원할 엄청난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
소발디는 기존 치료제와 비교할 수 없는 약이다. 단 12주 치료로 완치의 꿈을 실현시켰을 뿐만 아니라 부작용도 찾아보기 힘들고 다른 약과의 상호 작용도 거의 없다. 효과 뿐만 아니라 안전성에서도 "유레카~"를 외칠 수준이다. 기약 없이 약을 먹어야 하는 B형 간염 치료제들과도 비교 불가, 절대 우위이다. 세계보건기구조차 소발디에 힘입어 2030년까지 전 세계에서 C형 간염 멸종을 목표로 삼았다. 이처럼 칭찬을 해도 해도 모자랄 것만 같은 '꿈의 치료제' 소발디가 가진 한 가지 단점은 매우, 매우, 매우 비싸다는 점이다. 출시 당시부터 한 알 당 100만 원 넘는, 12주 치료기간 약값이 1억 원에 달하는 높은 약가 때문에 미국 등에서 수많은 논란을 낳았다.
길리어드는 2013년 12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소발디 허가를 받은 후 2014년 곧바로 100억 달러 매출을 기록했다. 미국 처방약 매출 1위도 단숨에 달성한 길리어드는 돈벼락을 맞은 듯 했으나 축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미 2015년부터 '완치'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매출이 반 토막 난 것이다. C형 감염이 치료될수록 환자 수는 감소하고, 신규 전염되는 환자 수도 줄어드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혁신과 접근성은 의약품의 역할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두 축이다.
그동안은 이 중 주로 접근성에 대한 논란이 첨예했는데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의 치료제'가 과연 약이 맞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소발디도 애초 시작은 여기에서부터였다. 그러나 1억에 육박하는 소발디 약가도 '질병 완치=환자 수 감소'라는 추세 앞에서는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지 못했고, 이는 곧 제약자본이 새로운 질문에 봉착했음을 알렸다.
초국적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가 나섰다. '환자를 완치시키는 것이 과연 제약산업에도 좋은 것인가?' 단 몇 주 만에 병을 완치시켜 더 이상 약이 필요 없게 만드는 소발디 같은 진짜 치료제는 NO, 혈압, 당뇨, 고지혈증처럼 오래 오래, 두고 두고 필요한 하는 약은 YES.
완치약을 만들지 마시오. 환자가 없으면 돈도 없으니까.
우리들은 막연하게 믿고 있다. 제약산업이 끊임없이 혁신을 이루어 낼 것이라고. 결국은 인류를 질병에서 구원시켜줄 것이라고. 약값이 비싸서 개발도상국, 제 3세계 환자들은 접근성이 좀 떨어질 수 있겠지만, 우리 건강보험 재정은 좀 갉아먹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제약산업이 원하는 만큼의 이윤을 충분히 보장해주면 그들이 혁신적인 치료제로 보답해 줄 것이라고. 바로 그 믿음이 소발디 1억 약가를 용인해준 것이다.
그러나 수천만 원, 수억 원, 10년 전만 해도 상상불가였던 약가를 보장해주어도 과연 그것이 혁신을 약속할까? 환자를 치료해버리면 더 이상 돈벌이가 없어져서 안 된다는 자본이 용납 가능한 혁신은 어느 수준일까? 알약 하나로 암을 치료하고, 주사 한 방으로 치매를 물리칠 수 있는 세상은 과학 기술 발전 여부와는 별개로 지금 사회 시스템 하에서는 몽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왜? 완치된 환자는 더 이상 돈벌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구조 자체가 '완벽한 혁신'을 허락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어떤 약을 개발할 것인지, 무슨 방식으로 생산할 것인지, 누구에게 약을 제공할 것인지 약의 전 생애 주기를 걸쳐 모든 결정권은 자본에게 있다. 수많은 혈세가 연구 지원 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제약사에 흘러들어가고, 세금 감면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 국내의 경우 건강보험 재정을 헐어가며 약값까지 두둑이 챙겨주고 있어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약이 어떤 약인지를 말할 수 없다. 뿐만 아니다. 이 모든 독식을 가능하게 하는 특허권은 오롯이 제약사에게만 독점된다. 애초 혁신을 독려하겠다고 만들어진 특허가 이제 오히려 혁신을 방해하는 상황이다. 온갖 정보와 기술들이 특허권이라는 담에 둘러싸여 더 나은 발전을 곳곳에서 막아선다.
그렇다면, 이제 한 번쯤은 새로운 상상을 해봐도 좋지 않을까? 그리고 그 상상의 시작은 이 모든 것들의 가장 핵심에 자리 잡은 특허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개발을 촉진하고자 만들어진 특허, 독점이라는 제도가 오히려 혁신을 저해하는 이 부조리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이제 사회가 고민해볼 때가 되었다. 특허를 독점하지 않고 풀(Pool)에 넣어 누구든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도록 하는 특허풀 제도, 누구나 쓸 수 있는 공공 특허의 확대, 의약품 개발 부담을 사회적으로 공유함으로써 혁신을 추동하고 약가를 제어해보자는 단절(Delinkage) 모델 등 다양한 방안들이 현재 전 세계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우리도 꿈꿔보고 싶다. 4차 산업 혁명과 블록버스터 신약 개발로 벌어들일 수 조 원 달러에 대한 상상 말고, 꽁꽁 갇혀 있는 특허를 풀어 공공이 함께 그 열매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런 상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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